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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친일파의 대한민국 지배가 시작되다!

[해방일기] 1947년 1월 18일

1947년 1월 18일

철도 운임이 또 올랐다. 1월 15일부로 3등 여객 운임을 킬로미터 당 40전이던 것을 1원으로 하는 등 2.5배로 올린 것이다. 작년 3월 25일에 두 배로, 5월 1일에 다시 두 배로, 그리고 12월 1일에 또 두 배로 올린 것이었으니, 1년이 안 되는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스무 배 올린 것이다. 특히 최근의 두 차례 인상은 불과 달포 사이에 다섯 배를 올린 것이다.

인플레 상태에서 공공 요금은 인상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보통이다. 철도 운임이 1년 사이에 스무 배 올랐다면 일반 물가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올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임금 인상은 그에 영 미치지 못한다. 가장 우대받는 직업이던 공무원(군정청 직원)의 경우 1946년 11월 26일 발표된 봉급 인상계획에서 1947년 중 대략 100퍼센트 안팎의 인상을 예정하고 있었다.

1월 13일자 일기에 소개한 군정청 상무국의 일개 계장 정명채의 독직 사건을 다시 살펴보자. 쇠가죽이라는 일개 품목의 배급을 갖고 4개월 동안 600만 원 이상의 뇌물을 긁어 들인 사건이다. 시가와 배급가 사이의 차액 중 3할을 뇌물로 받았다고 하니, 뇌물을 공여한 11개 업자와 정명채가 쇠가죽에서 뽑아낸 부당 이득은 2000만 원이 넘는 것이다.

시가와 배급가 사이의 차이가 쇠가죽 한 품목에만 있었을 리가 없다. 수많은 배급 품목에서 부당 이득이 발생했는데, 어쩌다 한 모퉁이가 드러난 것이 정명채 사건이었다. 부당 이득은 사업자와 관리 사이에서 분배되었고, 분배가 원활하면 드러날 일이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 '모리배'가 친일파, 민족반역자 못지않은 인민의 증오 대상이 된 것은 극심한 민생고에도 원인이 있었다.

미군정의 '조선인화(Koreanization)' 정책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거니와, 인민의 증오를 회피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진주 후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에서 조병옥과 장택상을 등용해 다른 어느 부문보다 경찰에서 조선인화를 먼저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미군정의 조선인 채용에는 인민에게 해로운 정책을 집행할 하수인을 확보하는 의미가 있었다.

1946년 말 좌우합작위가 주도한 조미공위는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경찰을 위시하여 탐관오리와 부정직한 통역관의 협잡 등 잘못된 '조선인화'를 군정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무늬만 '조선인'이지, 민족의식도 없고 도덕성도 취약한 집단이 경찰과 공무원으로 대거 임용되었기 때문이다. 질 나쁜 사람들이 미군정의 선택을 받는 '그레셤의 법칙'이 적용된 것은 무엇보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조선 실정을 잘 모르는 채로 반공주의에 휩쓸린 결과였다. 조병옥의 등용에 결정적 작용을 하는 등 군정 초기에 큰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진 조지 윌리엄스 소령에 대해 브루스 커밍스는 이렇게 적었다.

윌리엄스는 조선 정치에 대해 매우 확고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1945년 10월 13일 점령군 사관(史官)과의 회견에서 그는 자신의 인물 선택에 대한 반대에 진력이 났다고 불평했다. "신뢰할 만한 많은 조선인 명사들"의 의견을 듣고 정승영이란 사람을 어느 자리에 임명했다고 했다. 그런데 정승영이 '악명 높은' 일본 교정 기관에 거액을 기부한 마약 범죄단 두목이라는 조선인들의 항의가 즉각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스는 해방 조선에서 중립성이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독종 급진파와 민주주의자", 두 개 집단만이 존재하며 그중에서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개명된 생각을 가졌던 미군장교 레너드 버치는 조선인의 해방 전 경력에 신경 쓰는 미국인이 거의 없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58쪽)

윌리엄스 소령에 관해서는 1945년 10월 13일자 일기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해방 전 공주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조병옥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자랐다.) "신뢰할 만한 조선인 명사"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 인물이 마약범죄단 두목이었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서 애초에 추천한 조선인 명사가 과연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스는 자기 판단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경찰도 미군정의 휘하에 있었지만, 그 성격에 다른 부서와 차이가 있었다. 1946년 11월 26일 군정청의 직원 감축과 봉급 인상 계획에 따르면 중앙청 인원 4319명 중 1407명을 감원한다고 했고, 지방청 인원도 중앙청 인원과 대략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1946년 11월 26일자) 경무부 외의 군정청 직원은 중앙과 지방을 합해 1만 명이 안 되었다.

그런데 당시 경찰 인원은 약 2만5000명이었고, 경무부에 소속된 미국인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경찰은 그 규모 때문에도 미군이 직접 관리하기 힘들었다. 조미공위에서 경찰의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매글린 고문도 그 지적에 동의했는데도 조병옥-장택상 체제를 바꾸지 못한 것은 미군정 고위층이 엄두를 낼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1946년 10월에서 11월에 걸쳐 시행된 군정청의 '조선인화'는 그 1년 전 경찰의 조선인화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경찰의 조선인화는 공권력 확대라는 물리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 점령이 길어지면서 미국과 미군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조선인화가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행정부서의 조선인화와 함께 입법의원 설치도 넓은 범위의 조선인화를 위한 것이었다.

김상태는 서울대 박사 학위 논문 "근현대 평안도 출신 사회지도층 연구" 제3장 제2절에서 군정청 고위직 조선인의 출신과 성향을 분석했는데(105~124쪽), 국-과장급 중간 관료층에는 총독부 관료 출신의 비중이 큰 반면 부-처-차장급 최고위층은 대부분 관계 외부의 지식인이 충원된 사실을 지적했다. 관료 출신의 정치적 성향은 좁은 범위에서 예측이 가능한 것인데, 이 최고위층이 군정청 조선인화의 주인공으로서 큰 변수였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인과 미국 유학자가 우대받은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구체적 분석도 필요 없다. 김상태의 연구에서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하지의 통역관 이묘묵과 인사행정처장 정일형을 중심으로 '평안도', '영명학교', '연희전문', '흥사단' 등 키워드가 부각되는 과정을 밝혀준다.

1947년 2월 안재홍의 민정장관 취임으로 군정청의 조선인화가 한 차례 매듭을 짓게 된다. 그런데 안재홍은 기존의 조선인 고위 관리들과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을 조선인 최고위직인 민정장관에 앉힌 것은 군정청 조선인 관리들의 편향성을 보정할 필요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반공 태도에 있었다. 안재홍 취임 직후에 있었던 일을 김상태는 이렇게 적었다.

정일형의 회고에 의하면, 1947년 2월 취임한 안재홍 민정장관이 자신을 불러 이북 출신 인사만 등용한다고 문책하였다. 그 무렵 미군정청 안팎에서는 평안도 출신, 흥사단 출신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비판적인 언사들이 나돌았다. 급기야 군정청 내의 이북 출신 인사 수를 조사하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이북 출신 인사들을 망라한 만찬회를 조직하여 친목 도모와 반공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16~117쪽)

안재홍의 등용은 미군정 입장에서 군정청 분위기를 조선 민의에 접근시키려는 가장 뚜렷한 조치의 하나였다. 민중과 민족에 겉도는 반공-친미 경향의 엘리트 집단과 좌우합작론자 안재홍 사이의 갈등은 이후 1년 반 동안 미군정 전개의 하나의 축이 된다.

당시 사람들의 이목은 미소공위 재개 여부와 반탁 문제에 쏠려 있었다. 1945년 연말에 격렬하게 터졌던 반탁 운동의 1주년을 맞아 우익에서 반탁 운동 재개 움직임이 있던 차에 1월 11일 하지의 서한 공개로 긴장이 고조된 것이다. 1월 16일에 민전 등 28개 좌익단체협의회에서 성명서가 나왔고, 민주의원 등 35개 우익 정당-단체도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하지 사령관도 선동적 반탁 운동에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는 성명서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사람들은 조선 독립이 지연된 것을 잘 알고 이에 중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동시에 조선 독립 촉진을 위하여 일층 더 노력하고 있다. 지금에 있어서 이미 조선 사람은 독립을 요망한다는 시위나 소요는 필요가 없다.

남조선에 있는 일부 오도를 받은 정당의 경솔한 행동은 조선 문제에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의 친선을 이간하고 또 그 국가들로 하여금 조선 민족은 그 자주 독립을 완성시키려고 조직된 기관에 협력하지 아니하므로 조선은 독립할 준비가 되지 못하였다는 관념을 주게 될 것이다. 조선에 관하여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본관 및 미국민은 조선 독립의 호기를 잃은 조선 사람들의 불온한 시위와 행동에 대하여는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본관은 모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노력을 다하겠다. 그러나 조선 인간의 무질서, 폭행, 악질 선전은 조선 독립을 약속하여 준 제국가로 하여금 그 동기를 의심케 하고 조선민족의 대망인 자주독립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언하거니와 오도된 조선 단체들의 경솔한 행동은 장래 국제회의에 있어서 조선 전도에 유해할 것이다." (1947년 1월 17일자 각 신문)

우익 성명서의 강경한 태도는 이런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신탁은 조약도 법률도 아니고 오직 강압인 것이며 신탁은 대서양헌장 제3조에 저촉된 것이며 세계헌장 제77조 중 ABC 3항목 중 어느 항목에 비추어 보아도 한국에 적용될 조건이 없다. 이와 같이 헌장에 위반되는 신탁 제도를 헌장을 준수하려는 한국에 강요하려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도 이에 더 심한 자가 없을 것이다. 만일 무력으로써 강요한다면 그것은 모스크바 4국 헌장 제6항에 위반될 것이며 금차 대전의 목적과 원칙을 취소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종래 국제 선언에 상반되는 것이다.

(…) 묻노니 연합국은 한국 내에서 소수의 찬탁자 즉 독립운동계의 반도만을 상대로 하여 소위 임시 한국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려는가? (…) 만일 이렇게 구차하게 신탁을 접수시킨다면 그것은 한국 내에서는 실시될 가능성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것은 1년 유여의 장구한 세월을 경과한 금일에 있어서도 미소공위의 재개가 무망하다는 것으로 보아도 신탁이 여하히 한국에 부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견결한 민족적 정기의 발동으로써 신탁 제도의 취소를 미-소-중-영-법 5개국 정부 및 인민에게 요망하는 동시에 대내 태도로는 신탁 제도의 실시를 준비하는 여하한 기구에도 참가하지 않을 것을 성명하는 바이다." (1947년 1월 17일자 각 신문)

더욱 강경한 것은 좌익 성명서였다. 하지는 미소공위 제5호 성명서(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내용)에 서명만 하면 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그 밖의 반탁 운동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물러섰다. 협의 대상으로 인정된 개인과 단체라도 무조건적인 반탁 주장 등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할 수 없으며 그럴 경우 제외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좌익 입장에서 반가운 양보였다. 그런데 1월 16일 좌익 성명서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반탁 세력은 서명 자격도 없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의 양보를 발판으로 더 유리한 국면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미소공위 성공을 간절하게 바란 입장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극단적 태도였다.

"과연 5호 성명에 서명한 자의 其 전부가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성의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말로써 아니다 주장하기보다는 조선의 전 반동 其 자신들이 5호 성명 후에 있어서 행한 반 삼상 결정의 생생한 행위로써 서로 증명되지 않는가? 5월 20일 '독립 전취 대회'의 적극적 교사 선동을 비롯하여 최근 이승만 박사가 삼상 결정 전복을 위하여 도미함에 있어서 전 반동 진영이 일치하여 찬양 지지한 상반되는 이유와 및 금반 발표에 있어서 민의 비국 등 30여 단체의 5호 성명서 서명 반동 단체가 반탁을 떠메고 반 삼상 결정을 적극적 교사 선동한 것을 보아 어떻게 5호 성명에 서명한 자는 모두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성의를 성명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지 장군의 주장은 완전히 조선 현실을 무시함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삼상 결정을 지지한 자를 협의의 대상으로 한 원칙을 명실공히 승인하여 이것을 조선의 현실에 성의 있게 적용하면 치스챠코프 장군의 제의에 완전히 일치될 것이며 이 원칙 위에 공위를 즉시 속개하여 이 공위의 사업을 순조로이 진행시키고 삼상결정을 완전히 실천할 것을 희망한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1월 16일, 1월 18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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