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강사가 종교적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모든 강사들이 다 그이처럼 참선으로 고통을 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이 그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모두의 고통을 낳는 불의한 사회 구조에 어떻게든 맞서보는 것이 좀 더 불교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헌데 불교에서는 이런 식의 물음이 잘 제기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반대다. 이를테면 한형조는 불교 개론서 <붓다의 치명적 농담>(문학동네 펴냄)에서 혼란과 갈등이 넘치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역사는 외부적 변화를 통해, 가령 전쟁과 정변, 혁명과 개혁들이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시, 문제의 근본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전쟁과 정변이야 말할 가치도 없다 치고, 혁명과 개혁 없이 마음만 닦아도 되는 걸까? 한형조가 "세상이 불완전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린 탓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이 평온해집니다" 하자 한 학생이 "그럼, 이 혼탁하고 불행한 세상을 그냥 두잔 말이냐"고 묻더란다. 한형조는 별다른 대답 없이 독자들에게 화두를 넘긴다. "저는 아직도 답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물음은 다시 남는다. '불교는 우리에게 내면을 바라보는 지혜 이외에 세상을 바로 보고 폭력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지혜도 가르쳐주는가?' 이 물음이 필요한 것은 불의한 세상과의 마찰을 피해 마냥 내면으로 파고드는 종교가 나약한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지배 권력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교는 바깥을 기웃거리지 말고, 우선 안을 다스리라고 권합니다"라며 불교가 내면 수양을 강조한다고 말하는 한형조는 같은 페이지에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성취에 불안감을 느끼거나, 그 대결과 정복의 와중에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아소카 왕이나 전두환 등을 그 사례로 든다. 이쯤 되면 "안을 다스리라"는 불교의 권면은 경건함보다는 몰상식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전두환 마음이나 문질러주는 불교라면 그런 불교를 뭣에 쓸 것인가.
앞의 강사 이야기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2>(한겨레출판 펴냄)에 실린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없는 한국 선(禪)'이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소련의 학생 시절부터 불자로서 살아온 박노자는 가까운 지인이었던 그 강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불교적 수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를 개인적 정화의 기술로 인식했던 내가, 남을 위한 투쟁도 불교적 행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차츰 갖게 된 것이다."
▲ <붓다를 죽인 부처>(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
그는 '모든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불교의 교리를 '고통의 상호 연관'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려 한다. "나와 너, 세계가 따로 없으며 모든 것이 상즉상입(相卽相入, 모든 현상은 상호 융합되어 있고 인과 관계를 이룸)한다는 불교적 진리의 차원에서는 머나먼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간 아이들도 바로 우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도 바로 우리의 고통"이다.(11쪽)
이렇게 볼 때 수행도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띠게 된다. 수행이란 "우리의 아상·아집에 대한 부정과 해체며, 거기서 시작되는 국가와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 해체의 작업"이어야 한다.(12쪽). 해탈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 크고 작은 활동들은 함께 해탈하기 위한 수행의 일환이다.
지배 권력에 순응하는 한국 불교의 성격을 '호국 불교'라는 말로 상징할 수 있다면, 이에 반해 박노자는 위와 같은 구상을 (아마도 남미 '해방 신학'에서 힌트를 얻은 듯) '해방 불교'라는 이름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해방 불교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서언'에서 이런 해석의 기획을 읽고서 본문으로 들어가면 그 기획을 구체화시켜줄 내용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본문에서 박노자는 불교 종단 안의 여성 차별(2장)과 비민주적 측면(6장)을 지적하고 이런 권위적 요소들이 불교 안에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추적한다. 또 불교의 기복신앙과 불상(佛像) 숭배가 어떻게 국가 권력에 의해 이용당했는지(3, 5장), 평화의 종교인 불교 안에 어떻게 군사주의가 스며들었는지(7장) 역사적으로 살핀다.
또 원효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형이상학이 억압적인 현실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으며(8장) 불교의 윤리적 상대주의가 비판 의식을 무디게 하는 측면이 있다(4장)는 것을 짚어준다. 그리고 사회의 집단적 욕망,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대해 불교가 어떻게 응해야 할 것인지(1, 9장)에 대한 고민을 제시한다.
모두 흥미로울 뿐 아니라 저자의 진지한 문제의식을 내비치는 내용이다. 다만 박노자는 '호국 불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역사학자의 매서운 시선으로 해부하기는 했으되, '해방 불교'를 새로이 재구성하려는 '서언'의 기획은 아직 손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책을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10쪽)라고 규정했는데, 본문에 '초기 불교'는 보이지만 '해방적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박노자는 "그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해방적 색깔'이 뚜렷"했던(279쪽) 초기 불교의 모습을 (오늘날의 '호국 불교'와 대비시켜) 보여주는 것이 그 자체로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초기 불교 텍스트에서 우리에게 딱 맞는 '맞춤형 행동 지침'을 발견하기란 어렵"다.(39쪽) 그러니 초기 불교로 돌아가는 것이 해석의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호국 불교'가 아닌 '해방 불교'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불교를 재해석해야 할까? 박노자는 이렇다 할 대답을 주지 않는다.
불교의 정신과 사회과학의 방법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주장(13쪽)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주장뿐이다. '서언'에서 박노자는 우리 사회가 겪는 고통이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집단적 악업의 업보"(11쪽)라고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불교는 자(自)와 타(他), '나'와 '사회'를 고정되고 완벽하게 구분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25쪽)는 철학적 기초 원리만 동어 반복될 뿐이다.
해방적 해석을 위해 '자타불이'(自他不二), '자리이타'(自利利他), '상의상조'(相依相助) 등의 기초 원리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런 원리들이 아직 구체적인 사회과학적 내용을 얻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석의 원칙과 방법론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만 제시된다면 그 의미는 해석하는 이들의 기호에 따라 전혀 다른 뜻으로 우왕좌왕하기 일쑤이다.
이를테면 박노자는 '나와 남의 경계가 따로 없다'라는 불교적 원리가 서구 근대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한다고 보면서, 이 원리를 '나와 너의 고통이 별개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른 실천적 방향을 이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박노자도 모를 리 없겠지만) 교토 학파의 철학자 니시타니 게이지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이 1940년대 초에 나눈 대담을 묶은 <태평양전쟁의 사상>을 보면, 같은 원리가 대동아 공영권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해석되었으며 제국주의적 '실천'(!)의 길도 그에 따라 정당화되었다.
'자타불이'의 원리로부터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샛길로 빠지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의 연대와 투쟁'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나 더 많은 해석의 징검다리를 촘촘하게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해방 불교'는 방향은 잡았으되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가야 할 길이라면 멀다고 안 갈 수는 없는 노릇. 박노자의 다음 작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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