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 효과는 '문근영'이라는 이름이 발휘했던 어떤 이미지, 국민 여동생이라는 호명 가운데서 발생한다. '사랑스러운 아이 같으면서도 불편할 정도로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모순된 존재' 그래서 '여동생이라는 호감이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과 지켜줘야 한다는 유교적 남성성'을 충돌시키는 존재, 무엇보다 수많은 광고를 통해 대중을 유혹하는 살아 있는 서브리미널(subliminal) 같은 존재 말이다. 그러므로 '문근영'은 시대에 따라 그 기의가 달라지는 일종의 상징이다.
<문근영은 위험해>에 묘사된 한국 사회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음모론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임성순은 이 음모론을 이렇게 말한다. 정부에서 소가 유망하다면 돼지를 사야 하고, 부동산으로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면 땅 투기를 시작해야 하고, 제2 금융권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때면 사채업을 시작해야 하는 방식 말이다.
▲ <문근영은 위험해>(임성순 지음,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하지만 음모론적 사유가 단순히 우화적 지혜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로스웰 사건부터 천안함 사건에 이르기까지 임성순은 음모론 전반을 다룬다. 음모는 어떤 사람들에겐 삶의 지표가 되고 소수의 집단에게는 종교적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 삶의 왜곡된 지점을 보여주는 진앙이 된다. 슬라보예 지젝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삶의 분열 지점을 가리키는 혼돈의 유인자처럼 말이다. 임성순은 우리 사회 자체가 거대한 음모라고 말하고 있다. 배추 값부터 국제 협약이나 선거에 이르기까지,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음모에서 자유로운 것은 없다고 말이다.
<문근영은 위험해>에 그려진 두 번째 한국의 현재는 미소녀에 미친 마초의 세계이다. 여기서 미소녀나 마초 역시 어떤 상징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TV에 등장하는 소녀들의 나이가 점차 어려지는 만큼 치마 길이도 점점 짧아진다. 속바지 논쟁이 이어지고 속옷이 노출되느냐 아니냐가 연예계 주요 기사로 등재된다. 마초 대중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소녀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업계를 비난하지만 사진과 담론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또 한 번 관음증을 충족시킨다. 말하자면 대중은 '여동생을 보호하면서도 그녀를 갈망하는' 변태 마초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문근영'에 빠져 문근영의 행동을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납치범들은 일반적 대중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들에겐 문근영이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상징처럼, 열심히 궁구하고 독해해야만 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그들은 문근영의 사소한 행동을 과잉 해석해 지구 멸망의 메시지로 독해해낸다. 의미는 발신자의 의도가 아니라 수신자의 의지에서 발생한다는 듯이 말이다.
문제적인 점은 혜영, 승희, 성순이라는 이 인물들이 모두 '왕따'를 경험한 일종의 사회적 소수자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이 소수자는 히키코모리, 오타쿠, 십덕후 등의 이름들로 변주된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마초 중심적 세계의 코드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식이다. 그들은 여성스러운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이 폭력은 여성스러운 걸음걸이나 목소리를 가진 아이 혹은 그저 보기에 불편한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성적'이라는 수식어 역시 마초 세계의 자의적 알리바이임에 분명하다. 그들은 폭력의 근거로 여성성을 상징화한다. 여성성은 어떤 본질적 기의가 아니라 마초적 남성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의 이름인 셈이다.
임성순은 변태들의 음모로 이루어진 우리 사회를 소수 오타쿠 문화를 통해 비틀고 부순다. 실제 인터넷 사이트에서 발생하고 사라지는 용어들과 그 용례를 그의 소설 공간에 끊임없이 소환하는 것이다. 소설의 문장에 배치됨으로써 모니터 속 용어들은 일종의 패러디 효과로 증폭된다. 매체가 달라짐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인터넷에서 그 용어들은 '언어'지만 소설 속에서는 문체가 된다.
인터넷 용어와 문화는 단순한 주석 수준을 넘어서서 '문근영'을 상징으로 만들어내는 근원적 추동력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문자적 세계의 선조성과 결합하고 대립하거나 어긋나면서 소설 자체를 하위 오타쿠 문화의 결정적 산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독자들에게는 본문이 아닌 주석이 일차적 독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주석은 이원적 독해나 해석을 가능케 한다. 누군가에게 이 노란 주석은 정보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임성순이라는 작가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하위 문화적 경향은 작가 임성순이 소설 내부의 또 다른 작가, 서술적 주체로서의 임성순을 호명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임성순은 자신의 실제 경험 가령,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고 상금을 받는 과정의 기록적 기술을 문근영 납치라는 허구와 교차 서술함으로써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 낸다. 이는 작가 임성순의 자기 모멸적 언어와 동반된다. 그러므로 <문근영은 위험해>는 작가 스스로를 인용하는 자기 반영적 문학이자 그 자체로 냉소적 패러디가 된다. 작가는 스스로를 패러디하고 자신의 문학을 자조한다.
"회사 3부작"이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다시피, 임성순은 우리 사회를 거대한 회사로 인식하고 있다. 이 사회는 이익 창출의 목적을 위해 일사 분란하게 움직인다.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바로 '음모'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말을 변주하자면, 경찰이 존재하기 위해 범죄가 요구되듯이 작가는 음모의 시나리오를 생산하고, 기업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혼란을 고안하며, 정부는 권력의 재생산을 노려 피해를 발명한다. 임성순에게 있어 음모는 우리 사회의 실체이자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근본적 동력이다. 음모가 없다면 우리 삶의 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임성순이 음모에 기반을 둔 우리 사회를 정색하고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 문화적 태도로 비튼다는 사실이다. 은둔형 오타쿠부터 엔터테인먼트, 인터넷 폐인들의 은밀한 용어까지, 임성순은 비주류 소규모 집단의 문화를 통해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을 '문근영'을 그려낸다. 매우 현재적이며 그만큼 읽기에 편하고 재미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문근영은 위험해>는 난삽함을 스타일로 채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멀티 태스킹처럼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주석의 형태가 그렇다. 주석 역시 일관성을 거부한다. 때로 그것은 작가적 사유의 기록이기도 하고 때로는 단순한 정보이며 때로는 의미 없는 간섭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은 이 난삽함이 이야기의 속도감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스타일은 이야기의 주된 흐름과 관련 없는 자유 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명쾌하게 말하자면 사건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제공하는 근간 화소가 미약하다. 소소한 읽을거리의 재미에 막상 이 인물들을 통해 제시되어야 할 구체적 큰 조형물이 묻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근영은 위험해>는 작가가 철저히 고안해 발명해낸 키치적 3류 문화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럴듯함과 대의명분으로 위장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논리를 임성순은 변태 삼촌들의 오타쿠 문화로 돌파해 나간다. 그의 소설 속에는 차라리 마초의 세계보다는 오타쿠의 칩거가 더 윤리적으로 그려진다. 적어도 그 세계엔 순정한 믿음이 있으니 말이다.
'문근영'의 이미지가 소진되자 또 다른 '문근영'을 찾아 헤매는 변태 마초들의 세계, 임성순의 소설은 위선과 허위로 채워진 세계에 침투한 차갑고 날카로운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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