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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서희, 그 '원형'이 여기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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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토지>의 서희, 그 '원형'이 여기 있구나!

[프레시안 books] 박경리의 <녹지대>

기억하는가?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시장 골목에서 밤새도록 외상술에 취했던 그때. 스무 살 무렵 우리는 결연하게 세상과 어른들을 비판하였고 그들의 법칙에 영합한 듯한 친구에게 시비를 걸었다.

술자리는 곧잘 싸움으로 이어졌으며 누군가의 울음은 다른 울음을 낳았다. 큰 목소리가 마구 윙윙거렸던 술자리를 뒤로 하고 집으로 오는 길, 실상 우리는 막막했고 외롭고 슬펐다. 큰 소리의 뒷면에, 차마 크게 떠들지 못할 부끄러운 고민들이 너절한 좌판을 벌이고 있었으니, 실은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에 가장 슬펐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상은 원대했지만 주변은 너무나 너절했고 참으로 못 견디게도 그 중 우리 자신이 가장 초라했다. 우리는 내심 대단하기를 원했으나 실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몰랐다. 몰랐기에 꿈꾸었다. 누군가 다가와서 너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해주기를. 보다 솔직하게 이런 말을 기다렸는지도. 너는 멋져!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규정에 기대어야 했기에, '남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정직한 내심에서는 중요한 과제였다.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소망은 은밀했으나 힘이 세었고,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거짓말도 연기도 천연덕스럽게 해내었다. 객기와 포즈는 스무 살의 이름표와도 같았다.

우습고도 슬픈 청춘의 열병. 우리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박경리의 <녹지대>(현대문학 펴냄)는 1960년대 중반 청춘의 슬픈 소극을 그린다. 어설프지만 찬란한 젊음에게 바치는 송사라고나 할까. 이 소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젊은이들의 객기와 방황을 그리면서 그들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보여준다. 박경리는 발랄한 청춘 소설의 외피 아래, 성장과 사랑과 예술과 악과 운명에 관한 대가 특유의 사유를 전개한다.

▲ <녹지대>(전 2권, 박경리 지음, 현대문학 펴냄). ⓒ현대문학
소설은 전직 양공주의 자살로 시작된다. 그녀는 미모 탓에 "오욕 속에 몸서리치는 허무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생애"(1권 35쪽)를 살았다. 주인공들은 장례를 거들고, 화장시킨 그녀의 뼛가루 앞에서 삶이 "책상서랍을 닫았다 열어보는 것"(1권 43쪽)에 불과하다고 느낀다. 소설 초반부를 휘감고 도는 분위기는 이런 허무, 혹은 비애이다. 젊은이들은 생의 허망함에 몸서리친다.

'녹지대'는 이런 젊은이들, 이른바 "한국의 비트족"들이 모이는 음악 살롱이다. 그들은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명동을 안마당 삼아 "죽고 싶다, 괴로워 못 살겠다, 하고 마구 지랄을 하고 돌아다"(2권 11쪽)닌다. 술을 마시면 기성 문단과 그에 아첨하는 동료들을 마구 비난하다가 싸움을 벌이고, 기성 문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화전도 연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내심은 거창한 사회 비판이라기보다 이런 토로일 것이다. "왜 우리는 허황하게 쏘다니고 외롭고 슬프기만 하니?"(1권 159쪽)

그들의 대표 격인 인애는 누구나 젊은 날에 한 번쯤 동경해 봤음직한 캐릭터이다. "나를 기른 것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바람이 기른 아이다"(1권 13쪽)라는 그녀의 선언은 유치하지만, 젊은 날의 한 바람을 떠올려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일상 바깥에서 무언가 깃발을 꽂고 싶었던 소망. 젊은이는 이런 소망을 체현한 듯한 인물을 숭배하거나 아니면 흉내 내거나, 자신이 그런 사람인 양 연기도 한다.

시인으로 자처하는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등록금을 들고 대부도로 도망간 전력을 지녔고, 대학도 중도 하차했다. 괜히 달리는 자동차 앞으로 뛰어가서 왕! 왕! 소리를 지르며 노래 부르고 싶어 하고, 대단한 기지로 생면부지의 사업가에게서 시화전 비용을 기부 받기도 한다. 젊은 날의 한 화두인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소망'의 현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내심은 역시나 외롭고 쓸쓸하다. "모든 정은 나를 향하여 등을 돌리고 모든 집은 나를 향하여 문을 닫아걸고. 그래, 난 거지야. 고아야. 나는 방황하는 거지야"(1권 235쪽)

또 젊은이들은 때때로 자신을 쓰레기통에 처박거나 심지어 파괴하고도 싶어 한다. 도처에 열등감으로 몰아넣는 것투성이다. 자존감은 참으로 너무 먼 곳에 있다. 은자는 젊은이 특유의 열등감과 자기 파괴 욕을 잘 보여준다. 가령 그녀는 광수를 여관으로 유혹한 후 이렇게 말한다. "날, 날 짓밟아주어. 소원이야. 기왕 죽을 바에야 소중한 것 다 잃어버리고……. 아냐 소중한 게 어딨어! 아무것도 아냐."(1권 110쪽)

은자는 자살한 양공주의 딸이라는 자의식으로 심한 열등감에 시달리며, 광수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할 것이라고 고집스레 비관하고, 어차피 자신은 버려질 것이라는 절망에 빠져 있다. 열등감과 비관과 절망은 그녀를 허망함으로 몰아넣는다. 연인과 키스를 나누어도 그녀는 "그림자를 본 것 같은 허전함", "못 견디게 괴로운 공허"(1권 116쪽)만을 느낄 뿐이다.

이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우선 그들은 공통적으로, 각종 미친 짓들이 겉멋에 불과하다는 자각에 이른다. 성장의 계기가 한둘이겠느냐만 여기서는 세 가지 계기에 주목해 본다.

우선 남의 시선을 폐기하고 주체적으로 서기. 젊은이의 자아 정체감은 미성숙하다. 더욱 미성숙하게도, 그들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내심 남들의 인정과 사랑에 매달린다.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령이 은밀한 신조가 된다. 하여 그들은 연기하고 거짓말하며 각종 객기에 빠져든다.

성장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기를 그만 두고 자기만의 척도로 자기를 바라볼 때 시작된다. 이는 거짓말과 연기를 중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은자는 거짓말과 "매력이라는 그 인위적인 걸 벗어던"(2권 12쪽)지겠다고 결심하며, "내 자신이 내 속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2권 13쪽)고 자각한다. 또한 자살한 엄마를 비판했던 것도 남의 눈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음을, 그것이 허영이었음을 깨닫는다.

다음으로, 작은 것을 긍정하기. 젊은이들은 대개 커다란 이상의 하늘 아래에 산다. 이상에 어긋나는 일상의 누추함을 그들은 가납하고 싶지 않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한 그는 어디에서도 만족을 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난감하게도, 자기가 설 곳조차 찾지 못한다. 그러나 성장하려면 누추함을 긍정해야 한다.

'작은 것을 긍정하자'는 슬로건은 이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은자는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철과 결혼하려고 결심한다. 안경잡이도 말한다. "허황하게 아무리 큰 것에 눌어붙어 부정해 봤자 별수 없지. 인생이란 작은 것부터 긍정해 나가야만 할 것 같애."(2권 241쪽) 그래서 그는 "구름 같은 것을 잡기 위해 고민하는 건 이제 사양"하고 "집을 짓고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며 인생을 살아야겠"(2권 241쪽)다고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자의식에서 벗어나 주변을 진심으로 돌아보기. 성장하려면 나만의 잣대로 자아 정체성과 자존감을 만들어나가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런 식으로 탄탄해진 자기 자신의 틀을 깰 줄도 알아야 한다. 젊은이는 자의식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일 때, 진짜로 성장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이는 자아의 확장이다. 인애는 배고픈 중학생을 보고 슬프고 외롭다는 넋두리가 소아병적인 것임을 자각한다. 또한 자연과 어우러진 한 농부를 보면서, 자의식이 있는 그대로 자연의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을 거쳐서 은자와 안경잡이는 현실 법칙에 순응해 간다. 현실적인 안녕을 보장해주는 이성과 결혼을 계획하고, 집을 사거나 짓기를 꿈꾼다. 그런데 인애는? 인애가 갈 곳은, 적어도 서울에서는 없다. 비트족 중 유일한 진짜였던 인애는 자기의 허위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은자와 안경잡이처럼 손쉽게 현실 법칙에 순응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객기와 포즈로 점철된 젊은 날에 머무를 수도 없다. 현실에 순응하기에는 그녀의 비일상적인 개성이 너무나 독특하고, 객기에 머무르기에 그녀는 이미 성장했다.

이런 난감한 자리의 인애를 통해 작가는 예술가(혹은 초인)의 난관을 말하려 했을까. 젊은 예술가는 다른 젊은이들과 더불어 성장하지만, 성장 이후 더욱 고독해진다. 다른 젊은이들처럼 쉽사리 현실을 수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갈 곳에 대해, 이 작품은 미지수로 남겨 두었지만, 작가는 그에 대한 천착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토지>의 길상이 그린 관음탱화가 그 답 중 하나일 터이다.

한편, 인애가 갈 곳이 없는 이유는 정현의 죽음 때문이기도 하다. 인애가 구원하려고 마음먹었던 정현은 비참하게 죽어 버린다. 무시무시한 소유욕과 집착과 타나토스의 화신인 "그 여자"의 마수에서 못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현과 "그 여자"가 동반 자살한 소설의 결말은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성장이 과연 안정된 결혼을 하고 집을 짓는 생활 원칙을 수락하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정현과 "그 여자"로 구현된 타나토스의 세계를 넉넉하게 수용한 통합적 정신에 이르는 것 또한 성장이 아닌가. 그들을 간단히 죽여 버렸기에, 그리고 끝까지 "그 여자"의 이미지를 악마적인 것으로 남겼기에 이 소설은 조금 허전하다. 인애가 간 곳을 말하지 못한 이유도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 한다.

작가 박경리도 이를 알았던 듯하다. 약 5년 후 연재를 시작한 <토지>의 주인공 서희는 아시다시피 무서운 집념과 예외적인 강인함의 소유자이다. 니체의 초인과도 가까운 이런 성격, 박경리의 인생관의 총화라고도 보이는 서희의 성격은 <녹지대>의 인애와 "그 여자"의 성격을 반반씩 닮은 것 같다.

<녹지대>의 마지막 문장인 "인애는 쓰러지지도 않고 꿋꿋이 서 있었다"(2권 313쪽)가 암시하듯, 인애는 초인적 의지의 씨앗을 품고 있다. 인애의 초인적 의지를 서희는 물려받았지만, 한편 서희의 무섭고도 이기적인 집념은 "그 여자"의 편집증적 집착과 닮았다. 정열의 어두운 이면인 편집증적 집념에 대해, 박경리는 오랜 시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녹지대>에서는 그것을 병적이고 악마적인 것으로 치부해서 매장해버렸지만 <토지>에서는 그것을 인간의 생명력을 불태우는 중요 요인으로 통합·수용한 듯하다.

<토지>의 단초 하나 더. 상건은 자살한 정현과 "그 여자"가 자신과 숙배의 운명을 도왔다고 깨닫는다. "그 여자"가 정현에게 집착했기에 명목 상 남편인 상건은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인애가 정현을 사랑했기에 상건은 숙배를 사랑할 수 있었다. 상건은 이것이 "운명"이라고 자각하면서 전율한다.

이렇게 씨실날실로 엮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식을 우리는 <토지>에서도 감명 깊게 읽은 바 있다. 브라질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전언으로 유명한 나비 효과 이론은 우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세상만사가 인과관계의 그물로 촘촘히 엮여 있다는 인생론으로도 해석된다. 이때 인과 관계의 그물 혹은 연기(緣起)의 법칙은 애초에는 의식되지 않기에 더욱 신비롭다. 박경리의 운명론은 이런 맥락에 서 있다.

이밖에도 이 소설에서 악과 예술과 사랑에 관한 박경리적 사유를 읽는 재미, 그리고 1960년대의 문화적 풍경을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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