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영어를 중심으로 우리 근대사를 훑어 본 김영철의 <영어 조선을 깨우다>(전 2권, 일리 펴냄)에 인용된 이완용의 연설(1896년 11월 24일자 <독립신문>에 수록) 가운데 일부인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른바 "영어파" 최고의 시절은 아무래도 이완용이 조선 독립을 부르짖던 바로 이 무렵이었던 듯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완용은 일본어보다 영어를 훨씬 먼저 배운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1886년에 설립된 "왕립 영어 학교" 육영공원의 1기 입학생이었으며, 입학 후 얼마 있다가 주미 공사를 따라 미국에 건너가 대리공사 자리까지 올라갔다. 이완용은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귀국 후 "미국통"으로서 정부 요직을 맡았고 독립협회에도 관여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했다가 미국 시민 필립 제이손이 되어 귀국한 서재필이 창간했다. 이 무렵에는 조선에서 영어를 배운 첫 세대들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주미 공사관 출신인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이 모두 <독립신문> 창간의 "결재 라인"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꼽히는 <독립신문>은 영어판도 발행했으며, 그 내용에서 민권, 법치주의, 주권 수호 등 근대적 가치를 옹호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그 이상적인 모델은 미국이었다.
권력의 핵심부를 맴돌던 이완용과 근대적 가치를 앞세우고 국민 계몽에 나섰던 미국 시민 서재필은 "영어파" 또는 "친미파"로서 만날 수 있었으며,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위에 인용한 이완용의 연설이다. 저자는 영어파가 권력에서나 계몽에서나 가장 큰 힘을 휘두르던 이 시절에 영어가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부각되어 젊은이들이 "영어에 대한 욕망"을 품게 되었으며, 이것은 이전에 영어를 배우던 학생들이 "말만 통하면 출세하는 세태를 쫓은" 것과는 다른, 새롭게 깨인 "욕망"이었다고 평가한다.
▲ <영어 조선을 깨우다 1>(김영철 지음, 일리 펴냄). ⓒ일리 |
이 책에 따르면, 영어=미국=근대적 가치/독립이라는 환상은 그로부터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핵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이완용의 주군인 고종이었다. <해국도지>, <조선책략> 등 중국계 저술 등을 통해 "공평한 나라 미국", "연합해야 할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고종은 이런 이미지에 강한 영향을 받아 미국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미국인들을 가까이 하고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으며, 육영공원을 세우는 등 영어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과연 미국이 고종의 독립을 위한 노력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어=미국=권력이라는 등식이 이때부터 확정된 것은 확실하다.
<독립신문> 이전에 영어나 미국을 근대적 가치와 연결시키려고 한 또 한 집단은 서재필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개화파였다. 갑신정변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도움을 얻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김옥균이 미국의 사절이나 영어 교육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며,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는 일을 적극 추진하는 등 미국 문물과 직접 접촉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 또한 분명하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 했던 서재필 등이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함으로써, 기왕의 개화파적 정신에 미국이 구현한다고 여기는 가치를 결합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근대적 가치=미국적 가치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미국을 이상화하는 계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독립과 근대적 가치를 대체로 동일시했던 환상은 19세기 말에 정점을 찍은 뒤, 일제의 조선 강점 추진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방관으로 붕괴되고 만다. 그와 더불어 서구적 또는 미국적 근대화라는 환상의 우산 밑에 함께 모여 있던 "영어파" 또한 독립협회 해산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계기로 흩어진다. 이완용처럼 친일로 돌아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육영공원 출신으로 영국 공사관에 근무하던 이한응처럼 자결을 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또 윤치호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일본 침략 옹호에 반발하여 친미에서 반미로 돌아섰다가, 1930년대에는 반미를 일제의 아시아주의와 연결시키며 친일로 돌아선다.
따라서 이때부터 "친미파" 자체는 권력으로부터 멀어진다. 그와 더불어 영어 또한 권력으로부터 멀어져야 마땅할 터인데, 놀랍게도 이 땅에서 영어 학습 열기는 식기는커녕 오히려 뜨겁게 불타오른다. 저자는 그 이유를 미국에 대한 이상화의 유지와 입시 두 가지에서 찾는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도 1930년대 이후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를 제외하면, 근대적 가치와 미래의 번영의 상징이라는 미국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이는 신소설만이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에서도, 또 많은 언론 보도에서 미국 유학이 젊은이의 미래의 이상적 경로로 제시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더라도 다수가 영어를 전공하였는데, 예를 들어 1926년에는 일본유학생 가운데 영어 전공자가 25퍼센트를 차지했다. 미국은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여, 1916년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 영화의 점유율은 85퍼센트가 넘었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하면서 이 땅에서 "미국에 대한 친밀감"은 해방 후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고종 때 형성되었고, 이것이 "일제 치하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른 요인들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미국의 이상화된 지위는 미국이 일제의 조선 강점을 묵인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미국의 그런 지위 유지를 일제가 우민화 정책과는 관계없이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했다는 느낌까지 든다는 점이다(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강점기 말기는 예외지만). 아무래도 민족과 근대적 가치가 복잡하게 얽히는 이 지점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듯하다.
실제로 저자는 경성제대 입시에 영어 과목이 들어간 것을 이 땅에 영어 공부의 열기가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로 지목하고 있는데, 자세한 경위는 안 나와 있지만 이 또한 일제와 관련이 없이 결정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1920년대 중반 이후 상급 학교 진학이 입신양명의 새롭고 유일한 출구로 자리 잡으면서 입시 과목에서 영어가 중요해졌으며, 상급 학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제대의 입시는 이른바 "입시 산업"을 일으키고 또 그 산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모든 고등 보통 학교에서 영어를 필수로 가르치게 된 것도 경성제대 입학시험에 영어 과목이 포함되면서부터였다. 영어가 처음 조선에 들어올 무렵 관리로 출세하는 길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영어 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식민지 조선에서도 영어가 신분 상승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영어 열풍이 불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한 걸음 나아가, 시험으로 인해 영어 열풍을 불면서 영어 교육 또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시험 영어", 즉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기능을 잃어버린 영어가 공교육에서 지배적인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 전체에서 영어 교육과 관련하여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영어 교육과 그 방법에 관한 관심을 되풀이하여 환기하는 것은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그것은 가장 초기에 미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방식, 즉 벌리츠의 직접 교수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원어민이 오직 외국어만 사용하여 외국어를 가르치는 교수 방법이다. 이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소규모 집단에서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것이 전체 공교육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질 때, 또 외국어 학습 이외의 분야로 확산될 때도 가능한가, 또는 최적의 방법인가 하는 것은 더 생각해볼 문제다.
예컨대, 저자도 이야기하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영어 교육이 배재학당 같은 일반 학교로 확산되면서 바로 조선인 영어 교사가 투입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직접 교수법은 실행이 불가능했다. 비단 먼 과거의 예가 아니라도, 어떤 면에서는 직접 교수법의 확장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영어 몰입 교육"이 최근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좌초한 것은 이런 교수법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 사회에 그런 식의 대규모 "영어 몰입"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나 문화가 아직 건강하고 힘이 있다는 증거라는 이야기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19세기에 영어가 이 땅에 상륙한 이래 21세기에 이른 이 시점에 영어 학습은 그야말로 "광풍"에 이른 느낌이다. 저자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우리나라 영어 사교육비 규모는 연간 15조원으로, 이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1.9퍼센트, 전체 교육 예산의 47.5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자체로도 엄청나지만, 이것이 미국 이상화나 시험 영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일본과 비교할 때 개인당 7.4배나 높은 규모라는 것은 우리의 근대화가 밟아온 경로를 다시 되짚어보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며, 바로 이렇게 되짚어 보려 할 때 이 책이 차지하는 자리가 더욱 커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영어야말로 우리 역사와 밀접하게 결합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도 이 땅에서 그 어느 언어보다 권력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매우 정치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영어를 심상하게 배울 수 있는 단순한 외국어 수준으로 강등시키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라 전체의 역사적 과제가 되어버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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