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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협조하면 통일 건국이 될 거라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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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군에 협조하면 통일 건국이 될 거라 믿습니까?"

[해방일기] 1947년 3월 5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1947년 3월 5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민정장관 취임하신 지 한 달이 되어 갑니다. 선생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저 자를 한 달 내에 끌어 내리겠다"고 벼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뜻을 꺾었네요. 축하드립니다.

1년 전만 해도 조선 정치인 중 미움을 제일 적게 받는 분이 선생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익 어느 구석에서도 선생님 헐뜯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좌익에서도 대개 선생님을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인정했죠. 그런데 지금은 조선에서 제일 욕 많이 먹는 사람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안재홍 : 내가 워낙 소심한 사람이어서 남들 욕먹을 짓을 잘 못합니다. 그리고 욕심도 적은 편이어서 욕먹을 짓 할 필요도 별로 없고요. 1년 전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은 사람인데 전에 안 먹던 욕을 많이 먹게 된 것은 환경의 변화 때문이라고 봐야죠.

큰 감투 쓰면 욕을 많이 먹게 돼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죠. 욕을 모으기 시작한 게 민정장관 얘기 나오기 오래 전부터니까요. 좌우 합작 운동에 결정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좌익에서나 우익에서나 좌우 합작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미워합니다. 좌우 합작의 기본 목적이 미소공위를 통한 독립 건국인데, 그 길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인신공격을 마다않는 흑색 정치의 혼탁한 분위기가 서울 정계에 자리 잡았어요. 1년 전 같으면 익명의 삐라에나 담길 무책임한 말을 스스럼없이 입에 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게 참 심각한 문제예요. 정치인들이 민심에 개의치 않고 보스의 의중에만 따르는 행태입니다.

김기협 : 통일된 민족 국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미소공위 실패를 바라는 사람들의 범위가 드러나 왔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특권과 우월한 지위를 통일된 민족 국가에서는 지킬 수 없을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의 힘을 모아 권력을 세우려 하는 정치 세력이 있죠.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거나 식민 통치를 도왔던 친일파 못지않은 반민족 세력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는 것은 민족주의자로서 오히려 자랑스러워 할 일이겠습니다.

그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공산당-남로당 쪽의 태도입니다. 신탁 통치를 감수하면서라도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 건국을 지지하는 것이 좌익의 공식적 입장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남로당 측은 좌우 합작을 처음부터 기피해 왔습니다. 합작을 지원하는 미군정의 의도를 의심한다는 이유를 내걸었는데, 실제 그 동안의 행동을 보면 그 이유가 핑계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합작을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시종일관 보여 왔지 않습니까.

안재홍 :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작년 5월 초, 미소공위가 정회에 들어가자마자 정판사 사건이 터졌는데, 재판이 끝난 지금까지도 사건 자체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설령 사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단순한 위폐 사건이 아니라 공산당을 위축시키는 정치적 사건으로 몰아온 데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9월 초 박헌영을 위시한 공산당 핵심인물 여럿을 체포·수배한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혐의라는 것이 중요 정당 하나를 그렇게 마비시킬 만큼 심각한 게 아니죠. 그것 때문에 정판사 사건에 대한 의혹도 되살아났습니다. 이런 집중 탄압과 나란히 좌우 합작이 진행되었으니 미군정이 자기네를 고립·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을 공산당 쪽에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미군정 쪽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받아들이는 공산당의 태도에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미군정이 적대적 태도로 나오면 그에 대항하는 자기편을 넓혀야 하지 않습니까? 몽양(여운형) 등 좌익 합작파와도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나아가 우리 같은 순정 우익과도 미군정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한 제한적 협력이 가능하지요. 그런데 '신전술'이라 해서 미군정 못지않은 독선과 독단으로만 나아가니까 그 장단에 맞춰줄 재간이 없어요. 몽양이 만날 때마다 탄식하는 일입니다.

김기협 : 전에 '적대적 공생관계'란 말씀을 드린 일이 있지요. 대립의 양쪽 극단파가 대립의 격화를 통해 서로의 극단적 태도를 정당화시켜 주면서 온건한 입장이 설 자리를 없애는 겁니다.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과 공산당의 신전술 사이의 관계를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적대적 공생관계의 특징은 적군과의 싸움보다 우군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더 치열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좌익에서 남로당계와 사로당계 사이의 싸움은 총력전 수준이었죠. 그리고 우익에서도 반탁 세력과 중간-중도파 사이의 갈등이 매우 심화되었습니다. 민심을 가장 폭넓게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중간-중도파가 좌익에서나 우익에서나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몰리게 되었죠.

안재홍 : 그렇습니다. 한데, 회색분자, 기회주의자 소리 들을 때가 그리울 지경이에요. 요즘은 좀 온건한 태도만 보이면 배신자로 몰려 버립니다.

좌익은 헤게모니 싸움 맞아요. 이북의 북로당 세력이 자리를 잡으니 그쪽의 지지와 지원을 받기 위한 경쟁이 좌익에서 치열합니다. 기본적으로 몽양 노선과 박헌영 노선 사이의 경쟁이죠. 내 생각에는 이북 사람들이 몽양 노선을 지지할 것 같은데, 박헌영의 남로당을 거듭 지지하는 게 뜻밖입니다.

이북에서는 공산당이 주도권을 쥐고도 김두봉 등 민족주의자를 우대하며 민족 통일 전선을 지향함으로써 정치 발전을 이루고 있는데, 이남에서 그 방향에 호응하는 것이 몽양 노선이죠. 좌익에서 몽양이 제 역할을 하면 좌우 합작도 남북 합작도 순조로울 것 같은데 왜 좌익을 스스로 분열시키고 고립시키는 박헌영 노선을 이북 사람들이 지지하는지 이해 못하겠습니다.

한편, 우익의 갈등은 단순한 헤게모니 싸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익의 가장 큰 원칙은 민족주의인데, 분단 건국 추진은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익을 위해 민족을 등지는 자들은 진정한 우익이라고 할 수 없죠. 그런 사람들은 정치가라 할 수도 없습니다. 장사꾼일 뿐이죠. 한 때 나는 우익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뜻에서 '순정(純正) 우익'이란 말을 썼습니다.

이제 와서는 그런 말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불순한 우익은 우익도 아니니까요.

김기협 : 이남 정치권의 큰 흐름들을 외세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갈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박사와 한민당(한국민주당)은 미국에 의지하며 소련을 배척해서 식민지 시대 특권층이 유지되는 분단 건국을 추진하고 나섰지요. 그리고 좌익에는 소련에 의지하며 미국을 배척하는 극좌파가 있고요. 좌익이든 우익이든 미국과 소련의 협력 관계 속에서 통일 건국을 바라보는 입장을 중간-중도파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김구 선생 입장은 어떤 것일까요? 분단 건국 추진 세력과 반탁 운동을 함께 펼치고 있지만 온갖 곡절 속에 20여 년간 임정을 지켜온 그분이 분단 건국을 바라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요. 미국, 소련, 양쪽을 다 배척하는 그분 입장에 현실성이 있는가요?

안재홍 : 현실성이 있고 없고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중간-중도파가 힘 있게 나서려면 김규식 박사나 나처럼 현실을 살피는 사람들과 백범 선생처럼 현실을 오시(傲視)하는 분들이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백범 선생의 큰 문제는 좌익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 있어요. 좌익에도 애국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민정장관 취임을 놓고 도로(徒勞)에 그칠 것을 걱정해 주셨는데, 아마 좌우 합작에 나설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금년 들어 좌우 합작을 치하하는 말씀을 개인적으로도 공개적으로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특히 김규식 박사와 몽양의 성심을 칭찬하는 말씀이 감동적이었지요. 좌익에 대한 편견이 많이 줄어드시는 것 같아서 앞으로 그분의 움직임에 더 기대를 걸게 됩니다.

(1946년 11월 18일자 김구 담화문 중 : "나는 작일에 김규식 박사를 병원으로 심방하였는데 그 초수한 얼굴을 대할 때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는 무엇을 위하여 이와 같이 생명을 단촉(短促)하고 있나' 하고 자연히 미안한 생각이 떠돌았다. 그의 쇠약한 몸에서는 양심만이 뛰고 있고 그의 병상머리에는 성경 한 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누구든지 이 광경을 보는 자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운형 씨에 대하여서 나도 불만한 바가 없지 않았으며 또 근일 항간에서도 다소 비난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금차 좌우 합작에 있어서의 그의 몇 가지 용단을 알고 도리어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하여간 김·여 양씨에 대하여 기대가 큰 만큼 우리는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로 하여금 유종의 미가 있게 하기에 노력할 것뿐이다.")

김기협 : 한 가지 전부터 궁금하던 일이 있습니다. 여운형 선생이 선생님보다 다섯 살 연상이신데, 그 정도 연상자에 대해 선생님은 대개 예절을 깍듯이 갖추시죠. 그런데 여 선생 얘기를 하실 때는 몽양, 몽양 하면서 동무 얘기하듯 하십니다. 어찌 보면 허물없는 사이라서 그런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그분을 좀 가볍게 보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 관계를 좀 설명해 주시죠.

안재홍 : 내가 생각해도 그분과의 관계에는 특별한 점이 있어요. 나랑 품성이 사뭇 다른 분이고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많아요. 그런데도 싫어할 수가 없는 분이죠.

초년에도 마주친 적이 더러 있었지만 계속 접하게 된 것은 그분이 1929년 상해에서 잡혀왔다가 출옥한 1932년 이래의 일입니다. 그 무렵 내가 조선일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형편이라 그분에게 물려받아 달라고 몇 차례나 찾아가 간곡하게 부탁했고 그분도 응낙의 뜻을 밝혔죠. 그런데 내게는 아무 말씀 없이 하룻밤에 번복하고 중앙일보로 갔습니다. 서운하기도 하고, 좀 무책임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중앙일보 있을 때 장안의 좌익 기자, 필자들이 다 그리 모였죠. 그들이 아무나 붙잡고 무리한 비난 공격의 글을 많이 썼는데 나도 더러 당했죠. 한 번 몽양 만났을 때 그런 풍조가 너무 과당한 게 아닌가 슬쩍 항의를 했습니다. 몽양은 "허허, 젊은 사람들이 가끔 그러는 것을 내가 일일이 간섭할 수 있나." 하고 어물쩍 넘어갔죠. 나도 웃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대범함이 지나치면 무책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도 나를 옹졸한 골샌님으로 보겠죠. 그러나 함께 할 일이 있으면 믿고 찾습니다. 나도 그분 허술한 면을 좀 불안하게 생각하면서도 큰 틀에서의 믿음은 확실하죠. 건준을 함께 한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고, 그 일에서 실망을 품고 물러났지만, 그분과 함께 일하는 것을 꺼리는 마음은 없습니다.

김기협 : 해방 직후(1945년 10월 30일)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두 나라가 조선 점령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들의 목적이 이기적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의 목적을 나쁜 쪽으로 의심만 하는 것도 좋은 쪽으로 믿기만 하는 것도 그들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가기에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서울의 정치 노선이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연합국의 의도를 나쁜 쪽으로 지레 예단하지 말고 가급적 선의로 대하는 중에 신뢰를 쌓아나갈 것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맡으신 민정장관 자리는 미군정에 협조하는 최전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독립을 위한 미국의 선의를 완전히 믿게 된 것인가요?

안재홍 : 미군정이 많은 조선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실을 미군정 당국자들도 인정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힘든 상황을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더 힘들게 만든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의도보다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을 괴롭히려는 악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 사정을 잘 모르는 데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고 보는 거죠.

"첫 단추"란 말이 있거니와, 미군정이 잘못 끼운 첫 단추가 일본 통치 기구를 그대로 둔 겁니다. 처음 와서 총독 이하 일본 관리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려고 하는 바람에 "저놈들이 일본 놈들 대신 우리 상전 노릇을 하러 왔나?" 하고 모두들 분개했지요. 그러다가 며칠 후에 '고문'으로 물러 앉히고 차츰 내보낼 방침을 세웠지요.

요즘 와서 들으니 일본 관리들 그대로 앉혀놓으려는 방침을 본국에서 듣고 펄쩍 뛰며 일본인들 빨리 내보내라고 지시가 왔다더군요. 주조선 미군의 상급부대가 일본 있는 맥아더 사령부 아닙니까?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본인들에게 행정을 맡기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던 거죠. 그렇게까지 여기 사정을 몰랐어요.

(미군 진주 직후 일본 관리들의 거취와 관련된 자료 몇 개가 <해방 3년과 미국 1 : 미국무성 비밀 외교 문서>(김국태 옮김, 돌베개 펴냄)에 들어 있다.

"3성조정위원회 의장 대리의 비망록"(1945. 9. 10, SWNCC 176/4, 49쪽) 중 : "주한 미군사령관이 잠정적으로 한국 내의 일본인 총독부 및 기타 일본인 관리들을 유임시키기로 결정하였다는 보고는 이미 한국 내에서 우리의 입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상기 언급한 훈령에 개괄된 일반적 총의 및 정책들과도 배치되고 있다."

"국무장관 대리가 트루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비망록"(1945. 9. 14, 53쪽) 중 : "1945년 9월 9일 미군이 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나자마자 미군사령관은 일본인 관료들이 일시적으로 그들의 현 직위에 유임될 것이라고 성명하였고, 뒤이어서는 그들이 될수록 조속히 사임될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그 동안에 일본인 총독 및 여타 고위 관리의 즉각 해임을 요망하는 합동참모부의 훈령이 급전으로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재 한국 정치고문(베닝호프)이 국무장관에게"(1945. 9. 15, 55쪽) 중 : "일본인 관료의 해임은 여론의 견지에서는 바람직하겠으나 당분간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추방되겠지만 실제로는 계속 업무를 수행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기관에서건 아니면 공공단체나 언론기관에건 하급의 말단 직위 외에는 유능한 한국인들은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일본인의 비호 하에 고위직에 기용되었던 한국인들은 친일파로 간주되어 대부분이 일본인들 못지않게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미군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 후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이곳 사정을 이해하는 데 따라 그 정책이 향상되어 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도 그 동안 밀착관계에 있던 한민당 사람들을 등지면서까지 미소공위 성공을 위해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나 같은 사람을 민정장관에 앉히는 것도 그런 성의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 자신 성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어요.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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