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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마니아는 필독! 반성이 필요한 시간!

[철학자의 서재] 홍자성의 <채근담>

나는 반성하련다

뜬금없는 소리지만, 나는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아니 책을 읽기가 조심스럽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든, 책이라 함은 언제나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소설책 정도는(절대 문학 작품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곧잘 읽었는데, 공부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부터는 무엇이나 하나하나 따지면서 읽는 안 좋은 버릇이 생겨 책을 읽는 시간도 길어짐과 동시에 책을 읽는 지루함과 어려움이 함께 찾아왔다. 모든 책이 공부의 대상이요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양질과 악질을 떠나 동서고금의 책이란 녀석이 엄청나게 많다. 그러니 그 부담으로 인해 더더욱 책을 안 읽게 된 것이다.

이렇듯 책을 잘 읽지 않는 처지에 하필이면 작년 크리스마스에 대형 서점을 찾았다. 앞서 밝혔던 내용이 여전히 공부가 필요한 입장에서는 누가 들어도 비겁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책은 읽어야 한다. 사실 그 지루함과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고 게을렀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반성을 하면서 서점에 들어섰다.

후문을 통해 서점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소위 다이어리라고 하는 수첩들이었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다가오는 때라 그런지 수첩 주위엔 사람들이 꽤 붐볐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일기를 써본 지가 언제였던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동안 그곳을 머물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독서 흥미를 끌어 올릴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책을 찾아서. 한참 동안을 헤맸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맞나 보다. 역시나 눈에 들어오는 책은 한정되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지만, 독서 편식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또 다시 반성을 하게 된다. 그렇게 손에 쥔 책이 바로 홍자성의 <채근담>(최현 옮김, 범우사 펴냄)이다.

▲ <채근담>(홍자성 지음, 최현 옮김, 범우사 펴냄). ⓒ범우사
예전부터 곁눈질을 하면서 흠모해오던 책이었지만 이런저런 핑계, 아니 게으름으로 인해 읽지 않았던 책, <채근담>. 명나라의 이름 없는 선비였던 '홍자성(洪自誠)'이 쓴 이 책은 비교적 최근인 명대의 책인데도 마치 <논어>를 위시한 옛날 책과 같이 각 장의 맥락이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는 오로지 학문적인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책의 내용을 살펴본 결과 그는 자기 이름(自誠)에 걸맞게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목적으로 이 책을 쓴 듯하다. 물론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반성에서 나온 고뇌와 깨달음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때가 마침 연말이기도 하거니와 명대의 선비 홍자성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여 기꺼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기로 했다.

나도 세상을 반성한다. 당신도?

책을 읽으면서 한참 동안 스스로를 바라보며 반성을 하고 있자니,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세상에까지 미치는 것은 또 다른 악취미이거나 병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세상 걱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듯, 세상의 주인은 우리들이며 우리라는 무리 속에는 나도 속해 있기에 나 또한 세상의 지분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셈인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힘써 세상 걱정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스스로에 대한 반성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반성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홍자성은 "하늘과 땅은 영원히 있으나 이 몸은 두 번 얻지 못하며, 인생은 백년에 불과한데 이 하루는 쉬 가버린다. 다행히 그 사이에 태어난 사람인 바에야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해서도 안 되고, 또 헛되이 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86~87쪽)라고 말한다. 짧다면 짧은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할 것과 함께 언제나 있을 이 땅의 주인들을 위해 세상에 대한 반성도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만을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 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홍자성은 "책을 읽으면서 성인(聖人)이나 현자(賢者)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글씨를 베끼는 필생(筆生)에 지나지 않으며,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관복(官服)을 입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을 가르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구두선(口頭禪)일 뿐이며, 사업을 일으키고도 덕을 심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눈앞에 피고 지는 한때의 꽃이 되고 말 것이다"(54쪽)라고 하면서 직분에 맞는 마음가짐을 내세우면서 그 직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반성하게끔 하고 있다.

꿈과 희망을 저버리고 그저 생각 없이 공부하는 학생과 학자들, 상하를 막론하고 자기 밥그릇 지키기 바쁜 공직자들, 진심이 담긴 사랑어린 지혜가 아닌 단지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르치는 선생과 교수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이익과 손해를 따져 사람을 사고파는 사업자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는 현대의 세분화된 직업군에는 맞지 않아 그리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 뜻을 확장해본다면 얼마든지 자신에 꼭 맞는 속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홍자성은 "사람들의 형편을 보면 가진 이도 있고 갖지 못한 이도 있는데, 어찌 나만 홀로 다 가지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자기의 심정을 보더라도 도리에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는데, 어찌 사람이 다 도리에 맞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남과 나를 견주어서 다스려 나간다면, 이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편리한 한 방법이 될 것이다"(51쪽)라고 말한다.

이는 절대 남과 나를 비교하는 삶을 살거나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위안을 삼으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을 기본으로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생각까지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역지사지의 자세를 말한 것이다.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자신을 알고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면 진정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한층 더 편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인 것이다.

거짓·도돌이표 반성은 안 된다

지나간 일을 후회만 하는 삶보다는 반성을 하며 사는 삶이 분명 더 가치가 있다. 하지만 겉으로만 하는 반성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홍자성은 "사람이 성실한 마음을 갖고 화친을 도모하며 즐거운 안색을 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부모와 형제를 한 몸이 되게 하고 뜻이 맞게 하면, 부처 앞에 앉아 숨을 고르게 쉬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보다 만 배나 더 나을 것이다"(31쪽)라고 하면서 진심에서 나온 반성이 아닌 형식적인 반성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간직하고,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작게는 가족에서부터 크게는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화 <투캅스>에 나온 형사(안성기)처럼 온갖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교회에 나가 아주 피상적인 고해성사 기도를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다.

또 늘 같은 반성만 하는 삶도 문제가 있다. 한 번 했던 반성을 반복한다는 것은 반성에 의한 변화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홍자성은 "사사로운 욕심을 억제할 경우에 '그것을 빨리 알지 못하면 억제하는 힘을 기르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비록 알았다고 하더라도 참는 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인식은 악마를 비추는 한 알의 밝은 구슬이요 힘은 악마를 베는 한 자루의 지혜로운 칼이니,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96쪽)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의 '인식'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는 반성의 과정이라면 '힘'은 반성의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잘못을 고치는 실천일 것이다. 이는 제대로 된 반성의 끝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에 있다는 말이다. 마음속으로만, 말이나 글로만 하는 반성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묻어나는 반성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성인 것이다.

반성에는 때와 장소, 왕도도 없다

"외로운 등불이 반딧불처럼 가물거리고 삼라만상이 소리 없이 고요한 밤, 이때가 비로소 우리가 편안히 잠들 때다. 새벽꿈에서 막 깨어나 만물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때, 이때가 우리가 혼돈 속에서 벗어날 때다. 이때를 틈타 마음의 빛을 환히 돌이켜 보면, 비로소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모두 몸을 묶는 수갑이요 정욕과 기호(嗜好)가 다 마음을 타락시키는 기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108쪽)라고 하면서 홍자성은 잠자리에 들기 전과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가 반성의 최적기임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가장 적합한 시간대를 말했을 뿐, 반드시 그 시간에만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문명의 발달로 온종일 밝고 복잡다단해진 현대에 있어 홍자성의 말대로 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반성은 언제 하는 것인가. 알다시피 반성은 늘 해야 하는 것이다. 적당한 때가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잠이 들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홍자성은 "자기를 반성하는 사람에게는 닥치는 일마다 모두 약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나는 생각마다 모두 창과 칼이 된다. 하나는 모든 선의 길을 열어 주고 또 하나는 모든 악의 근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그 양자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다"(109쪽)고 하면서 반성하는 삶에 대한 긍정을 마다치 않는다. 반성은 남이 알아주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반성하는 삶은 자신을 억누르고 옥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비롯해 세상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반성을 다소 번거롭고 귀찮다는 이유로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책에 실린 말이라고 다 옳고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말을 하거나 주장을 하는 데 필요한 근거가 될 수는 있어도 진리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채근담>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홍자성'이라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나아가 생각할 여지와 자신을 돌아보게끔 하는 시간을 선사해준다면 이는 분명 가치가 있는 책인 것이다.

새해를 맞아 많은 분들이 새로운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장만했을 것이다. 그곳에 만일 그날그날 주요 일정만 적었던 분이나, 혹은 그마저도 적지 않은 분들은 지금부터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는 글을 마음의 펜으로 그때그때 적어보는 것이 어떨까. 단지 기억을 위한 기록이 아닌, 좀 더 멋진 자신과 세상을 위한 실천과 변화의 기록, 진짜 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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