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23가지 쟁점과 성서적 해법"이다. 장하준을 벤치마킹한 것이지만, '성서적 해법'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 신학자가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받아들자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스물세 가지로 분류해서 거기에 해당하는 성서 속 예수의 가르침을 해설해 나가는 방식이 돋보였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해에 어려움이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대중화'를 항상 염두에 두는 저자 특유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것 같았다. 스물세 가지 쟁점들은 정치, 남북 관계, 양극화, 복지, 연고주의, 부동산, 폭력, 자살, 반지성주의, 과학, 다문화, 여성 등 다양하기 이를 데가 없다. 신학자라면 산상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적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제격이라고 믿는 분들에게 이 책은 일종의 도전을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 <예수, 한국 사회에 답하다>(차정식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새물결플러스 |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나는 내 신학이 특정한 체계 속에 포박된 고체가 아니라 생수처럼 갈 길을 내며 흐르는 길 위의 신학이길 꿈꾸어왔다"고 고백한다(397쪽). 여정에 올라 흔들리는 기차에서 글을 쓰는 신학자를 상상해볼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유목민적인 신학자는 "성전 건축에 몰두하는 교회 지도자의 심리"를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단순한 욕망의 발산이라고 질타한다(371쪽). 심지어 저자는 이렇게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리는 대형 교회의 물질주의는 "맹목적인 도착 심리"라고 결론 내린다. 그의 육성은 거침없다.
목회자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교인수와 1년 예산으로 영력과 리더십이 검증되는 세태에서는 높은 첨탑을 자랑하는 웅장하고 근사한 예배당에 대한 자랑이 빠질 수 없다. 물론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성도를 독려하는 명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름다운 공간을 최적의 장소에 최고의 정성으로 만들어 바친다는 '봉헌'의 신앙이다. 이를 위해 구약성서의 성전 건축과 이후 성전 재건 사업의 이야기들이 성전 건축 정당화의 증빙 구절로 인용되곤 한다. (371쪽)
속되게 말하면 성서를 팔아서 장사를 하는 세태에 대한 일갈이다. 성서에서 근거를 찾아서 성전 건축을 정당화하는 현실에 대해 저자는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이 책이 성서를 통해 현실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현실의 교회들이 성서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도는 이 정당화의 논리 자체를 내부에서 해체하는 것이다. 평소에 저자가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사실과 이런 방법론의 구사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의 비판을 좀 더 들어보자.
구약성서의 성전은 신정 통치 시대의 예배 공간으로 동물을 제물로 삼아 죽이고 피 흘리는 제의적 체계의 산물이었다. 예수는 당시 예수살렘의 성전을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성전의 포용적 의미('만민')와 간단 소박한 의도('기도')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성전'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후하게 살펴도 구약시대 유대교의 유산일 뿐, 신약시대 이후 기독교의 체제를 대표하는 개념이 되긴 어렵다. (371쪽)
한 마디로 대형 교회가 성서에서 근거를 찾아서 화려한 건물을 짓는 행위는 아전인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개신교 교회가 교묘하게 유대교와 기독교를 뒤섞어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분명 문제 있는 것이다.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명히 구분해서 후자의 기본정신으로 휴머니즘을 설정한다. 징벌적인 인격신을 내세운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의 정신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까닭에 저자의 관점에서 성서는 기독교적 윤리를 기본 정신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근대 사회의 문제에 해법을 제공할 수 있는 원-텍스트이다.
독일의 신학자 야코프 타우베스가 말하는 것처럼, 근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르쳐야할 텍스트는 바로 성서일지도 모른다. 존 로크가 종교를 사적인 영역으로 퇴거시킴으로써, 신정 분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허투루 흘려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 한국 사회에 답하다>에 대한 진지한 독서가 필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신학적인 관점에서 사회 문제를 다루고자하는 시도들은 많이 있었지만, 이 책처럼 성서 자체의 관점에서 쟁점에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양극화의 해소에 대한 이 책의 해법도 특이하다. 채무의 해소와 증여라는 측면에서 예수의 윤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돌아보게 만드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수는 '빚'의 문제를 삶의 실존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해방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진술이나, "예수에게 순전한 증여는 제도의 변혁과 상관없이 단호한 자기 비움의 행동과 함께 즉각적으로 실천"되었다는 발언은 양극화의 문제가 윤리적 결핍과 일정하게 관계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111쪽). 말하자면, 구조적 문제에 치우쳐 개인의 결단을 등한시할 수 있는 편향에 대한 경계가 읽히는 것이다.
물론 항상 성공적 사례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이런 윤리가 실패하는 경우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주 법을 잘 지키는 모범적 청년이 영생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가 제시한 해법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 해법을 저자는 종말론적인 요청이라고 말한다. 순수한 증여는 이렇게 종말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것, 다시 말해서 순수한 증여에 대한 요청은 엄청난 결단을 요구하는 행위이고, 이런 절대적 범주를 통해 윤리를 재정립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본래적 정치'에 대한 요청으로 정치의 문제를 끊임없이 개방하도록 주문하는 급진 철학의 문제의식을 닮아 있다. 청년은 이런 예수의 요구를 수용했던가? 그렇지 않다. 아주 준법적인 이 청년은 "과잉 소유욕과 탐욕의 본성을 제어하지 못한 채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저자의 설명이다(112쪽).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청년이 당대 사회에서 모범 시민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말씀은 이 청년의 삶을 바꾸지 못했다. 윤리가 무기력한 지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윤리가 작동하지 않는 이 문제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을 텐데, 이것을 저자는 '극단적 결단'이라고 정의한다. 성서는 이런 정치적인 결단에 대한 언급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성서에 등장한 예수의 말씀만을 거론하더라도, 급진적인 전망들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낯선 것이 아니다. "모든 증여는 모종의 의도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는 저자의 요청은 당위적 명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없는 주체'라는 윤리를 넘어선 정치적 기획에 대한 전망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의미는 배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성의 윤리가 유입된 중요한 채널이었던 기독교를 통해 근대 자본주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법을 제시하려는 한 신학자의 노력은 다른 인문학자의 관점과 차별화되는 흥미로운 논점들을 제시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시도가 모두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스물세 가지로 쟁점을 분류한 것도 다소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 오히려 복지 문제를 성서적 관점에서 면밀하게 파헤친 저자의 전작인 <하나님 나라의 향연>(새물결플러스 펴냄)이라는 책이 돌파력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미진한 구석이 있다면, 전작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보완책이라는 판단이다.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신학자가 쓴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여러 가지 단점을 상쇄하고 남을 미덕을 갖추고 있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도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로를 탐색한다면, 이보다도 더 훌륭한 저자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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