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공계 대학생을 위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학교에서 고전 읽기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내가 뽑은 강연 제목이 바로 '고전 읽지 말자'였다.
물론 고전을 진짜 읽지 말자고 선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전을 읽겠다고 마냥 덤벼들기 보다는 사전 준비를 충분히 한 후 제대로 읽어보자는 취지의 강연이었다. 예를 들자면, 현재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책들부터 읽고 거꾸로 그 책들의 원류에 해당하는 고전을 찾아서 읽는 방식의 독서를 제안했었다. 고전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새기면서 독서를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실 과학 고전에 대한 것이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과학적 성과는 책이 아닌 학술 논문의 형태로 발표되었다. 그러니 과학 고전의 목록을 뽑으면 현대 과학의 성취를 대변할 만한 책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과학 고전 목록에 <알마게스트>나 뉴턴이나 갈릴레이의 책 정도밖에 올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책들도 우리말로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거나 출판되었더라도 절판된 경우가 많아서 구해서 읽어보기가 쉽지 않다.
학술 논문에 실렸던 과학적 성취의 원전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말로 접할 길이 없다. 논문 자체가 번역되어 출판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2005년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에서 아인슈타인의 논문들을 번역해서 묶은 책자를 발간한 적이 있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원문으로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학술지에 실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과학의 천재들>(앨런 라이트먼 지음, 박미용 옮김, 이성렬·임경순·김창규 논문 옮김, 다산초당 펴냄)은 이런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20세기의 과학적 발견을 25편의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지은이는 해설에 덧붙여서 원전 논문을 붙여놓았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논문도 우리말로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이 책의 핵심은 결국 앨런 라이트먼의 해설이 아니라 선택된 스물다섯 편의 논문에 있다고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번역이 되어서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는 철학과 학생들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정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미국 헌법을 읽으며,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햄릿>과 <백경>을 읽는데 과학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멘델레예프나 퀴리 부인, 또는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원문으로 읽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곤 한다."
▲ <과학의 천재들>(앨런 라이트먼 지음, 박미용 옮김, 이성렬·임경순·김창규 논문 옮김, 다산초당 펴냄). ⓒ다산초당 |
다만 그런 논문들을 읽을 때 느끼는 감흥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해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도 궁금하고 안달이 나서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찾아서 읽도록 유도할 수만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그래도 또 다른 문제는 남는다. 아인슈타인 논문의 대부분은 독일어로 쓰여 졌다.)
<과학의 천재들>에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우주의 팽창까지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을 알리는 논문들이 라이트먼의 해제와 함께 실려 있다. 호르몬과 항생제,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 그리고 인공 생명체의 탄생을 포함한 생물학과 화학의 성과에 대한 논문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스물다섯 편의 논문을 살펴보았다. 내가 직접 읽어본 것은 아인슈타인의 논문 두 편, 허블의 우주 팽창 논문, 펜지어스와 윌슨의 우주배경복사 발견에 대한 논문,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대한 논문, 이렇게 다섯 편뿐이었다. 먼저 지은이의 해설을 읽은 후 논문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독서를 했다. 읽어보았던 논문들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내 관점에서 보면 과학의 위대한 발견을 담은 최초의 보고서는 예술 작품과도 같다. 이 논문들은 시와 리듬과 이미지, 아름다움 그리고 진리가 담겨 있다. 고심해서 선택한 단어와 비유가 있고 간단하지만 심오한 주장이 있으며 불확실성과 고찰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요약본이나 해설서가 제공하지 못하는 위대한 과학자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논문들에서 우리는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재능이 얼마나 엄청나게 발휘되는지를 보게 된다. 전문적이거나 수학적인 내용이 과학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흐름 정도는 좇을 수 있다."
라이트먼의 말대로 그의 해설과 함께 논문을 읽으면서 과학적 성취를 이루었던 과학자들의 생각의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익숙한 몇몇 논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논문들은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생물학과 화학 계통 논문들은 노력은 했지만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 읽는 동안 집중력도 많이 떨어졌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지은이의 해설에 많이 의존해서 완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과학자들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열정, 퍼즐을 풀어내는 순수한 즐거움, 그리고 독립적인 사고다."
라이트먼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마 이해하지도 못하는 논문을 끝까지 읽었던 것도 과학자들의 그런 매력이 논문 속에 숨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관심 있게 본 논문은 (이전에 읽었던 논문들은 제외하고) "이하의 내용은 소마젤란 성운에 있는 25개 변광성의 변광 주기를 다루고 있으며 작성자는 미스 리비트임"으로 시작하는 리비트의 논문이었다. 세페이드 변광성의 주기와 밝기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는 논문인데, 하버드 천문대 교수인 피커링이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버드 천문대 조수였던 여성 천문학자 리비트는 자신의 이름으로 논문조차 발표할 수 없었다. 그녀의 발견을 바탕으로 천문학자들은 비로소 은하와 은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논문이었는데 반가웠다.
가장 인상 깊게 본 사진은 프랭클린과 고슬링의 논문에 삽입된 DNA X-선 회절 사진이었다. 전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논문에서 보니 새로웠다. 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던 프랭클린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논문 글자들 사이에 자리 잡은 사진을 보면서 수줍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유전자의 미소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 대한 논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름다웠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전개가 우아했다.
<과학의 천재들>은 어렵지만 즐거운 책이다. 라이트먼의 해설은 친절하면서도 깊이가 깊고 폭이 넓어서 유용했다. 같이 실린 논문들은 과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읽어내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다. 하지만 과학적 성취를 알리는 논문을 직접 읽을 수 있는 (혹은 살펴만 보더라도)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언젠가는 다시 가보고 싶은 고향처럼 스물다섯 편의 논문이 <과학의 천재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최근의 과학책들은 대부분 일반인들을 겨냥한 것들이다. 현대 과학의 성취를 잘 설명해주는 완성도 높은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그 중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처럼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도 있다. 우리말로의 번역도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의 (대중을 위한) 과학책들 중 고전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책들도 많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거의 번역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빅뱅우주론에 대한 최신의 대중 과학책을 읽다가 천문학자 허블에 대해서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자.
다른 대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앞서 말한 그 강연에서 고전 읽기의 방식으로 현재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책들부터 읽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차차 그 책들의 원류에 해당하는 고전을 읽는 방식의 독서를 제안했었다. 그런데 최소한 과학 분야에서는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다.
지적 여행의 도로는 곳곳이 막혀있다. 그런데 어떻게 고전을 읽으라는 말인가. 그래서 그 강연에서 과학 고전을 읽지 말자고 몽니를 부려본 것이다. 읽고 싶어도 책이나 논문을 구할 수가 없다.
<과학의 천재들>은 그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돌멩이일 것이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서 더 많은 책들이 번역이 되고 더 많은 과학 논문들이 묶여서 출판되었으면 한다. 그러고서야 젊은이들한테 (과학) 고전을 읽으라고 권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내 강연은 '제발 고전 읽을 수 있도록 번역 좀!'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린 지적 여행의 고속도로가 완성되는 그런 날이 올 때까지 내 강연의 제목은 여전히 '고전 읽지 말자'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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