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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애국자' 혹은 '정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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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구, '애국자' 혹은 '정치꾼'

[해방일기] 1947년 2월 3일

1947년 2월 3일

백기완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1>에 수록된 "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에서 김구를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글 모두에서 김구의 자주 평화 통일 노선의 "과오와 불철저"를 지적한 "이 땅에서 숨 쉬고 사는 어느 지식인"을 비판하며 "백범처럼 생명을 내대고 싸우는 자라야만 감히 백범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지식인이 "자식 놈이 감기만 들어도 싸우는 역사의 현장을 외면하고 한낮에 집으로 달려가야 하는, 사실상 분단의 현실에 통합된 소시민"이라고 규정했다(327~328쪽).

이 글이 언제 작성된 것인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1970년대 후반의 것으로 추정한다. 서지 사항에는 "개정 제3판 제1쇄 2004년 5월 15일" 이후만 표시되어 있고 김언호의 출간사 "4반세기 만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다시 펴내며"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은 1979년 10월 15일에 출간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한국 현대사를 밝히는 출발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의 역사 전개에 적지 않은 몫을 한 이 책의 내용 표시로 너무 소략하다. 적어도 각 권 각 글이 집필된 시점은 표시해야겠다.

아무튼 군사 정권 시기의 글이라면 백기완의 호전적 방어 자세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양심적 애국자를 희생시킨 불의 부정한 권력 체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 불의 부정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김구가 양심적 애국자였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독재를 어떻게 무너뜨리느냐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진로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 문제가 이 사회 앞에 놓여 있다. 충심(忠心)만이 아니라 지혜도 필요한 상황이다. 과거의 인물에 대해서도 양심적 애국자임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혜와 역량을 모두 살필 필요가 있다.

해방 후 김구의 활동에서 가장 큰 내용은 반탁 운동이었다. 그런데 백기완도 반탁 운동에 있어서는 김구의 노선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여기에서 애국자가 선택해야 할 길은 '탁치 문제'를 앞에 놓고 어떤 일이 있어도 민족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다. 따라서 탁치안을 앞에 놓고 이에 대하여 흑백논리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이 조국의 분단을 강요하는 외세의 함정이라는 것을, 38선 획정의 기본 논리에 따라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항일-반제 투쟁의 역사적 경륜이 필요한 상황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중차대한 고비에서 백범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한 탁치안에 대한 전면적 반대 입장으로 기울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1>, 347쪽)

이것으로써 백범의 반탁 전술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효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히 입증되었다. 따라서 백범을 비롯한 모든 항일 민족 세력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고비로 민족 통일 전략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한 백범에게는 당장에 이승만과 결별해야 할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이승만의 분열주의 노선에 대해 호된 반격을 가해야 할 단계였다. (…) 그러나 백범은 이와 같이 해방 후 가장 중차대한 고비에서 석연치 못하였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1>, 349~350쪽)

이런 비평을 내림에 있어서도 백기완의 논거에는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결함이 있다. 그는 신탁 통치안에 대해 "미-소가 5년 동안 위임 통치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고 파악했는데,346쪽) 실제로 3상 회의 결정은 미-영-중-소 4개국 신탁 통치안이었다.

4개국 탁치라면 2개국 탁치에 비해 반대 명분이 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45~46 연말연초 상황에서 반탁 운동에 대한 김구의 태도는 '외세 배척'의 명분보다 중경 임정의 정국 장악이라는 현실적 목표에 많이 좌우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한 달 동안 상황을 살펴본 결과 미군정이 민심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반탁 같은 명분을 내세워 강하게 나가면 점령군이나 다른 정치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바로 세워질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경찰 간부와 군정청 관리들의 태도가 그런 기대감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반탁 운동의 출발점에서 김구에게 전략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면 5개월 후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하지 않은 사실도 쉽게 이해된다. 미군정이 일본 제국 못지않게 강한 권력자라는 사실은 바로 확인되었고, 중경 임정 세력은 곧 쪼개졌다.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미군정에 기대어 힘을 키웠고 김구는 이승만 중심 민주의원의 곁방살이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반탁 운동으로 인해 좌익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이승만과 결별한다면 경교장(죽첨장) 거처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승만과 다른 김구의 태도가 포착된 것은 10월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민주의원 총리 및 한독당 위원장의 요직에 있는 김구는 하지 중장의 초청으로 11일 상오 10시경 동 중장을 방문하고 요담하였다 하는 바 동 회담에서 하지 중장은 금반 성립된 합작 추진과 더불어 입법기관에 관하여 김구의 절대 협력을 요청하였다 한다. 그런데 김구의 정치 동향은 현재까지 이승만과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왔었으나 이번 합작 문제에 관하여서는 이 박사와의 연락은 그다지 긴밀치 않았던 모양으로 과반 민의에서 합작7원칙을 사후 토의하였을 때에도 김구는 찬성 표결을 주장하였고 이 박사는 공식적으로 언명을 회피하였던 것으로 보아 합작 입법 기관 문제에 대한 양씨의 견해는 상이한 점이 있는 듯하다고 하는데 김구는 금후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리라고 전하고 있다. (<조선일보> 1945년 10월 12일자)

김구가 좌우 합작을 놓고 이승만과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을 백기완도 위 글 350쪽에서 지적했는데, 그에 붙여 인용한 김구의 성명은 "<백범어록> p. 80, 1946년 9월 3일"로 표시되어 있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그 인용 내용이 1946년 10월 15일자 <자유신문> "좌우 합작 추진은 계속-김주석 담" 기사에 보도된 10월 14일자 담화문에서 발췌한 것이고 10월 7일 발표된 합작 7원칙이 원래의 담화문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백범어록> 편찬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월에 좌우 합작이 표면화된 이래 김구는 이에 관한 적극적 논평 없이 지내다가 합작 7원칙이 나오면서 지지하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10월 10일과 18일에 하지를 거듭 만나는 등 군정청과의 접촉도 활발해졌다. 합작 지지를 거듭 밝힌 11월 18일자 담화는 11월 23일자 일기에도 인용했는데, 김규식과 여운형에 대한 신뢰를 곡진히 표현한 부분만 다시 옮겨놓는다.

나는 작일에 김규식 박사를 병원으로 심방하였는데 그 초수한 얼굴을 대할 때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는 무엇을 위하여 이와 같이 생명을 단촉(短促)하고 있나' 하고 자연히 미안한 생각이 떠돌았다. 그의 쇠약한 몸에서는 양심만이 뛰고 있고 그의 병상머리에는 성경 한 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누구든지 이 광경을 보는 자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운형 씨에 대하여서 나도 불만한 바가 없지 않았으며 또 근일 항간에서도 다소 비난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금차 좌우 합작에 있어서의 그의 몇 가지 용단을 알고 도리어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하여간 김-여 양씨에 대하여 기대가 큰 만큼 우리는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로 하여금 유종의 미가 있게 하기에 노력할 것뿐이다. 그러나 미리 조급증을 내서 그들로 하여금 낙심을 시킨다는 것은 신경과민일 것이니 경계하여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9일자)

이승만은 1946년 5월 초순 정회된 미소공위가 다시 열리지 않고 남조선 단독 정부가 세워지기 바라는 뜻을 6월 3일의 정읍 발언 이후 점차 노골적으로 밝혀 왔다. 미군정이 미소공위를 아주 내버리지 않고 좌우 합작을 지원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그는 독자적 극우 세력 구축에 몰두했다. 1946년 12월 초 그가 미국으로 떠날 때 그는 민주의원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외에 독촉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민통) 등 지지 세력을 조직화해 놓고 있었다.

1946년 4월 30일 경제보국회를 앞세워 미군정의 승인을 받은 2000만 원의 은행 대출금이 그 조직력의 바탕이었을 것이다. (경제보국회 대출에 관해서는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돌베개 펴냄) 591~600쪽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2000만 원 중 1000만 원은 이승만이 직접 사용하고, 나머지 1000만 원의 대부분은 이승만이 지정하거나 승인한 곳에 지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의 미국행은 그 동안 이용해 온 하지를 이제 제쳐놓고 남조선 분단 건국을 미국 정계에 직접 로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하지에 대한 전면적 공세에 나선 것은 1947년 1월 25일의 일이었지만, 정용욱은 그가 미국으로 떠날 때 이미 그런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승만은 미국으로 보다 상위의 선을 찾아 나섬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11월 5일의 미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가 이승만의 도미 의지를 고무하였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나의 미국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은 공화당원이다. 하지는 민주당원이다. (…) 그러나 이제 공화당이 정권을 장악했다."며 공화당의 승리를 환영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중심 펴냄), 196쪽)

정병준은 이승만의 출발 전 김구와의 사이에 어떤 범위의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이승만은 도미에 앞서 김구와 향후 계획에 대해 합의했다. 이승만은 미국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 활동 노선을 주장했고, 김구는 주한 미군 5만 명에 대항하는 폭동과 임정 법통을 근거로 한 정부 수립 노선을 주장했다. 논의 끝에 김구는 이승만이 미국 측으로부터 조속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혁명적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는 전제로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국내와 워싱턴에서 반탁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 핵심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우익 대표를 철수시킬 것, 입법의원을 반탁 운동의 선전장으로 활용할 것, 신탁 문제에 대한 미군정의 불확실한 태도와 공산주의자들을 선호하는 정책을 공격할 것,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이었다. 종국적으로 미군정에 대한 반란이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33~634쪽)

이 대목에서 김구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방향까지 동의했을지는 인용한 자료 범위로 보아 단정하기 힘들다. 명시적으로 그 방향에 동의한 것은 아니고 미소공위에 방해가 되고, 따라서 단독 정부 수립에 이용될 수 있는 반탁 운동 재개에 동의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두 사람 합의의 초점은 결국 "미군정에 대한 반란"이었다. 김구는 원래부터 미군정에 도전하고 싶었느나 그럴 힘이 없었는데, 이제 이승만이 하지를 흔들기 위해 공격을 원하기 때문에 이승만의 세력을 미군정 공격에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947년 1월 1일자 <조선일보>에 뜻을 알아보기 힘든 기사 하나가 실렸다. 이승만이 없는 돈암장에 김구와 브라운 소장 등이 모여 프란체스카 부인과 무슨 의논을 했단 말인가?

미소공위 미 측 수석위원 브라운 소장, 민주의원 총리 金九, 비상국민회의 의장대리 조완구 이승만 부인은 30일 돈암장 이 박사 숙소에서 미국에 체재중인 이박사의 최근 전보를 중심으로 장시간 토의하였다 하는데 전보의 내용은 규지(窺知)할 수 없으나 입의, 민의, 비상국민회의, 미소공위 재개 등 제 문제가 미묘한 때인 만큼 토의 내용은 자못 주목된다고 한다. (<조선일보> 1947년 1월 1일자)

<우남 이승만 연구> 642쪽에서 이 기사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이승만은 12월 31일 미국에서 '한국민에게 보내는 신년사'를 전문으로 보냈다. 브라운 소장은 선동적인 이승만의 전문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일단 막고, 이 문제를 프란체스카, 김구, 조완구, 박현숙 등과 협의해야 했다. 공표되지 않은 이승만의 메시지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즉각적인 행동"을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원하는 바가 다시 갈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과시만을 원한 반면 김구는 행동을 원했다. 하지는 자기 고문을 지냈던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까지 동원해서 이승만의 자제를 간청했고, 이승만은 1월 14일 민주의원으로 반탁 시위를 말리는 전문을 보냈다.

"반탁 데모 말라-이 박사 민의에 타전"

[워싱턴 16일발 AP합동]당지에 체재 중인 남조선민주의원 의장 이승만 박사는 남조선민주의원에 타전하여 조만간 전개되리라는 반탁 데모를 경고하여 여좌히 말하였다.

"조선에는 여하한 데모도 전개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여사한 행동이 외국 배척 운동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지 又는 조선에 있는 우리의 적들은 마치 내가 조선의 배외 감정을 선동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자치할 용의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반미 급 반조선 선동분자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천명할 결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오해를 받을 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17일자)

그 결과 1월 18~20일로 예정되었던 대규모 반탁 시위는 무산되었지만 반탁 운동 확장 노력은 계속되었다. 1월 20일 입법의원의 반탁 결의안 채택으로 반탁 세력의 기세가 올라 있을 무렵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민통, 3단체 통합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비의(非議)와 독촉(獨促) 통합 문제로 토의"

반탁 독립을 추진시키기 위한 통일기구의 수립이 시급히 요청됨에 비추어 민통 비상국민회 독촉국민회 등 3단체는 한 기구로 통합함으로써 요청에 응하고자 통합에 관한 연석회의가 있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22일에도 계속하여 창덕궁 서향각에서 하오 1시부터 통합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비상국민회(엄항섭, 조경한 양씨)와 독촉국민회(이운, 김승학 양씨)의 연석회의가 있었는데 현재의 분위기로는 통합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다. 그리고 민통에서는 이승만의 회전이 있은 후 이 연석회의에 참석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23일자)

이 통합은 이승만의 부재를 틈타 세력을 확장하려는 김구 측의 시도로 보인다. 비상국민회의는 김구의 세력 근거였지만 지방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2월 4일 반탁 세력을 향한 김구의 담화문에는 독촉국민회의 지방 조직을 반탁 운동에 동원하려는 뜻이 나타나 있다.

"투쟁 역량 집결하라-반탁위원장 김구 씨 지령"

반탁독립투쟁위원장 김구 선생은 반탁 투쟁 실천에 대한 전국적 투쟁 역량을 집결하고자 다음과 같은 지령을 발하였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는 한국의 신탁 통치를 구체적으로 반대하기 위하여 각 정당 及 사회 단체가 투쟁 방침을 통일하고 투쟁 역량을 집결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인데 각 지방의 정당 급 단체는 국민 운동의 핵심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지부를 중심으로 하여 역량을 집결하고 명령에 의하여 운동을 추진하라." (<동아일보> 1947년 2월 5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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