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의 친구 질은 이렇게 말했다.
"철학책은 추리 소설이 되어야 해! 개념적 인물들의 일관성은 개념적 인물들 자체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와야 하지."
"개념적 인물들이라? 그래. 개념은 캐릭터를 가진다. 그 개념적 인물들이 연기하는 여러 장면들을 이렇게 저렇게 배치할 때라야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야기가 구성된다. 그렇다. 철학자는 개념을 편집하는 영화감독이다."
감독의 변
여기 영화감독 미셸 푸코가 있다. 그는 하나의 기획에 착수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코믹 서스펜스 추리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가 있어야겠다.
감독의 변을 들어보자.
"제가 한 것은 거의 없어요. 단지 캐릭터들 즉 법관, 의사, 증인, 배심원, 기자 그리고 리비에르 본인의 컷들을 범행에서부터 심문, 여론, 집행에 이르기까지 연대기 순으로 배치시키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그냥 1835년 당시 소송 기록들을 그대로 재연해도 이야기가 됐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할 몫입니다. 누군가는 권력의 희화화를, 누군가는 슬픔과 연민의 드라마를, 누군가는 잔혹극을, 누군가는 풀리지 않는 추리 소설을 보겠지요. 영화 말미에 몇몇 사람의 영화평을 같이 올려두었으니 참고만 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그 자체 이야깃거리가 되는 데에는 리비에르라는 캐릭터의 공이 큽니다. 모든 기계 장치를 리비에르가 조준하고 있는 형국이니까요. 모든 등장인물들의 말들을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보이게 만든 데에는 리비에르의 수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것은 경탄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우린 왜 그의 수기에 이끌렸을까요. 무지렁이 농부의 아들인 리비에르, 그의 놀랄 만치 비상한 기억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버지를 향한 눈물 나는 동정심, 아니면 무소불위의 법 앞에 홀로 맞서려는 정의감, 그것도 아니라면 스스로를 신과 같은 존재로 단련시키려는 그 모든 노력, 자신의 모든 삶의 과정과 행위의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명석함, 이 도저한 특이함, 이런 것들이 그 끔찍한 존속 살해마저 정당화시킬 마력을 풍기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피에르 리비에르는 우리 추리 영화 주연급 캐릭터로 손색이 없지요. 또 영화 반전의 묘미도 그가 쥐고 있어요. 미친 척 연기하면서 상대들의 장단에 맞춰 주거든요. 그러고 나선 마지막에 그의 자살로 원환이 본래대로…아…이것은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죠.
그러나 우리가 리비에르 사건에 이끌린 더 큰 이유가 있답니다. 그의 수기가, 소송 기록에 배치되어 있는 자리 자체가 영화화하기에 너무 매력이 있단 겁니다. 소송 기록 자체가 이미 제가 편집할 필요 없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단 거죠. 그래서 전 그냥 이걸 보여드리기만 하면 됐던 겁니다."
평론가의 변
감독의 인터뷰만으로는 부족한 듯합니다. 다른 이의 얘기도 좀 들어봐야겠습니다. 영화평을 한 평론가들의 말을 들어보시죠.
"겁부터 나네요. 영화에 나온 판사나 의사처럼 말로 먹고 사는 우리들도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 소송 기록이 타는 듯이 뜨거운 지옥 속에 처박혀 불타는 것을 피하고자 우리는 끊임없이 말에 말을 부단히 추가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사자(死者)의 입을 대신해 역사학자로서 한마디 안 할 수 없겠죠? 리비에르는 프랑스 혁명기 당시 폭군을 참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지고만 마는 백성의 한 전형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적어도 들어주기라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예요'라는 그 말, 말이에요. 영웅 심리에 수기를 쓰고 범행을 저지르고 한 건 다 그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권력의 성격에 관심이 가더군요. 배심원단은 판단해야 했어요. 리비에르의 행동을 광기로 보아 정상 참작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또 존속 살해 죄는 당시 왕에 대한 시역 죄와 동등했는데, 만약 정상 참작으로 감형된다면 존속 살해 죄가, 시역 죄가 감형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기에 이는 왕권의 실추와 직접 연관이 있단 겁니다. 이 리비에르 사건이 왕과 사법권 간의 정치적 대결로 비화되는 거지요. 그런 점에 포커스를 맞춘 점이 재미있었어요."
관객의 변
▲ <나, 피에르 리비에르>(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 엘피 펴냄). ⓒ엘피 |
영화로 만들어졌건 어찌 됐건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책 이야기다. 철학자의 역할 말이다. 철학자는 책의 내용을 편집하는 감독이 되어야 함을 느낀다. 실제 사료를 고증해내어 현실감에 무게를 더해주되,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의 고리들이 엮어내는 빛나는 사건의 시나리오들을 다각도로 보여 주는 능력, 그래, 그런 능력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굳이 철학자 그 자신 이런 저런 해석을 하지 않아도 책의 구성만으로 빛나는 책이 여기 있다.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겠지만, 철학책에서 한편의 추리 영화를 본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오랜만이지 않은가.
리비에르 수기는 법관, 의사, 증인, 배심원, 신문 기자 각각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지침이 된다. 하지만 그 지침 또한 전체 톱니바퀴에 끼워 넣어져 스스로 유희의 대상이 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에 농락당하는 것은 그들 전체이고, 독자 모두가 된다. 생각이 글쓰기와 행동, 두 갈래로 가지를 쳐 다른 이의 글쓰기와 행동과 엮어진다. 그렇게 엮어진 권력의 실타래에서 어느 누구 하나 자유롭지 못한 것은 웃지 못한 비극이 아닐까.
진짜 범인을 찾아라. 리비에르인가? 법관, 의사, 배심원, 증인, 기자인가? 이러한 실타래를 보여주기만 하고 치고 빠지는 철학자 감독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텍스트 바깥을 한 번도 넘나들지 못할 바로 우리 자신인가?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공간입니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이 연재의 일부는 <철학자의 서재>(알렙 펴냄)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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