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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이승만 없는 사이에…"

[해방일기] 1947년 3월 9일

1947년 3월 9일

김구를 위시한 중경 임정 세력은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틈을 타서 우익 제 단체를 장악하려 애썼다. 자기네 세력 근거인 비상국민회의 아래 이승만이 이끌던 독촉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민통)을 통합하려 한 것이다.

2월 14일부터 열린 비상국민회의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통합을 강행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상국민회의를 '국민의회'로 이름을 바꿨을 뿐이다. 그리고 2월 말 한민당(한국민주당)을 한독당(한국독립당)에 통합시키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그런데 3월 1일 독촉국민회의 전국국민대표자대회에서 국민의회의 법통을 승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봉대한다는 결의문이 나왔다. 이승만의 텃밭인 독촉국민회에서 임정을 떠받드는 결의문이 나왔다는 것이 뜻밖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대한 임정을 지지-독촉 기미 기념 대회서 결의"

독촉국민회 전국 대표 2500여 명 참집 하 3월 1일을 기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의를 하였는데 이를 국민의회에서 통과하여 주기를 건의하였다고 한다.

1) 기미년에 전 민족의 총의로써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이 30년 계속된 법통 정부이므로 우리는 이를 봉대하고 천하에 공포함.
1) 열국 간섭의 신탁 정권을 수립하려는 국제 음모를 배격할 것.

그리고 이 결의문은 동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기미 독립 선언 기념 전국 대회에서도 독촉 위원장 조성환 씨의 동의로 제안되어 만장의 갈채를 얻어 통과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일자)

서중석은 이 결의문을 김구 세력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것으로 본다.

3월 1일 독촉국민회에서는 전국국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추대하고 그 명령 밑에 복종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독촉국민회 상층부가 중심이 되어 한 것이고, 독촉국민회 구성에서 다수파로 볼 수 있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은 이에 반대하였다. 독촉국민회의 중경 임정 추대가 제안되자 이운 등 한민계 간부는 일제히 사표를 제출하고, 한민당 측에서는 독축국민회 상층부에 대한 협력을 일체 거부하였다고 한다. (…) 한 저서는 3월 3일 독촉국민회는 각 도-부-군 대표로 임정 봉대식을 갖기로 했으나 서울시지부 등 태반의 도-부-군 지부가 이 봉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30~531쪽 주34)

1945년 말 반탁 운동의 초점은 '임정 봉대'에 있었다. 모든 우익이 이에 참여했고 경찰과 군정청 직원들도 집단적으로 이에 동조했다. 김구 등 임정 세력은 1년이 지나 반탁 운동을 다시 일으키면서 '임정 봉대'를 또 그 초점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런데 사정은 1년 전과 크게 달랐다. 임정 자체가 비주류의 이탈로 위신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반탁 세력 안에도 임정 봉대 아닌 다른 목표가 떠올라 있었다. 한민당-이승만 세력의 단독 정부 추진이었다. 임정 봉대는 미-소 점령군의 권위를 아울러 부정하며 남북을 아울러 대표하는 '민족 정부'를 표방한 것인데, 단독 정부 추진은 소련을 배척하며 미국에 의지하자는 것이었다.

서중석은 반탁 운동의 구호 자체보다 실질적 의미를 분석할 필요를 주장한다. 민족 자주 국가의 '즉시 독립' 요구가 그 구호인데, 그를 위한 구체적 방법과 수단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호와 별개의 정치적 의도가 그 뒤에 깔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정치적 의도를 가진 세력들이 하나의 구호로 뭉쳐져 있었기 때문에 반탁운동은 동상이몽의 침대였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527쪽)

1945년 말 시점은 '단독 정부'란 말을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때였다. 식민지 시대 기득권을 지키고 싶거나 친일파 처단을 면하고 싶은 세력이 3상 회의 결정 수행을 어렵게 만드는 반탁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내놓을 수 있는 명분이 '임정 봉대' 뿐이었다. 그런데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 정회 후 임정 봉대보다 훨씬 더 그들 입맛에 맞는 방안을 이승만이 제시했다. '단독 정부'였다.

1945년 말에는 경찰서장들이 단체로 죽첨장(경교장)에 찾아와 임정에 충성을 맹서했다. 1947년 3월의 경찰 움직임은 이와 달랐다.

5일 오전 수도경찰청장 발표에 의하면 수도경찰청에서는 5일 시내 운니동 구 운현궁 내의 독촉국민회본부와 민주의원 그리고 서대문 죽첨장 등을 수색한 바 있었는데, 그 중 운현궁 독촉본부에서 '대한민국특별행동대사령부 포고령 제1호'라는 인쇄물을 다수 압수했다. 문서의 내용인 즉 국가존망을 좌우할 때가 오늘이니 본 특별행동대사령부의 포고령을 준수하라고 전제하고

1) 현 군정청 관공리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위반한 자, 1)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하여 불온한 언사와 문서로써 비방 또는 반대하는 자 등의 다섯 가지 조목에 범한 자는 엄중히 처단한다는 것이다.

이에 수도경찰청에서는 이 인쇄물에 대한 책임자를 추궁하는 한편 수도경찰청장은 남조선에는 미군 군정부가 있을 뿐 이런 것은 아희 장난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니 이런 것에 민중이 속아서는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또 담화 내용을 총장이 직접 방송하였다.

수도청장 담화 : "근자에 소위 대한민국특별행동대사령부란 명칭으로 명색 없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이 포고령에 위반하는 자는 엄중히 처단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아희(兒戱)에 불과하지만 우매한 민중 가운데 혹 기만을 당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조선에 있는 정부는 미군정뿐이다. 조선 독립은 연합국이 약정한 바 있고 임시과도정부 수립 후에 정식 정부가 성립될 것이다. 국제정세를 몰각하고 이기적이요 맹목적인 참칭 정부를 조직하여 민심을 현혹케 함은 죄악이요 국가 장래를 그르치는 것이다. 민중은 속지 말고 안심 취업하며 경찰관은 일심봉공하여 이러한 협잡도배의 언동을 적극적으로 취체하고 경계하라."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3월 6일자)

이 발표가 나온 3월 5일에 김구는 조완구, 이시영, 유림과 함께 미군 사령관대리 브라운 소장을 만났다. 브라운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브라운은 "소위 포고령 발포는 귀하들이 한 일이 아닌가?" 물었고 김구 등은 "절대 우리는 그러한 일은 한 일이 없다" 대답했다.

군정청 관리들에게 임정의 명령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포고령이라면 1945년 말 '국자(國字)' 사태의 재판이다. 네 사람의 대답이 꼭 거짓은 아닐 수도 있다. 포고령 제작은 신익희가 한 일일 수도 있다. 신익희는 1946년 8월에도 임정 추대 쿠데타를 시도해서 물의를 빚은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김구 등 다른 임정 요인들이 그런 일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을까? 이 포고령도 당시 진행되고 있던 임정 추대운동의 일환이었음은 틀림없다.

브라운과 만났을 때 김구가 한 말에도 임정 추대의 뜻은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김구) 해방 직후 우리가 중국에서 웨드마이어 사령관을 회견하고 미국이 대한 임정을 조선의 정식 정부로 승인해줄 수 없는가 하는 우리의 질문에 대하여 웨 사령관은 국무성에 알아보겠다고 대답하고 그 후 국무성의 회답이라 하여 동 사령관은

1) 해외 정권을 승인한다면 국내에도 당신들과 같이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될 터이니 그것을 어찌할 것이며 따라서 양개 정부를 다 승인해 줄 수 없으니 대한 임정을 승인할 수 없고
2) 해외의 임정을 국내 인사들이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할 수 없으니 대한 임정은 승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국내에 들어와 보니 입국 이래 조선 국민이 임정을 절대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무성에서 내세운 양개 조건은 해소된 것으로 보며 따라서 임정을 승인해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브 소장) 사실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미국 견해와 현재의 정세와는 다르니 승인해 줄 수 없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9일자)

국민의회는 임정 추대 운동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3월 3일에는 긴급대의원대회를 열어 주석 이승만, 부주석 김구를 선출하고 탈퇴한 비주류 요인들의 자리를 보선했다. 그리고 5일에는 임정 국무위원회와 국민의회 상임위원회의 연석회의를 열었다.

"대한 임정을 강화-국민의회 긴급대의회"

지난 1일 전국국민대표자대회에서 "대한 임정을 봉대하는 동시에 국민의회로 하여금 대한 임정을 확대 강화하라"는 건의문을 받은 국민의회에서는 3일 하오1시부터 시내 운현궁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긴급대의원대회를 비공개로 소집하고 대한 임정 확대 강화에 대하여 신중히 토의한 결과 우선 대한임시정부 주석에 이승만 박사 부주석에 김구 씨를 추대하는 동시에 국무의원에 장건상 김붕준 차이석 김원봉 김성숙 성주식 등 6씨 대신에 오세창 김창숙 박렬 이청천 조만식 이을규 등 6씨를 보선하였다 한다. 그리고 각 부장의 개선은 주석 부주석에게 일임하고 곧 그 인선을 결정하여 국무의원회의를 통과시켜 발표하게 되리라 한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5일자)

국민의회에서는 5일 상오10시부터 창덕궁 서향각에서 국무위원회와 국민의회상임위원회의 비공개연석회의를 김구 부주석 임석 하에 개최하였다. 국무위원 14명 중 조소앙 이외 6명 상임위원 13명 중 이학송 외 6명 참석으로 회의는 약 3시간에 걸쳐 하오1시경 폐회하였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독촉 대표자대회에서 건의한 임정봉대결의에 대한 공포시기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하는데 주석 이승만의 부재관계로 행정 각 부서 인선 후에 공포하느냐 우선 右 결의문을 공포한 후에 각 부서인선을 결정하느냐에 대하여 토의한 결과 주석 부재시에는 부주석 대행권한이 有하므로 금 6일 정식으로 공포하리라 하며 불일 중에 각 부서 及 인선도 결정 발표하리라 한다. (<조선일보> 1947년 3월 6일자)

이승만을 주석으로 끌어들인 것은 이승만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이승만이 없는 동안 부주석의 대행 권한으로 인사를 진행하겠다는 것은 김구 측이 조직을 장악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승만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 세력기반을 빼앗아 오겠다는 속셈인데, 천하의 이승만을 상대로 잘될까? 이 상황 때문에 이승만이 당황해서 3월 중순 귀환을 서둘렀다는 이야기는 있다. (서중석,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536~537쪽)

엄우룡이 3월 4일 발표한 견해를 보면 우익 온건파도 임정 추대 운동에 회의적인 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재홍을 따라 국민당에서 한독당으로 건너간 엄우룡은 선전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임정의 근거 정당인 한독당 요직에 있는 입장에서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것을 보면 여간 단단한 입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재홍이 민정장관을 맡고 있어서 의견 발표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사정을 생각하면 엄우룡의 견해는 그를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엄우룡은 4일 임정추대설에 관하여 여좌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최근 유포되는 대한임시정부를 봉대하여 조각 운운은 내외정세로 보아 그 실현성이 박약한 점에서 도리어 대한임시정부의 법통의 존엄을 실추할까 우려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7년 3월 5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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