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의 민정장관 취임식이 2월 10일 오전 군정청 앞마당에서 열렸다. 2월 5일에 취임을 승낙하고 업무를 시작했는데, 이제 공식 취임에 임해 안재홍은 이런 성명서를 발표했다.
"불초 금반 군정청 행정 기관 통괄 책임자인 민정장관의 취임에 당하여 약간의 소신과 당면한 방침을 피력하여 선배 제위와 관민 각위의 협력과 편달을 구하는 바이다. 현재 연합국을 대표하는 미군정 하의 남조선에 있어서 우리가 부하한 당면한 중요 임무는 하지 중장 이하 미군 장병이 조선 독립을 원조하는 열의를 신뢰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 역량을 건설적인 실천에서 구현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환언하면 과도 입법의원의 기능 강화와 행정 사법 기관의 정비를 도모함은 물론 산업 경제의 재건으로써 초미의 급무인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문교의 부흥과 관기의 숙청으로써 국민의 사기를 우리 스스로가 진작하여 민주주의 열강으로 하여금 우리의 자주 역량을 신뢰케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불초가 민정장관을 수락한 것은 무모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담당한 이상 금후에는 훼예포폄을 불문에 붙이고 오로지 민족 해방과 자주 독립을 위하는 단성(丹誠)에서 이 직장(職掌)을 통하여 미력이나마 바치고자 결의하는 바이다. 우리 민족의 당면한 모든 문제는 결코 한사람의 머리와 힘으로써 해결될 것이 아니다. 당면한 민생 문제 하나만 하더라도 실지 생산자인 노무자 제위와 소비대중이 호흡을 맞추어 협력 병진해야 할 것이다. 군정을 최단기간으로 줄이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자주역량의 발휘 여하에 달린 것이다.
끝으로 관공리 제위는 위국지성에서 공평무사한 시책을 해야 한다. 전도 다난한 조국 재건의 도상에서 불초 중책을 부하하매 일편의 혈성을 피력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11일자)
이 취임식에는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 김규식 입법의원 의장과 김용무 대법원장 의 최고위직 요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조선인화'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뜻 깊은 행사였다. 그러나 엊그제 일기에 적은 것처럼 진정한 조선인화는 요원한 과제였다. 아니, 미군정 당국자들이 생각한 조선인화가 애초에 진정한 조선인화가 아니었다.
바로 엊그제 대구의 법관과 검사 전원이 미군 장교의 간섭에 항의, 총 퇴진을 결의한 일이 있었다. 지난 9월 김홍섭 검사에 대한 어느 미군 간부의 간섭에 서울의 검사들이 집단으로 반발한 지 5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얼마 전에 법의 운영상 지장이 많은 미인 장교의 간섭을 제거해 달라고 사법부 총의로서 군정당국에 건의한 사실이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로운 바 있는데, 전 경북도 광공부장으로 있던 박성배는 재직 당시 시가 약 1억 원에 달하는 대마를 불과 2000만 원에 지명 경매 처분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놀랄 만한 부정사건이 적발되어 대구지방검찰청에서는 즉시 구속하여 취조를 진행하고 있던 중, 경북도 미인 상공국장 클라크를 비롯한 미인 측은 형사 문제로 취급할 중대 문제가 아니며 박을 구속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니 석방 취조하라고 강경히 요구하여 드디어 석방시킨 사건에 분격하여 신성한 사법권을 간섭하는 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8일 오후2시를 기하여 오 대구지방검찰청장 이하 전 직원 급 동 고등심리원 심판관 전 직원이 총 퇴진을 선언한 것인데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되던 중, 10일 대구지방검찰청 검찰관 이원홍 김종홍 소진섭 등이 대표로 상경하여 이인 검찰총장을 방문하고 사법권 독립을 위하여 미인 간섭을 절대 반대한다는 요지의 진정서를 제출한 후 선처를 요망하였는데 금후 추이가 주목된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12일자)
이 날 김구는 방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동아일보>에 3회로 나눠 2월 12, 13, 16일자에 실린 이 성명서는 (1) "독립 진영의 재편성" (2) "합작위원회" (3) "신탁" (4) "38선" (5) "국제 관계"의 다섯 개 장으로 이뤄진 것으로, 귀국 후 16개월 만에 가장 소상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조선일보>와 <서울신문>에도 게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구는 근래 뭔가 다급하다고 보일 만큼 담화와 성명을 자주 내놓고 있었다. 2월 들어서만도 4일, 8일에 이어 세 번째다. 10일의 성명서 내용을 들여다보기 전에 직전의 담화 내용을 살펴본다.
2월 3일자 일기에도 소개했던 2월 4일의 담화는 반탁 운동의 방법을 지시한 간단한 내용이었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는 한국의 신탁 통치를 구체적으로 반대하기 위하여 각 정당 及 사회 단체가 투쟁 방침을 통일하고 투쟁 역량을 집결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니 각 지방의 정당 급 단체는 국민 운동의 핵심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지부를 중심으로 하여 역량을 집결하고 명령에 의하여 운동을 추진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5일자)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민통의 통합을 촉구한 2월 8일의 성명서는 상당히 긴 것이었는데도 끝맺음 부분에서 "긴박한 형세에 응부하기 위하여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원칙을 내용도 구비하지 못하고 조솔(粗率)하게 제기함은 심히 유감"이라 하여 더 본격적인 성명이 뒤따를 것을 예고했다.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민통 及 각 정당 사회단체 동지제위께 경고함!"으로 시작한 이 글의 핵심부만 소개한다.
吾人은 시급히 독립 진영을 정화하며 확대 강화함으로서 재편성하여 특히 독립 운동의 최고 방략을 안출하며 또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유일 최고기구를 설치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우리는 여사한 기구를 구태여 신설할 것이 없이 현존한 민통, 독촉국민회, 비상국민회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족할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도 비상국민회의가 수십 년래의 독립 운동의 법통을 계승하였으니 나는 민통과 독촉국민회를 이에 합류시켜 먼저 세 기구를 단일화한 후에 그것을 적당히 확대 강화하여서 독립 운동의 최고 기구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개조하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각 정당은 합동을 원칙으로 하되 즉시에 합동이 곤란하거든 상호 긴밀하게 제휴하며 각해 정당들과 기외 독립 운동의 각 부문 단체들은 각각 권위 있는 대표자를 其 최고 기구에 참가시키어 공동 노력하는 동시에 해 기구와 그 소속 단체와의 종적 관계를 엄밀히 하여서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하도록 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는 이 최고 기구의 지휘 하에 민중에 대한 훈련, 선전, 조직을 진격하고 유효하고 신속하게 추진하여서 독립진영을 민중의 토대 위에 견고하게 세우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 끝으로 일언을 가하는 것은 반탁독립투쟁위원회에 관한 것이다. 이 조직은 반탁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임시적 기구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상하는 바 독립 운동 최고 기구가 성립될 때에는 당연히 그 산하로 들어갈 것이며 필요로 認하면 해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9일자)
2월 8일 성명서를 발표할 때, 아마 2월 10일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별도의 성명서를 서둘러 발표한 까닭이 무엇일까. 이승만이 없는 동안 이승만의 조직을 넘겨받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몇 주 전 결성된 반탁투위보다 진전된 형태의 상설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반탁투위 결성은 이승만과 합의한 일이었고, 이제 이승만 휘하의 민통과 독촉국민회를 임정 배경의 비상국민회에 끌어들이겠다는 것은 김구의 독자적 움직임이었다. 같은 날 독촉국민회의 창립 1주년 기념대회에서는 이런 방향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2월 10일의 성명서 중 (1) "독립 진영의 재편성"은 2월 8일 성명서 내용을 되풀이한 것이다. (2) "합작위원회" 중에 미묘한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는 전 민족 통일을 수요하는 것이다. 전 민족 통일을 수요함으로 좌우 합작을 필요하는 것이다. (…) 현시에 있어서 민주의원에서 합작위원을 소환한 진의는 결단코 좌우 합작을 불필요로 인한다든가 혹은 단념하는 까닭이 아니다. 다만 합작위원회가 그 임무수행 중간에 있어서 돌연히 좌익의 배반을 입어 그 목적을 달성할 희망이 없게 되었고 또 해회에서 발표하는 원칙 중에 반탁에 관한 조항이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하지 중장의 작년 12월 24일 서한의 내용과 본월 5일 성명에 의하여 수포가 되고 만 까닭이다.
그러나 해회를 취소한다 하여서 합작 공작을 위하여 진심으로 노력한 몇 분에 대한 우리의 경의는 감할 바 아니어늘 일시 감정상 충동으로서 그들에게 굴욕을 가하려 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것이다. 더구나 해회를 영도하던 김규식은 독립 운동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고 탁치 반대자로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터인데 그를 찬탁자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일종의 공심을 떠난 모략으로 밖에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격별히 이런 점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근일에 세간에서 운위하는 바 중앙 노선은 정치 이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이상으로 하는 중간당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우 합작의 사명을 가지고 노력하던 합작위원들이 좌도 버리고 우도 버리고 중간만을 취한다면 그것은 당파를 하나 더 만들어내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의 사명을 저버리는 분파 행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한 합위는 해체하고 좌우 합작의 도경을 별개로 강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12일자)
1946년 10월 하순 조미공위 구성 이래 합작위는 극우 세력의 비난과 비판을 받아 왔고, 1월 18일 민주의원의 합작위원 소환 결의는 그 절정이었다. 원래 합작위의 우익 대표 5인 중 4인은 민주의원의 파견, 1인은 비상국민회의의 파견 형식을 취했었다. 합작위에 적대감을 느낀 극우 세력은 민주의원의 소환 결정을 통해 합작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합작위가 극심한 공격에 시달리는 동안 김규식 한 사람을 옹호하는 정도밖에 입을 열지 않고 있던 김구가 옹호의 범위를 "몇 분"으로 늘렸다.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달리 합작위원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합작위의 실패는 기정 사실로 인정했다. 그리고 합작위원들이 독자적 노선을 취하는 것을 "분파 행동"으로 경계했다. 자신이 내민 손을 맞잡지 않으면 다시 몰아붙일 태세다.
이 성명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3) "신탁"이다. 그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맹목적 반탁 운동에 대한 반대 의견을 김구가 알 만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탁 운동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동포 중 일부 인사가 실망적 상태에서 신탁 정부라도 성립되었으면 민생 문제가 다소 해결되리라 하는 막연한 관념을 가지는 경향도 아주 없지는 아니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구갈을 풀기 위하여 독약이라도 마시려는 위험한 착각이다. 우리의 생존은 자주 독립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 또 일부 인사 중에는 본심으로는 신탁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이 국제적으로 규정한 기성 사실이므로 약한 우리로서는 반대한다 하여도 도리어 역효과 밖에 나지 못하리라는 착오 인식을 가지고 오직 복종으로서 그들의 호의를 획득하여서 약속한 5년 후에나 틀림없이 독립을 주기를 애걸하자고 주장한 듯하다. 그러나 다른 약소국들은 자기의 손으로 조인해 놓은 국제 조약도 억울한 것이면 불평등 조약 취소를 세계에 호소하여서 필경 목적을 관철하거든 우리만이 우리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도 상고할 자유가 있거든 우리를 원조하는 맹우들이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정하였다는 방법이 우리의 원하는 바이 아닐진대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호소도 하며 반대도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하물며 당사자인 우리는 알지도 못하게 자기네들끼리 정한 것이니 그들도 양심상으로는 우리에게 동정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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