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지었다고 하는 <힘에의 의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꼭 짚는 듯한 말이다. 우리의 학창 시절은 '무한 경쟁'으로 가득하다. 학생들은 뛰고 또 뛴다. 더 잘 나고 뛰어나기 위해서일까? 아닌 듯싶다. 남들에게 뒤쳐질까 두려워 달리는 쪽이 훨씬 많아 보인다. 남들 다가는 대학, 나만 못 갈까봐. 남들 다 가진 스펙, 나만 못 가질까봐 등등.
이렇게 살면 행복해질까? 답은 뻔하다. 대한민국은 자살이 드물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패배한 자도 불행하지만 승자(勝者)들도 헛헛하다.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내일을 바라보기 어려운 탓이다. '영원한 1등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도대체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행복하단 말인가? 철학자 김성우는 우리의 처지를 한마디로 되묻는다.
"길이 갑자기 막혀버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기술'일까? 김성우는 유명 대학에서 벌어진 학생들 연쇄 자살에 혀를 찬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英語)가 아니라 삶의 길을 묻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이러한 길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는 사회과학적 분석력이며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예술적 감수성입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잘 나가던 검투사였다. 하지만 그는 노예일 뿐이었다. 그가 '이런 삶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일까?', '바람직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를 곱씹게 되었을 때, 그는 '자유인'으로 거듭났다. 그는 노예로 영광을 누리기보다 자유인으로 죽기를 바랐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세상은 '생존 경쟁', '경쟁력', '순위', '서열'을 내세우며 우리를 닦달한다. 이를 무작정 좇기보다 한발 떨어져 되물어 보라. '이런 삶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일까?', '바람직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 <스무살에 만난 철학 멘토>(김성우 지음, 알렙 펴냄). ⓒ알렙 |
사르트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다. "제가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것과 '노벨상 수상자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역시 그는 실존 철학자다웠다. 실존 철학은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을 일깨운다. 사르트르는 자신을 규정하고 옥좨는 권위를 떨칠 줄 알았다. 망치는 망치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사르트르는 이 자유로 모두가 자유인으로 사는 세상을 꿈꿨다. 그가 외친 '앙가주망(engagement)'의 의미다.
하이데거의 가르침도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는 '그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문학과 예술에 관해서 읽고 보며 판단한다. 또 우리는 '그들'이 물러서듯이 '군중'으로부터 물러선다. 또 '그들'이 격분하는 것에 우리도 격분하게 된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고 (…) 이 '그들'이 일상성의 존재방식을 규정한다." (<존재와 시간> 1부)
'그들'은 누구일까?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한다. 유행은 괜히 생기겠는가. 대부분은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렇게 우리는 '군중'이 되어 묻어가는 삶을 산다. '그들'은 개성을 잃어버린 우리들 모습이다. 친구들과 가십 거리를 열심히 떠들었다 해보자. 그러면 세상에 대해 잘 알게 되던가? 오히려 세상의 진짜 모습은 더 흐릿해지기 쉽다. 우리에게는 차라리 '침묵'이 소중하다.
하이데거는 '과학 제국주의'도 비판한다. 우리 시대의 학문의 모델은 자연과학이다. '과학적'이라는 꼬리표를 달 수 없는 주장은 '가치 없는 것', '억지 논리'처럼 여겨진다. 심지어 인문학마저도 '인문과학'이라고 스스로 외쳐대는 이유다. 과학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학이 '세상의 의미', '삶의 의미'까지 오롯이 밝힐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시(詩)에 주목한다. 과학의 정교한 언어가 삶의 진실을 가장 잘 보여주지는 않는다. 문학과 시의 통찰은 세상의 깊이를 더 잘 깨닫게 한다.
이렇듯 김성우가 소개하는 철학 멘토들을 따라 가다보면, 생각이 점점 많아질 테다. 학교에서 배운 '세상을 지배하는 믿음'들이 깨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험은 금물이다. 헤겔은 우리의 현실과 처지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진시황은 불로초(不老草)를 찾겠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이 맞아야 할 당연한 운명이다. 이를 무시하고서는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기 어렵다. 테러리스트들의 논리도 진시황과 별다르지 않다. 몇몇 사람만 '제거'하고나면 내 뜻을 이룰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모든 일에는 '역사적 조건'과 상황이 있는 법이다.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 나의 꿈은 무모한 시도로 바뀌어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김성우의 <스무 살에 만난 철학 멘토>는 청년들에게 두 가지 물음을 건넨다. "존재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구력과 근력을 갖추지 않은 채 마라톤을 뛸 수는 없다. 인생길도 다르지 않다. 의미와 보람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려면 '지적(知的) 지구력'과 '영혼의 근력'을 갖추어야 할 테다. "존재란 무엇인가?"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세상과 삶의 근본을 묻는 깊은 물음이다. 이 두 질문과 씨름한 경험은 영혼의 힘을 한껏 키워줄 것이다.
<스무 살에 만난 철학 멘토>는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김성우의 설명 방식은 꼼꼼하고 치밀하다. 지적 지구력이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는 책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은 그냥 틔워지지 않는다. '그들'로 내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은 젊은이라면, <스무 살에 만난 철학 멘토>를 붙잡고 끙끙대 볼 일이다. 이 책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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