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에 며칠 전부터 괴 삐라가 무수히 나붙기 시작했고, 한 청년 단체는 자기네 소행이 아니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경찰진 예찬 삐라 출처 밝히라 성명"
최근 시내에는 "영웅 장택상, 애국자 조병옥"의 위대한 치적을 예찬한다는 삐라가 무수히 붙었는데 13일 한국청년회 중앙본부에서는 선전부장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1월 11일 밤 이래 서울 거리에 붙여진 경찰 수뇌부에 대한 저속 야비한 선동적 삐라는 일부 반동분자들의 상습적 장난이지, 조선청년당의 세포단체인 한국청년회가 한 것이 아니므로 경찰당국은 국립경찰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사기한들을 민활하게 체포하여야 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1월 14일자)
건청과 대한민청 등을 발판으로 1946년 12월 18일 창당된 조선청년당은 이선근, 유진산 최고위원을 비롯하여 김두한, 선우기성의 이름이 간부진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 성격을 알아볼 만한 단체였다. 경찰 수뇌부 예찬 삐라를 이 단체의 소행으로 쏠리는 의혹을 피면하기 위해 이런 성명서를 낸 모양이다. 그 의혹이 맞는가 틀리는가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런 삐라가 버젓이 나붙을만한 파시스트 분위기에 조선 사회가 빠져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해방 후 1년 시점에서 남조선의 경찰 인원이 일제 말기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64~166쪽). <자유신문> 1947년 1월 14일자의 "채용 경관 4010명 중 파면 징계자 3600명-수도청의 1년간 통계" 기사에서 경찰 인원 증가의 실상을 얼마만큼 엿볼 수 있다. 1946년 1년간 수도청에서만 4000여 명을 채용했는데, 그 기간 중 '비민주 경찰'로 파면이 349명, 징계가 3262명이었다는 것이다.
1946년 10월 하순부터 12월 초순까지 좌우합작위가 주도한 조미공위는 남조선 상황을 모처럼 포괄적으로 점검한 계기였다. 조미공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제기한 것이 경찰이었고, 그 다음이 공무원(군정청 관리)이었다. 경찰 문제는 인민의 생활과 활동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특히 시급한 것이었거니와, 중대하기로는 공무원 기강 문제도 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있었다.
부정 관리 통역관과 모리배들이 결탁하여 협잡질로 배급된 물자는 몇 다리를 건너서 무서울 만치 비싼 값으로 시정에 돌고 있어 이로 인한 건국도상의 경제 혼란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참담한 민생 문제가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바인데, 물자 배급의 관직을 악용한 해방 후 처음으로 큰 수회사건과 배급물을 횡령한 부정관리 사건이 연속적으로 적발되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즉 군정청 상무국 상무과 의류계장으로 있는 정명채(31)는 영어에 능통한 까닭으로 상무부 공무국 경제과 배급계장의 일을 겸임하여 보고 있던 중 모리배와 결탁하여 가죽 수천만 원어치를 정실배급을 하고 그 뇌물로써 현금 600만 원을 받아 동료 한 사람과 나눠 가진 사실이 탄로되어 수일 전에 배급받은 상인 3명과 함께 군정청수사국에 검거되어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사건 발각의 발단은 이전에 상무부 직원으로 15만 원의 수회 혐의 사건이 있어 수사국에서 용의자를 취조하던 중 증거가 없어서 석방되었는데 이 사건의 부산물로서 전기 정명채 사건의 단서를 잡게 된 수사국에서는 정명채의 집을 가택 수색한 결과 현금 200만 원을 압수하게 되자 일망타진당한 관계자는 12일에 이르러 범죄 사실을 자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서 관리로서는 정명채의 한 사람 외에는 전연 관련이 없으나 상무부장 오정수는 그 가죽을 배급할 때에 싸인을 한 사실이 있다 하여 요새 비난 많은 소위 소경도장 문제가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경고를 주고 있다. (<조선일보> 1947년 1월 14일자)
끝줄의 "소경도장"이라 함은 관리들이 책임감 없이 눈감고 도장 찍어주던 풍조를 말하는 것인데, 서울 시장 김형민의 행태에서 지적한 바 있다(1946년 12월 2일자 일기). 미군정은 행정권 자체를 조선인에게 넘겨주지는 않으면서 자치를 강화하는 인상을 주기 위해 명목상의 책임자를 조선인으로 하고 미군 담당자는 고문의 명목을 가지는 '조선인화(Koreanization)'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기 힘든 이 정책이 소경도장 풍조를 더욱 부채질했던 것이다.
조선인화 정책은 1946년 10월에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그 문제점은 머지않아 여러 각도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12월 하순 매글린 경무부 고문이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보낸 각서에서 경찰 개혁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경우 미군 장교를 각 경찰관구에 배치하여 통제를 맡기겠다고 한 협박(?)도 (1946년 12월 23일자 일기) 그런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일반 행정 가운데 이권이 가장 쉽게 개입되는 배급 문제도 조선인화 정책이 어려운 분야였다.
조선인 관리에 대한 광범위 행정권 이양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이때 이와는 반대로 종래 조선인이 결재하던 사무를 미군인이 도로 찾아가겠다는 사실이 서울 시청에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즉 서울시 미군정관 윌슨 중좌와 상공국 고문관 크러포드 중위는 11일 김 시장에게 통첩을 발하여 13일부터는 석유 석탄 양곡은 크러포드 중위의 서명 없이는 배급되지 못하며 배당에 관한 최후 결정권은 동 중의가 집행한다는 것이다.
조선 사정에 어두운 미군정관이 민생 문제와 가장 긴밀한 관계가 있는 이러한 사무를 원만히 운영해 나갈 수 있는가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조선인 상공국장이 결재하던 것을 미군이 다시 가지고 가는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의아감을 주고 있으며 이번 조처가 조선인 관리에 대한 불신임으로부터 출발한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일방 크러포드 중위는 14일부터 시내 업자를 소집하고 그 취지를 전달하고 있다는데 이렇게 되면 조선인 상공국장은 소위 절름발이 국장이 되지나 않는가 하는 관측도 일부에서는 하고 있다. (<경향신문> 1947년 01월 15일자)
주요 품목의 배급 업무는 조선인 관리들에게 맡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 김형민 시장이 고구마 사건, 비스킷 사건 등으로 워낙 한심한 꼴을 보였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조선인화 보류 방침의 공식화에까지 이른 모양인데, 이처럼 공식화하지 않는 경우라도 미군 고문들이 조선인 부서장보다 더 큰 실질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정명채처럼 영어 잘하고 재간 좋은 사람들은 부서장에게 상납할 필요도 별로 없이 제멋대로 해먹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정명채 사건의 내용을 조금 살펴본다. 정명채는 1월 18일에 뇌물 공여자 11명과 함께 검찰로 송국되었는데, 그 혐의는 총 613만 원의 뇌물을 받은 것이었다. 배급 품목은 쇠가죽 한 가지였다. 시가와 배급가 사이의 차액, 즉 부당 이득 중 30퍼센트를 뇌물로 받는 방식이었다. 뇌물을 주고받는 관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관련 기사 하나가 있다.
"조선제포화 직공들 진정"
정명채의 독직 사건으로 말미암아 증회(贈賄)로 검거 기소된 사람은 근 10명이 되는데 조선제포제화(朝鮮製鞄製靴) 사장인 서병택도 끼어 있어 동 회사와 공장 종업원 일동은 자기 회사 사정의 동정할 사정을 담당 검찰관인 강석복 씨에게 호소하였는데 직공들의 진정 요지는 서 씨는 모리적 야심에서 서 씨에게 돈을 준 것이 아니고 공장 운영의 생명선인 피혁 배급을 받기 위하여 권력을 가지고 금전을 강요하는 데 대하여 공장을 문 닫기지 않기 위하여 그리된 것이라는 것인데, 검사도 이 탄원서를 기소 서류에 첨부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5일자)
서병택의 혐의는 3회에 걸쳐 구두 4만 켤레 분 가죽을 배급받으며 341만 원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기소된 뇌물 총액의 절반 이상을 제공한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변명하는 것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배급권자와 사업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변명이다. 뇌물을 준 사업자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사건은 부도덕한 업자들보다 권력을 농단한 관리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는 일이었다.
정명채가 받은 뇌물 총액은 613만 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1월 19일자의 "6백만 원 수회한 관리 상무과 정명채 작일 드디어 송국" 기사를 보면 증거물로 현금 318만 원과 약속어음 290만 원어치가 압수되었다고 한다. 드러난 증거물을 갖고 '출구조사'를 한 것이지, 그가 작용한 모든 배급 조치에 대한 '입구조사'를 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인 고문과 조선인 부서장 사이에 아무리 '권력의 공백'이 있었다 하더라도 상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받은 뇌물의 99.2퍼센트가 현금과 어음으로 수중에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613만 원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1946년 11월 26일 군정청 인사행정처에서 발표한 봉급 인상 계획에 계장급 월급은 1,530원에서 3,500원으로 오르게 되어 있었다. (<경향신문> 1946년 11월 26일자) 오른 월급으로 613만원은 146년 치에 달한다. 계장급 직원 한 사람이 1946년 9월에서 12월까지 네 달 동안 받았다는 뇌물액이다.
영어마디나 하는 사람이 머리를 굴리면 미군정의 권력을 이용하여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상황을 정명채 독직사건이 보여준다. 그런 모리배들의 이득은 인민의 피해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드러난 사건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은 분명한 일인데, 그 빙산은 과연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확실한 근거를 파악하기 힘든 일인데, <자유신문> 1947년 3월 13일자의 재미있는 기사 하나를 보며 짐작이나 할 수밖에 없겠다.
"汚吏 처단의 명쾌한 수완, 경무부 내 부정 건에도 발휘 기대"
모리배와 결탁하여 사복을 채우던 '필요한 죄악적 존재'들인 군정 통역관리 정명채, 천종효 등을 위시한 독직 관리들은 속속 적발되어 투옥되고 있는 사실은 누보한 바이거니와 이번에 경무부 수사국 특무과에서는 그 동안 신중히 취급하여 오던 사기한 임청 사건을 디디어 발본적으로 착수하기로 전심하여 금명일 내에 이 사건에 관련된 군정청 고관들을 체포 취조할 모양으로 탐관오리에 대한 경무부의 활약은 놀랄만하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군정청 타부에 속한 관리 독직사건은 적극 취급하는 경무당국이 자기 계통에 속하는 관리 독직문제는 어름어름하여 숨겨버리려는 것 같은 태도가 없지 않다고 보이는 점이 있어 일반의 의혹을 사고 있다. 즉 경무부 이종성 용도차장의 60여만 원 독직사건은 지난 1월 29일에 적발되어 확실한 증거까지 드러난 모양인데 그 후 경무당국은 사문위원회에 붙이겠다는 발표도 한 일이 있으면서 아직도 그냥 방임상태에 있다고 한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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