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있다. 우리나라는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워낙 빠르기에, 어느새 프로이트는 제대로 소화를 해보지도 못한 채 새 학문과 이론이 내세우는 프로이트의 업적에 대한 교묘하고 노골적인 부정과 정신 분석에 대한 폄하를 패키지로 같이 받아들이게 된 면이 있다. 그리고 어느새 이것이 프로이트에 대한 대중적 정서가 되었다.
그런 차에 드디어 발간된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평전(Freud : A Life for Our Time, 한국어판 <프로이트>(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은 1988년 초판이 나온 후 무려 23년 만에 한국어로 지각 번역되었지만, 든든한 구원군의 등장만큼 반가운 일이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조망한 책은 수없이 많이 나왔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영국의 정신분석가 어니스트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모두 3권으로 발표한
프로이트는 유명해지기도 전인 1885년 벌써 14년간의 모든 메모, 편지, 논문 발췌문, 작업 중 원고를 일차로 없애버렸고, 이후 같은 자료 파괴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남에게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생전의 프로이트의 태도를 익히 보아온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에 아무리 용기를 내 전기를 써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가 내린 무언의 지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정신 분석의 당파성에 입각한 자기 검열을 거친 책일 수밖에 없다.
▲ <프로이트 1>(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 ⓒ교양인 |
본문에 나오지만 특히 초기 정신 분석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빌헬름 플리스와 주고받은 편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편지는 플리스 사후 미망인이 팔아버렸고, 다시 매물로 나오자 프로이트가 구매해서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후원자 마리 보나파르트가 고가에 구매해서 프로이트 사후 일정 기간까지 보관하기로 약조를 했는데, 그 덕분에 우리가 프로이트의 속내를 알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움은 있었다.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의 저작물을 관리하는 뉴욕의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카이브'의 관리자에게 아직까지 제한되어 온 자료를 공개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이 '프로이트가 공개하지 않으려는 것은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매우 엄한 태도를 유지하였기에 제한된 면이 있었다는 어려움을 게이는 후기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제한점이 이 책의 가치를 치명적으로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만큼 현재 시점까지 공개된, 확인 가능한 프로이트와 관련된 자료와 그가 남긴 문건을 씨줄날줄로 통합적으로 묶어내면서 통찰적 시각을 제공하는 책은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당시 유럽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의 시점마다 프로이트의 관심사가 바뀌어나가면서 정신 분석 이론이 성숙해가는 과정도 함께 풀어냈다. 또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가 딸 안나 프로이트를 분석한 것, 환자를 초대해서 식사를 한 것 등 프로이트 자신이 세운 정신 분석 치료의 규칙을 깬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이렇듯 최대한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정신 분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프로이트의 생애뿐 아니라 이론의 발전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쳐내고 있다. 읽는 내내 흥미가 유지될 뿐 아니라, 정신 분석 이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피터 게이는 몇 가지 큰 흐름으로 프로이트의 삶을 분류하여, 1100쪽에 이르는 두꺼운 두 권의 책속에서 그것을 일관성 있게 풀어내고 있다.
첫 번째, 프로이트는 19세기 중반에 의학 교육을 받았고 초기에는 신경 생리와 같은 당시로서는 첨단 과학에 매진했다. 그가 에른스트 브뤼케의 연구소에서 일을 하던 1878년 쓴 '칠성장어의 척수 신경절과 척수'라는 논문은 당시로서 상당히 파격적일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일 그가 계속 그쪽 연구를 했다면 아마 세계적 명성을 정신 분석을 통해 얻은 것보다 빨리 얻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프로이트는 생애 내내 일관되게 '과학자'로서의 태도를 유지했다. 그에게 정신 분석은 현대인들이 바라보듯이 인문학적 소양 중 하나가 아니라, 그가 가진 최대의 의문인 '인간의 뇌와 정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이었다. 1932년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 대해 "과학의 한 조각이며, 과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면 된다"고 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프로이트는 철학과 인문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고 있었다. 1896년 한 편지에서 "생리학자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는 중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원래 목적, 즉 철학에 이르고자하는 희망을 아주 은밀하게 품고 있다"고 썼다. 그에게 철학은 정신의 과학적 이론에 구현된 과학적 경험론이었다. 그는 "나는 철학적 통찰을 향한 갈망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했네. 나는 지금 의학에서 심리학으로 방향을 틀어 그 갈망을 충족시키는 중이야"라면서 마흔 살이 된 자신을 돌아봤다.
두 번째, 끝없는 자기 부정과 변화·발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보통 한 사람이 하나의 큰 깨달음이나 새로운 발견을 하고 나면 그것을 깊고 넓게 파헤치는 데 매진하기에도 일생이 모자라다. 그리고 이론의 성숙기가 지나고 나면 자기 이론을 '방어'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프로이트는 달랐다. 초기에 프로이트는 신경증 치료의 새로운 방법론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가서 마르틴 샤르코를 만나 최면술을 배웠다. 그로부터 신경증 치료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얻고 돌아왔지만 브로이어와 함께 1895년 <히스테리 연구>를 발간할 때에는 최면술이 아닌 '자유 연상'을 통한 '말로 하는 치유'가 암시와 최면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추구하는 바를 바꾼다.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트라우마가 되는 기억을 의식화하면, 그로 인해 생겼던 증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정동-외상 이론'의 시기를 시작한 것이다. 무의식의 존재, 자유 연상과 말로 하는 치료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평생의 업적이 될 텐데, 프로이트는 곧 지형학적 이론으로 넘어가 '의식-전의식-무의식'으로 의식 세계를 구분하고 방어에 대한 이론을 개진했다. 그리고 과거의 트라우마 기억이 현실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유아기의 기억의 변형일 수 있다는 '정신적 현실'의 중요성을 깨닫고 과거의 이론을 부정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게 된다.
<자아와 이드>를 발간하는 즈음부터 그의 관심은 더 이상 외상 기억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그의 관심은 자아와 초자아, 이드와 관계를 중심으로 한 자아 심리학의 관점으로 진화·발전한다. 그리고 정신 분석 이론을 신경증 치료를 위한 방법론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정신 세계를 설명하는 더 큰 틀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도라'의 사례와 같이 실패한 치료 예도 과감히 발표하면서, 학자이자 임상가로서 솔직한 면을 드러냈다. 그리고 실패를 통해 '전이'의 개념을 찾아내고, 전이를 다루는 것이 정신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세 번째, 피터 게이는 이런 이론의 발달뿐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그는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강했고 비판에 민감했으며 도전자에게 가혹했다. <꿈의 해석>을 발간하고 난 다음에 대중과 학계의 큰 호응을 얻기를 원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큰 실망을 보였다. 노벨상을 타고 싶다는 은근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으며, 이론에 대한 비판을 받는 바람에 의과 대학의 교수가 되는 과정이 다른 동년배에 비해 많이 늦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정교수가 되는 과정을 밟았다. 다행히 1924년 <타임> 표지 모델로 선정되고 영국 왕립 의학회 회원으로 인정되는 등, 프로이트의 삶은 정신 분석의 대중화와 함께 보상을 받게 된다.
한편, 그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가혹한 면이 있었다. 그와 학문적으로 대립하는 이들과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갈등을 갖거나 헤어짐을 반복했다. 초기의 중요한 동료이자 후원자였던 브로이어,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가까웠고 많이 의지했던 플리스와도 끝내 결별을 하였다. 또 정신 분석의 초기 제자이자 동료인 아들러, 슈테켈 및 한때 후계자로 인정했던 융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가 "친구들과 반드시 깨진다"는 비난에 민감했다고 하며, 그가 나름대로 해명하는 글을 쓴 사실도 소개했다.
이런 세 가지 흐름 이외에도 이 책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무척 방대한 책임이 분명하다. 기초적인 정신 분석과 유럽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책을 완독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할 위험이 존재한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이 두 권을 읽는 일은 프로이트의 생애, 정신 분석 이론과 발전에 대한 상당히 상세한 이해, 20세기 초반 유럽의 정황, 비엔나의 유대인의 삶의 풍경을 알아가는 네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시도가 될 수도 있다. 용기를 가져보시기 바란다.
나도 과거 영문판으로 산 뒤 발췌해서 읽었던 책을 이번 기회에 다시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새로운 각도에서 알게 되었다. 독자들에게 이 서평이 두 권의 두꺼운 책이 베개나 책장 장식으로 머물지 않을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감히 비유하자면, 프로이트가 인류의 무의식의 세계에 불을 비춘 등대가 되었듯이.
같이 읽으면 좋을 책 <리딩 프로이트>(장 미셸 키노도즈 지음, PIP정신분석연구소 옮김, 눈 펴냄) 국제 정신 분석 학회에서 발간한 새로운 정신 분석 교과서 시리즈의 하나로, 프로이트의 모든 저작물을 연대기 순으로 짧게 요약해서 정리하고, 모든 글의 의미를 주해를 달고, 현대적 시점에서 갖는 의미를 개괄하였다. 프로이트의 전작물을 한 눈에 파악하기 좋은 책. <프로이트 이후>(스테판 밋첼·마가렛 블랙 지음, 이재훈·이해리 옮김, 한국심리치료연구소 펴냄) 프로이트 이후의 현대 정신 분석 발달을 개괄한다. 프로이트 이후의 자아 심리학의 발달, 클라인 학파, 영국의 대상관계 이론, 자기 심리학등에 대해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썼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