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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하이팰리스 괴담!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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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하이팰리스 괴담! 진실은…

[親Book] 제임스 발라드의 <하이라이즈>

유명한 배우, 정치인, 보석상. 탄탄한 기반을 쌓은 의사, 변호사, 세무사. 그게 아니면 적어도 방송국 PD나 항공 관제사 같은 견실한 직업인. 이런 '하나같이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인 주민들이 새로 지어진 고급 아파트에 입주했다.

건물 안에는 슈퍼마켓, 은행, 미용실, 수영장, 체육관, 주류 판매점이 갖추어져 있고, 아파트 주민의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와 주민 전용 고급 레스토랑까지 있다. 최첨단 에어컨, 승강기, 전기설비, 쓰레기 처리 장치가 주민들의 편리한 생활을 돕는다. 한번 단지에 들어서면 번거롭게 나갈 필요가 없다. 2.8킬로미터 저편에 있는 안개 덮인 런던 시내는 단단한 콘크리트와 철근에 가려 잊혀진다.

이 고급 아파트는 19세기의 낡은 집들을 쓸어버리고 만든 콘크리트 매립지 위에 건설되고 있는 단지의 첫 번째 동이다. 각 동 40층 1000가구. 주인공 로버트는 이혼 후 적잖은 값을 치르고 여기에 입주했다. 99년 임대차 계약이었다. 비슷비슷한 소득 수준에 비슷비슷한 차를 몰고 집안에 비슷한 스타일의 가구를 놓고 살며 세련되고 자신감 있는 말투를 쓰는 중상류층의 집결지인 이 고층 아파트는 대학 부교수이자 의사인 로버트에게 딱 맞는 곳이었다. 먼저 입주한 누나가 제안한 일이었다. 로버트의 집은 40층 중 25층, 중상층이다. 최상층에는 이 단지를 설계한 건축가 앤서니 로열의 펜트하우스가 있다.

편안하고 조용한 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던 로버트의 기대는, 그러나 입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진다. 15미터 위에서 로버트네 발코니로 갑자기 날아든 스파클링 와인 병처럼. 외부 세계를 잊게 하는 이 조용하고 밀폐된 고층 건물은 곧 높이가 곧 계급인 하나의 폐쇄된 사회를 이룬다.

▲ <하이라이즈>(제임스 발라드 지음, 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펴냄). ⓒ문학수첩
처음에는 아래층에서 쓰레기 처리 장치를 막거나, 비슷한 층 사람들끼리 무리지어 파티를 하며 서로 술병을 던져대던 입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더 심각해진다. 전기와 에어컨이 자주 끊기고, 서로 누가 더 시끄럽고 지저분한지 승부하듯 싸우는 사이에 단지는 엉망진창이 된다. 비슷한 층에 사는 사람들끼리 뭉쳐, 고층 주민들은 저층 주민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저층 주민들은 고층 주민들의 이동을 방해한다. 모두들 두어 층 아래의 주민들('아랫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래층이 쌓이는 쓰레기와 열기로 엉망이 되고 주차장의 차들이 술병에 맞아 부서진다. 고층 주민의 개가 죽더니, 저층 주민들의 초등학교가 폐쇄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아파트를 떠나거나 문제가 있다는 티를 내지 않는다. 펜트하우스에 살던 보석상이 추락사하는 사고가 났는데도 경찰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밤새 파티 소음과 단전과 냉방 고장으로 고생하고도 멀쩡한 척 옷매무새를 다듬고 집을 나선다.

이 고급 아파트는 주민들의 자존심이다. 더 높은 층은 권력과 성공의 상징이다. '보다 수준 높은 거주지'로 출세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나갈 생각은 않는다. 40층짜리 계급의 피라미드 안에 스스로 갇힌 2000여 명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저, 중, 상층으로, 나중에는 점점 더 작은 단위로 나뉜다. 종국에는 로버트가 겨우 두 층 아래에 있는 누나를 이미 난장판인 제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말할 수 없는' 일을 벌이는 지경에 이른다.

고급스럽고 교양 있는 중상류층 사람들의 정신이 생활의 모든 필요를 해결해 주는 아파트 안에서 붕괴해 가는 모습을 제임스 발라드는 섬뜩하고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래층에 술병을 던지는 정도의 작은 균열이 나중에는 폭행, 강간, 살인에까지 이어지는 모습과, 멀쩡해 보였던 교양인들이 너무나 태연히 야생 동물이 되는 과정은 그 기이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고 흡입력이 있다.

'바로 우리'가 겉보기엔 똑같고 '아파트 브랜드'와 '층고'와 '평수'로 구분되는 콘크리트 상자에 살고 있어서일까. '저렴한 1층'과 '로열층'같은 말이 생활 어휘나 매한가지인, 이미 적당한 높이가 계급인 이 도시의 주거 환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일까.

발라드는 종말과 광기, 체념을 여러 번 다룬 작가이다. 예전에 그리폰북스로 소개된 <크리스탈 월드>(김진경 옮김, 시공사 펴냄)와 <물에 잠긴 세계>와 <불타 버린 세계>는 결정화하거나 물에 잠기거나 불에 타서 멸망하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제목이 스포일러라고 웃지 말자. 세상의 멸망은 '어떻게 멸망하는가'를 미리 알려주는 단 한 줄의 제목보다 훨씬 큰 이야기이다.) 문학수첩에서 출간 예정이라고 하는 이 종말 3부작이 물리적인 온 세계의 종말을 다룬다면, <하이라이즈>는 폐쇄된 고급 아파트라는 아주 작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교양과 이성의 종말을 말한다.

서울에는 타워팰리스나 현대 하이페리온 같은 69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가 있다. 40층, 50층 높이의 초고층 주거용 아파트를 세운다는 소식도 들린다. 가구라고 불리는 콘크리트 상자 하나하나가 계급인 아파트촌으로 덮인 2012년의 서울을 다시 보면, 1975년에 상상한 초고층 아파트가 '고작' 40층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현실보다 낮아서가 아니라, '저 아랫것들을 내려다보고 싶은', '너보다 높은 곳에 살고 싶은' 욕망을 구현하는 데에는 40층도 충분하다는 사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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