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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혁명의 예언가' 혹은 '철없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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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혁명의 예언가' 혹은 '철없는 몽상가'?

[프레시안 books] 이현우의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이름은 한국 인문학계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난해한 라캉 정신분석학을 쉽게 해설하는 재기발랄한 이론가로 첫 선을 보인 이후, 지젝은 라캉의 실재 개념과의 전면적 조우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을 독창적으로 시도해왔다.

지젝이 '환상'의 기제로서 이데올로기를 재해석해내는 방식이라든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넘어서는 이른바 "환상 통과"와 주체적 '행위'를 이론화해내는 방식, 그리고 칸트와 헤겔과 레닌을 읽어내는 그의 독특한 해석은 푸코, 데리다, 들뢰즈, 버틀러 등에 대한 비판적 읽기와 함께 더 이상의 소개나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국내 학계에 잘 알려진 상태다.

사실 슬라보예 지젝은 2000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 화려한 광채를 몰고 다니는 스타 지식인이다. 3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작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고급 문학과 대중문화, 철학 담론을 종횡무진 횡단하면서 이를 9·11 테러, 이라크 사태, 세계 금융 위기, 발칸반도의 인종 청소, 미국 대통령 선거 등 긴급한 현실적 사건과 실시간으로 연결시키는 그의 글쓰기는 라캉 해설자로만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라캉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사유를 촉발시키는 매트릭스이지만, 지젝은 이 매트릭스로 귀속되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적 번역 작업을 수행해왔다.

이 번역 작업이 종종 억지스러운 조합과 김밥 옆구리 터지듯 벌어지는 균열 지점을 노출하기도 하지만, '횡단적 지식인'이라는 우리 시대의 유행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을 찾는다면 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문화 연구라는 울타리 속으로 그의 저술 작업을 밀어넣을 수도 있지만, 그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듯이 "지배적 권력 관계를 폭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권력 관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 양태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비판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척하기만 할 뿐"인 현재의 문화 연구 속으로 포섭되기에 그는 지나치게 위험하다.

다문화주의적 관용과 정체성의 정치가 정치적 올바름으로 칭송받고 이른바 '제3의 길'이 서구 좌파의 대안으로 검토되는 시대에, 그는 계급 갈등을 사회의 근본적 적대로 선언하고 전체주의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공산주의의 복권을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세계 금융 위기라는 자본주의의 트라우마적 상황에서 좌파 해방 정치의 가능성을 열려면 혁명적 테러와 폭력을 무릅써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도 서슴없이 펼치고 있다. 지젝은 홀로코스트 이후 서구 지식인에게 일종의 금기어가 된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뭐가 어쨌다는 것이냐'고 뻔뻔스럽게 되받아쳤으며, "오늘날 우리의 적은 민주주의 그 자체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주장을 수용하여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건너갈 것을 요구한다.

관용과 공감과 비폭력이 묵시적 합의를 얻고 있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폭력 불사를 외치다니! 그는 혁명 조급증에 걸려 현실감을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금융 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고자 하는 이른바 99퍼센트의 저항을 조직화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무기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우리가 그에게 필연적으로 던지게 되는 물음이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이현우가 최근 출간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자음과모음 펴냄)는 지젝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현실이라는 사회적 상징 세계의 장벽을 일시적으로 중지시켜 보려는 지적 작업이다. 이 책은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우리말로 재번역된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 테러 이후의 세계>(이현우·김희진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에 대한 충실한 독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이현우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이라크 : 빌려온 항아리>(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펴냄),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김성호 옮김, 창비 펴냄)와 함께 미국 주도 하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발생한 트라우마와 그에 대한 좌, 우 지식계의 다양한 대응 양식들을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출판된 것으로, 현실에 대한 긴급한 정세적 개입을 이론적 분석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9·11 테러 이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고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이 세계에 개입할 것인가? 지젝은 테러 이후 달라진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 워쇼스키 형제의 히트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에서 제목을 따온다. 영화에서 주인공(키아누 리브스)은 컴퓨터가 조정하는 가상의 현실에서 눈을 떠 세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황량한 세계를 본다.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진짜 현실"에 눈을 뜬 주인공을 위해 아이러니한 인사를 건넨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젝의 설명에 의하면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하다. "뉴욕 시민들은 실재의 사막으로 인도되었다." 여기서 실재의 사막이란 자본주의의 제국 미국이라는 상징적 대타자가 붕괴된 트라우마적 광경이다.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세 질서로 구성된 세계에서 실재가 돌아오는 트라우마적 순간이란 상징 질서의 결핍이 드러나는 파열구이자 상징적 동일시가 중단되는 파국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9·11 테러는 미국이라는 상징 질서가 실재에 의해 구멍이 뚫리는 트라우마적 사건이다.

트라우마에 대한 주체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환상의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트라우마를 일으킨 실재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트라우마적 충격에서 벗어하기 위해 편집증적 행동화에 빠지거나 냉소적 관용의 논리를 취하는 것이다. 과잉 행동이나 냉소적 관용은 방향은 다르지만 실재를 회피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전유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지젝의 분석에 따르면 역사상 처음으로 본토를 공격당한 미국은 새로운 양자택일의 선택에 직면했다. 미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는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를 포기하고 9·11 사건을 전 세계 자본주의의 적대라는 문맥 속에 위치시키거나, 아니면 미국의 권역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미국은 후자의 길로 나아갔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편집증적 행동화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어떤 적극적 행동을 취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 자신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한 무력한 행동일 뿐이다.

9·11 테러는 미국 내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유포하듯, 이슬람 문명이 기독교 문명에 일으킨 '문명 충돌 현상'이 아니며 근대 민주주의에 가해진 전체주의적 테러도 아니다. 탈레반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의 테러 집단을 키운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9·11 테러는 미국 자신이 만들어낸 과잉이 기괴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자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적대가 전치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9·11 테러를 제대로 대면하려면 테러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강요된 선택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적 적대라는 실재의 중핵을 정면으로 대적해야만 9·11 외상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진보적 열정이자 진리의 정치이다. 주의할 것은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의 적대적 대립이 구조적으로 부차적인 다른 현상을 통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그 과잉이다.

지젝은 오늘날 정치적 구분선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온건한 탈정치화와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역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이란 공간을 공백으로 남겨놓는 제도이다. 왕이 있던 자리를 비우고 선거를 통해 권력의 대리인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 민주주의적 선거는 이른바 법 앞에서의 평등을 통해 모두가 주인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선거 상황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일시 중지되고, 사회체는 숫자로 셀 수 있는 순수한 다중들로 환원되며, 사회적 적대 역시 중지된다.

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다. 그것은 사회의 기본적 적대를 부인하는 물신주의적 착각이다. 지젝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민주진창이며, 이 더러운 진창을 메우는 것이 민주주의의 외설적 과잉으로서의 부패이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모든 문제를 행정적 절차의 문제로 축소한다. 정치란 정확히 이런 축소에 대한 거부이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적 제스처가 우파 포퓰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이 민주주의의 곤경이자 역설이다.

지젝에게 이런 곤경의 탈출구로 요청되는 것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진정으로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를 감행하는 것이다. 라캉적 의미에서 행위란 주체에게 부여된 상징적 위임을 거부하고 상징적 세계로부터 자신을 철회하는 광기의 행위, 주체 자신의 일시적 사라짐을 포함하는 부정행위이다.

이를 통해 주체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상징 질서가 탄생한다. 그것은 혁명이 다른 이름이다. 지젝은 상징 질서로부터 급진적 철회와 분리라는 정신분석적 윤리를 알랭 바디우의 '빼기(subtraction)'의 정치성과 접속시킨다. 빼기란 "헤게모니 장으로부터의 빼기일 뿐 아니라 이 장의 진정한 좌표를 드러내면서 그 장 자체에 폭력적으로 영향을 끼지는 빼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서 이런 빼기의 행위를 시도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들을 모욕하고 굶기고 쫓아내는 싸움을 할 수 없다며 국가의 명령을 거부한 이스라엘 군인들이다. 이스라엘 점령 지역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감벤적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이다. 그들은 온전한 시민이 아니라 훈육적 처벌의 대상이거나 인도주의적 원조의 대상이다.

명령 거부자들이 달성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을 "호모 사케르에서 이웃"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진정으로 유대-기독교적 의미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을 호모 사케르로 처분하라는 국가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라는 구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젝은 이들의 거부가 "경험적 현실이라는 일시적 영역 속에 영원한 정의가 잠시 나타나는 기적적인 순간"이라고 말한다.

역사에서 이런 기적적 행위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폭력이란 무엇인가>(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난장이 펴냄)에서 지젝은 정의가 실현되는 이런 기적적 행위를 벤야민적 의미의 신적 폭력이라 부르며 그 계보를 작성한다. 그것은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에서 1920년대 초반 러시아 적위군의 테러, 십 수 년 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빈민가 군중들의 부유층 슈퍼마켓의 약탈과 방화 사건으로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는 시위대들의 몸짓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젝이 이런 신적 폭력의 계보를 쓰는 것은 실정적 법과 불법적 폭력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에서 벗어나 혁명적 폭력의 정치적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가 비폭력적 저항이라는 익숙한 도덕적 공리를 비판하며 해방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이유다.

문제는 신적 폭력이 그야말로 폭력 그 자체로 떨어질 가능성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젝은 무기력에서 비롯되는 맹목적 '행위로의 이행(passage to action)'과 혁명적 '행위'(act)를 개념적으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 양자가 그리 선명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젝에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마련되어 있다. 신적 폭력이냐 아니냐는 사실적 정확성에 의해 판별되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주체 자신에게 진리 효과를 낳는 자기 관계적 진리이다. 그런 까닭에 신적 폭력의 여부는 오로지 주체적 진리 효과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주체적 진리 효과가 그야말로 급진적 지식인의 주관적 소망으로 떨어질 때 좌파 정치학을 괴롭혀온 혁명 조급증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해방적 폭력에 대한 지젝의 과격한 수사가 매력적으로 들리면서도 충분히 설득되기 어려운 것은 그의 수사가 과격해질수록 현실적 대안과 미래적 전망은 점점 더 먼 곳으로 밀려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과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할 때 폭력을 불사하는 급진적 해방 정치에 대한 유혹은 커진다. 과격해지면 해질수록 더욱 더 비장해지는 역설, 혁명적 행위에 대한 좌파 지식인의 나르시시즘적 소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지젝이 왜 이런 과격한 해방 정치에 몰입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의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혁명적 과거에 대한 좌파의 향수어린 집착과 현실에 매끄럽게 적응해 들어가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양쪽의 덫을 피해가면서 해방의 잠재성을 부활시키려면 과거 혁명적 폭력의 불행한 운명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창안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더 나은 실패를 할 수 있는 정치적 모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폭력적 해방 정치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정치'(혹은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치안)와 '정치적인 것'의 지나친 분리가 혁명적 실천에 대한 서구 지식인의 (좌절된) 소망 충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로쟈는 지젝을 따라 읽긴 하지만 거슬러 읽거나 21세기 한국 사회라는 문맥 속에 맥락화시켜 읽지는 않는다. 지젝과 거리를 두려는 일각의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지젝에 대한 "충실한 읽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엔 지젝이라는 이름이 한국 지식계에 일종의 외상적 폭발물로 기능한다는 그의 판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절박함에 더하여 '제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까지 시달리며 뭔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분들은 한 번쯤 지젝을 읽으셔도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이 '이대로 곤란하다는 절박함'을 넘어 진정 '제대로 생각하는 법'을 안내해주는 지에 대해서는 좀 더 냉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적대와 그것의 전치 형태들에 대한 지젝의 분석은 조밀한 매개 과정을 거친 것이라기보다는 거칠고 수사적이다.

폭력을 무릅쓰는 혁명적 행위에 대한 그의 이론화 역시 혁명을 바라는 주관적 기대 욕구에 기초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지젝과의 더 깊은, 혹은 더 질긴 만남"을 위해서는 지젝이라는 이 유쾌 발랄한 이론가가 열어주는 사유의 폭발성을 길들이지 않으면서도 그를 거스르는 삐딱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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