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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이강훈이 성공하는 병원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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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브레인> 이강훈이 성공하는 병원의 미래는?

[기고] <브레인>이 명품 '의학' 드라마가 아닌 이유

드라마 <브레인>은 "명품 드라마" 찬사를 받으며 종영했다. 명품은 어느새 시청률이 낮아야 한다. 일부 언론의 보도를 검토해 보면, 월등한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의학 드라마는 불패한다"는 신조를 굳게 만들었단다. 포털 사이트에서도 따로 섹션을 만들고, 네티즌의 반응도 뜨거운 면이 있었다.

'하균앓이'라는 단어도 보인다. 이강훈(신하균) 캐릭터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여전히 이 드라마는 '의학' 드라마라기보다는 '의사' 드라마였다. 즉, 의학 드라마의 외피를 쓴 의사들의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주인공 이강훈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현실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이강훈의 트라우마와 그 치유를 합리화하는 성공 욕망의 충족이 문제다. 이는 <하얀 거탑>의 장준혁(김명민)보다 더 심각하다. 장준혁은 목숨을 버리며 자신을 반성했지만, <브레인>의 이강훈은 살아남아 모든 것을 가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드라마 <브레인>은 주인공의 가난 마케팅을 통한 성공의 열망을 일반 대중에게 감정 이입시켜 병원 자본과 공공 의료의 본질을 은폐한다. 논의를 위해 이강훈의 스토리텔링을 사회 인지 심리 차원에서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KBS

드라마 <브레인>에서 이강훈이 처음부터 끝까지 외치는 말은 "실력"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 외에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실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데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강훈은 실력을 강조하는 것인가.

드라마에서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중요하게 설정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브레인>은 프로이트적이다. 어린 시절의 외상이 사람의 이후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한다는 내용에서 그렇다. 이때 부모에 대한 기억과 상처는 직접적인데 이강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신이 무가치한 대접을 받으며 성장한 이강훈에게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최고의 실력을 갖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분야의 최고 실력을 가질 것인가. 그것은 의학이었다. 의학 중에서도 신경 의학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도 관련이 있었다.

어머니를 학대한 아버지이지만, 의료진의 과오로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이강훈의 삶은 더욱 불행해졌다. 하지만 의사들은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강훈은 그 과실을 따졌지만, 의사들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들은 이강훈의 뇌리에 강력한 트라우마를 형성시켰다.

트라우마는 때로 삶의 흐름을 추동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이강훈은 그냥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자신의 가난하고 불우한 삶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의학에서 찾았다. 또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신경 외과를 선택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이강훈은 울지 않는다. 자신의 상황에 몸부림을 치며 울어보았자, 문제와 모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집안은 가난했고 어머니는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했다. 아버지가 죽은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의사들에게 울음으로 호소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들(김상철)에게 의료적 과실이 없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강훈 스스로가 그들에게 도전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강훈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최고의 실력을 추구한다. 어머니도 자신을 지켜 보듬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위한 의학적 성공이 아니었다. 일단 의학적 성공을 통해 자신의 가정 배경을 탈색시키려 했고 어머니는 부정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묵살한 의사들을 이기기 위해 의료 실력을 연마한다.

이강훈은 이 때문에 인간성이나 예의범절은 무시한다. 인간성이나 예의범절을 잘 지킨다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장받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성이 나쁘고, 싸가지가 없다고 자신을 멀리한다고 해도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욕하는 이들도 결국에는 자신을 옆에 둘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특히 김상철이 이강훈을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젊은 날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김상철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책의 심리 때문에 결국 선한 인의(仁醫)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는 가식이었다. 결론에서는 김상철의 멘토링으로 이강훈이 소중한 것을 찾는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여전히 이강훈은 의학적 성공과 명예를 거머쥔다. 실제로 이러한 교훈을 얻는 이강훈은 얼마나 될 것인가. 공영 방송의 미봉의 봉합이다. 이강훈이 추구하는 실력은 고스란히 자신의 명예로 가겠지만, 그것이 환자에게 직결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실력은 돈 있는 자들을 위해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돈 있는 자들을 위한 병원의 탄생을 이강훈은 찬성할 것이다. 그것이 실력을 더욱 증대시키는 내적 동기를 유발하게 할 테니 말이다. 가난한 이강훈의 아버지도 치료비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전적으로 현재 한국에서 병원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드라마는 관심이 없다. 의사의 문제를 단순히 인의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을 뿐, 병원 자본 시스템이 수익을 위해 어떻게 환자들을 의료 사각 지대로 몰고 있는지 다루지 않는다. 즉, 병원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환자의 불편함과 대상화는 의료진 개개인의 품성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김상철과 이강훈의 대비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당연히 의료 시스템과 자본의 축적 구조에서 그것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만약 성공과 명예를 위해 치달아가는 이강훈이 영리 법인 병원의 문제를 다룬다면 즉각 응낙하거나 그 선두에 서서 진두 지휘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공공 의료의 치명적 붕괴를 말한다.

의사 송윤희는 직접 의료계의 현실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는데 제목이 <하얀 정글>이다. '하얀'은 의사의 가운을 말하고 '정글'은 전쟁터를 의미한다. 한국의 병원은 지금 수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전쟁터이다. 의사 개개인이 아니라 자본 집적과 그 증식의 병원 시스템은 환자를 하나의 숫자로만 파악한다.

그 가운데에 의료 지식이 수단화된다. 드라마 <브레인>에는 이런 점이 없다. 필요 없는 검사를 강요하고, 부당 청구의 사례만이 아니라 진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의 모습이 정면으로 다루어진다. 수익을 내기위해 '막가파'가 되어버린 병원들의 자화상이다. 이는 영리 법인 병원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그 선두에는 이강훈과 같이 전체 시스템은 보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관점만을 관철해 내는 의사들이 있다. 그런데 드라마 제작진은 물론 시청자도 이러한 점은 도외시 하고 일부 언론들은 개인주의적 트라우마의 치유와 욕망 충족적 성공이라는 도식으로 명품 운운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간 의학 드라마를 표방한 의사드라마들이 공통적으로 간과하거나 호도하는 점들이다.

병원이 단순이 개인들의 성공과 사랑의 관점에서만 그려질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이런 콘텐츠들이 병원 민영화라는 공공 의료의 붕괴를 암묵적으로 조장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의사들에 대한 성공적 선망은 공공적 성격을 간과하게 하고 실력의 논리는 시장 경제와 경제적 수익의 논리를 의학적 발전의 당연한 논리로 합리화 정당화하는 무의식을 형성시키기 때문이다.

종영된 드라마 <브레인>이 남긴 과제는 여전히 의학 드라마를 표방한 '의사 드라마'가 아니라 '의료 드라마'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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