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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에게 주고 빈자에게 뺏는" 하느님 상대하기

[프레시안 books]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대지의 딸>

책에 대한 '객관적' 소개, 줄거리 요약, 저작 배경 등은 서평의 내용이 아니라 역할이다. 서평을 쓴 사람이 책을 평가, 분석한다 해도 그것 역시 정보이지 비평은 아니다. 책 정보는 소위 '보도 자료', 앞 뒤 날개와 표지에 어느 정도 소개되어 있다. <대지의 딸>처럼 옮긴이가 탈식민 페미니스트 영문학 전문가일 경우 논문 수준의 옮긴이 해설도 있다.

서평의 목적이 독자에게 책을 읽게 하는데 있다면, 더 더욱 내용 요약은 필요 없다. 그래도 '보도 자료 식으로' 말한다면, <대지의 딸>은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의 혁명 현장을 보도했던 저널리스트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가난, 성차별, 가족의 죽음, 죄책감, 분노, 상처…를 뒤로하고 '조국'인 미국을 떠나기 전인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물론, 실제 보도 자료는 이보다 훨씬 훌륭하다!)

이 글은 <대지의 딸>에 대한 그런 정보가 아니라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좋은 서평은 결국 좋은 독후감이다. 독서 감상문은 쓰는 이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어야 한다. 독후감은 개인의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서평을 쓴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자일 뿐 독자를 대변하는 길잡이가 아니다.

서평은 다른 독자들에게 '비교 체험'의 데이터를 제공할 뿐이다. 내가 선호하는 독후감은 긍정적 의미의 스트레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극(stroke)을 주고 체화된 사상(embodied thought)이라는 의미의 감정의 두께가 있는 글이다. 뇌, 마음, 몸의 평화를 깨는 격동인데, 움직임이 클수록 좋다.

▲ <대지의 딸>(아그네스 스메들리 지음, 태혜숙 옮김, 이후 펴냄). ⓒ이후
<대지의 딸>, 내 독후감의 키워드는 세 가지다. 첫째 슬픔, 둘째 복수(複數)의 젠더(multiple gender), 셋째 저자인 아그네스 스메들리와 우리의 신여성 그리고 프랑스의 보부아르다.

페미니스트는 성 차별의 보편성과 역사성('특수성', 차이, 지역성…)을 동시에 주장해야 하는 어려움을 사명으로 해야 한다. 가부장제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작동하는 억압이기 때문에 몰역사적으로,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겨지기 쉽다. 젠더는 세상 그 어느 제도보다도 사회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이며 개인의 삶에 깊은 자상을 남기는 데도, 그 부당성과 야만성에 비해 너무나 비가시화되어 왔다.

이 때문에 그간 페미니즘은 젠더 자체를 강조해 온 경향이 있는데, 한편 이런 작업은 여성을 항상적인 피해자로 가부장제를 절대 불변의 권력으로 재현하기 쉽다. 페미니스트의 임무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성별이라는 공기가 어떤 상황에서 성 차별로 발화(發火)되는가, 그 사회 문화적 조건을 밝혀내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편재(遍在)하는 동시에 편재(偏在) 한다. 그것이 가부장제가 '운명의 소관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낸 역사인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주인공의 삶은 너무나 익숙하다. 나는 소설 속 상황에 강하게 동일시되었다. 1920년대 미국의 가난한 백인 여성과 2012년 한국의 약간(?) 가난한 여성의 처지가 비슷하다니 말이 안 되는 줄 알지만, 왜 어딜 가나 '여자의 일생'은 이토록 비슷하단 말인가.

몇 년 전 읽은 <만 가지 슬픔>(노진선 옮김, 대산출판사 펴냄)이 생각났다. <만 가지 슬픔>은 주한 미군을 아버지로 둔 엘리자베스 김이라는 여성의 실화이다. 두 책의 저자는 모두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을 사랑하려는 가난한 여성들이다. 이들의 삶은 고달픈 정도가 아니다. 노동과 고통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있다. 사실, 그런 상태가 정상이다. 때문에 이런 책들의 서평에는 대개 "치유적 글쓰기"라는 표식이 붙는다. (개인적으로 이런 레테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 이들에게만 치유가 필요한가. '진짜 치료 대상'은 '가해자'가 아닌가?)

이 소설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사실적이며 깊고 절절한 묘사는 한 문장도 빠지는 곳이 없다. 내 주장은 이것이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빈곤과 성별이라는 조건에 있지만,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대로 고통이 있다. '남성'(자신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종속적 주체)이라고 해서 이런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피해자(loser feeling)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외롭고 지겨운 노동의 연속.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이다. 슬픔은 삶의 불행이 아니라 조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외면한다. 그것을 상기시키는 사람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예외인 냥 방어한다. 나는 다음 구절에서 아그네스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느꼈다.

"왜 이리 인생이 모순일까…매우 비참한 상황인데도 나는 종종 웃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258쪽)

그녀가 겪은 노동, 모욕, 가족 관계, 공부, 미래, 결혼, 사랑, 분노는 특별한 인생사가 아니다. 이 책에 두 번 인용되는 걸로 기억하는데, 요컨대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주제 중의 하나는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누가복음 제8장18절)이다.

나는 이 책이 '굴레를 벗고 떨쳐 일어선 위대한 노동 계급의 투쟁사'가 아니어서 좋다. 이 소설은 비탄과 분노의 기록이다. 주인공이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것처럼 나는 최근에 소중한 이와 절대적인 이별을 했는데, "슬픔에 잠긴다"라는 표현이 비유가 아님을 알았다. 정말 몸이 슬픔에 잠기는 거다. 그래서 물 밖으로 몸이 나올 수 없는, 잊지도 그리워할 수도 없는 숨 쉴 수 없는 시간을 겪는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 독후감은 간단히 쓴다. 흔히, '민중 여성'을 표현할 때 "성, 계급, 인종(민족)…이중(삼중) 억압"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젠더나 계급을 각기 독자적인 모순으로 상정하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사회적 모순은 상호 의존적이다. 계급은 젠더화되어 있고 젠더는 계급화되어 있다. 어느 것도 혼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개인이 놓인 상황과 정체성은 한 가지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때문에 해방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복잡하고 고단한 일상이며, 모든 억압에는 탈출과 역전의 틈새가 있기 마련이다. 이중 삼중의 억압이라고 해서 억압이 두 배 세 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순이 다른 관계에서는 해방의 조건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주인공은 가난한 백인 여성인데 인도인(남성) 교수가 그녀의 멘토이다. 그녀는 '아시아에서는' 서구에서 온 인텔리 여성이었다.

허정숙이나 김활란처럼 동시대 공적 영역에 진출한, 가난한 여성 출신이었으나 교육 받은 한국의 신여성들은 아그네스 스메들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아니, 그녀처럼 살 수 없었다. 허정숙과 김활란은 다른 행로를 밟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서 다른 나라의 독립 운동에 참여하거나 취재하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부르주아 여성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위 세 여성과 또 다른 삶을 살았다. 제국주의 프랑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실존주의 페미니즘 이론을 정립했고, <제2의 성>은 지금도 여성학 입문서이다. 또한, 그녀는 <제2의 성> 분량의 <연애 편지>(사르트르에게 쓴 것이 아니다)를 썼다. 알베르 카뮈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프란츠 파농을 지원했던 사르트르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나는 이들의 삶을 비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여성들의 삶을 다르게 만들었던 20세기 역사. 서구의 근대성과 자본의 발달은 우리의 식민 경험으로 가능했고, '덕분에' 아그네스나 보부아르는 우리의 선배들처럼 독립 운동이나 '건국'에의 참여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친일이니 부역이니 하는 역사적 짐 없이 '개인적' 삶을 살 수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여성은 빈부와 '상관없이' 자기실현으로서 페미니즘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자기실현이 페미니즘의 본령은 아니다.)

<대지의 딸>. 대지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내가 생각하는 대지는 안전하지도 단단하지도 평온하지도 않는 세상이다. 지진, 화산 폭발이 수시로 일어나며 대지의 표층은 얇고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저 아래 플레이트들은 수시로 충돌하며 언제든 욱일승천할 기세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은 새로운 샘을 열어 보였다"(11쪽) 통념과는 반대로 대지(大地)는 자연이나 안식의 상징이 아니라 불평등과 분노의 대지(垈地)이며 폭발 직전이다. 지진은 희망의 수원이며 고통은 가능성이다. 우리는 그 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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