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미군 전용 열차 강간 사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미군 전용 열차 강간 사건

[해방일기] 1947년 1월 9일

1947년 1월 9일

1947년 1월 7일 밤 9시경 익산 근처를 지나던 목포 발 서울 행 호남선 열차 안에서 여러 명 미군이 여러 명 조선인 부녀자를 강간한 사건은 미군정 기간 중 가장 충격적인 만행사건의 하나였다. 이 사건은 1월 11일자 여러 신문에 처음 보도되었다.

"자기들 전용차에서 만행-미군인의 조선 여자 능욕 사건 진상"

[7일 밤 호남선 열차에서 발생한 미군인의 조선인 부녀 능욕에 대한 군정청의 발표는 다음과 같다.]

7일 밤 목포 발 서울 행 38호 여객 열차가 밤 아홉 시경 대전 못 미쳐 황등과 두계역 사이를 질주 중 미군인의 전용 객차 속에서 조선 여자와 어린애의 비명이 들리므로 수상히 여긴 조선인 여객들은 전무와 이동 경찰에 알리는 동시 그 객차로 달려들었으나 미군이 권총으로 위협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술렁거리는 사이에 그 열차는 대전역에 도착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다른 미군의 협력을 얻어 조선인 경찰과 손님들이 객차 안으로 뛰어들고 보니 24명의 미군인이 있는데 그곳 변소에 젊은 조선 여자가 발가벗은 몸뚱이로 되어 있고 또 다른 어린애를 동반한 조선 부인이 이 역시 옷을 칼로 갈래 찢겨 목이 메어 울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분격과 의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부녀자들은 열차가 초만원으로 혼잡을 이룬 가운데 미군인이 그 전용 열차에 타도록 안내해 주므로 무심히 그곳에 탔던 바 그와 같이 봉욕을 당한 것인데 대전역 구내에서 피해자로부터 24명 중 네 명의 미군만 기억나는 대로 지목하여 그들을 미군 당국에 압송해 가고 일단 현장 해결을 지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지 중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공보부에서 발표하였다.

"이 사실에 하지 중장은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조선 부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것뿐 아니라 미군인의 이러한 불법 행동은 미군 전체에 대하여 중대한 문제로서 유죄 판결을 받는 범인은 극형, 예를 들면 종신징역이나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4명이 능욕, 피해 여자 3명-경무부 보고"

작보한 조선 부녀자에 대한 미군인의 폭행사건에 관하여 제3관구청에서는 10일 조 경무부장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시일 : 1월 7일 오후 9시부터 10시경
장소 : 황등역(호남선) 차중
가해자 : 미군인 4명
피해자와 물품 : (1) 여자 3인이 피간(被姦) (2) 현금 2백 원 (3) 회중시계 1개 탈취, 즉시 반환.

피해 여자는 대구인이고 가해 군인은 대전MP에 구속 중이며 작 9일 부산 CIC에서 출장 취조 중. (<자유신문> 1947년 1월 11일자)

엄밀히 말하면 '미군 전용 열차'가 아니라 '군정청 관용 열차'라 할 것이다. 군정청이나 관계 기관 직원의 공무 여행에 이용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군정청 교통부에서 승차권을 발급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웬만한 조선인은 승차권을 가졌어도 들어가지 못하게 헌병이 막았다는 사실을 1946년 1월 31일자 일기에 인용한 김성칠의 경험에서 알아볼 수 있다.

Traffic Controlling Bureau엘 들렀더니 회장이 이미 전화로 연락해 두었으므로 곧 좌석 지정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 사람에게 빌붙어서 일반 동포들이 가지지 못하는 좌석을 차지하지 말라는 아내의 부탁이었고 나는 그 말이 지당한 줄 알지만 이번에 일부러 이 길을 취해보기로 하였다.

(…) 좌석을 준다기에 미군 전용 차량에 탔더니 MP들이 와서 next car로 가라고 몰아세운다. 계집아이 둘만 남기고 기타의 조선 사람은 좌석 지정이 있어도 전부 쓰레기통 같은 다음 찻간으로 쫓아내고 그리고 그 찻간에 이미 타고 있는 일반 승객들은 또 몹시 붐벼서 설 자리도 없는 다음 찻간으로 내쫓는다. 간혹 그런 줄을 모르고 이 찻간에 타는 사람이 있으면 총부리를 내밀고 left go를 연발하면서 기어이 next car로 떠밀어낸다. 이쪽 차량에는 열 사람도 못다 타서 아주 비다시피 하고 다음 칸은 수백 명이 붐비어서 창밖에까지 넘칠 지경이다.

앞에 찻간에 탄 계집아이들이 얄밉기 그지없다. 그러나 next car의 수많은 승객들은 이 찻간에 탄 우리들을 또 그와 같이 얄밉게 생각하리라.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34~35쪽)

미군은 편안한 여행을 위해 좌석 지정을 받은 조선인도 "자기들 전용차"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즐거운 여행을 위해 "계집아이" 몇을 끌어들였다. 헌병들이 앞장서서 시행한 관습이었다.

계집아이 중에는 편안한 여행을 위해 미군의 희롱이라는 위험을 감수한 경우도 있었지만 더러는 부와 권력을 가진 미군과의 관계를 스스로 원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후자의 존재로 인해 전용 차량 분위기는 흥겹고 난잡해졌으며, 그런 소질을 가진 계집아이들을 '사냥'해 오는 것이 미군 병사들의 놀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그런 소질을 안 가진 여자들까지 끌어들여 자기네 놀이를 강요하는 재미도 생겼을 것이다.

1947년 1월 7일 밤에 일어난 것과 비슷한 일은 미군 전용 차량에서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도록 헌병을 비롯해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놓아두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늘 있던 일이 조금 도가 지나친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대전역에서 다른 헌병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서울까지 가는 동안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확한 파악은 못했지만, 이 무렵 미군의 조선인 폭행 사건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난 10월 이후의 소요 사태로 조선인 경찰의 치안 능력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미군의 현장 동원이 늘어난 결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군 범죄에 대한 언론 보도의 통제가 강화된 것도 분명하다. 강준만은 정희상의 "현대사 발굴 : 미군정의 언론 대학살"(<월간 말> 1989년 5월, 121~127쪽)을 인용, 이렇게 서술했다.

광주 <호남신문> 사회부 기자로 이 사건을(호남선 강간 사건) 취재해 보도했던 위민환은 "군정 당국에서는 허위 보도를 했다고 나를 만날 잡으러 댕긴 것이여. 열흘 동안 집에도, 신문사에도 얼씬을 못하고 도망댕기다 신문을 전부 압수당한 대가로 대충 무마가 됐제."라고 말했다.

당시 미군정의 전반적인 언론 통제에 대해 위민환은 "걸핏하면 압수에 정간이었제. 미군정 경찰들을 피해 도망도 많이 댕겼구만. 그놈들도 그때 말로만 민주주의를 내세웠제. 여그 와서 한 짓을 보면 못돼묵은 놈들이었어."라고 회고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2>(인물과사상사 펴냄), 12쪽)

호남선 열차 강간 사건에 대한 보도가 통제된 구체적인 방법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목격자도 많았던 1월 7일 밤의 이 사건이 제대로 보도된 것은 군정청 발표가 있은 후인 1월 11일이었다. 그에 앞서서는 1월 9일 헬믹 군정장관대리의 정례 기자 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해 이런 대답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처음으로 듣는 정보인데 나 역시 미국인인 고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미국에서는 부녀자를 잠깐 겁탈하는 자에게 살인 강도죄나 똑같은 형벌을 하기로 되어 있다. 조사하여 사실이라면 살인 강도죄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엄벌에 처하겠다." (<조선일보> 1947년 1월 10일자)

<자유신문>의 경우 그 후 관련 기사가 나온 것은 1월 12일자의 "조선 여성 전체의 치욕-미군인 만행 사건에 애부(독촉애국부인회) 등 성명"과 1월 15일자의 "만행한 미군인-하지 중장 엄형(嚴刑)하겠다고 언명" 둘뿐이었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1월 11일자의 "전대미문의 만행-우리 민족의 수치, 피해 부녀는 3명" 기사에 이어 1월 12일자에 "민족의 격분은 고조-미군 만행에 여론 비등", 그리고 1월 15일자에 "범죄 군인은 감금-범죄 확인되면 엄중 처벌" 기사가 올랐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자료 대한민국사"를 보면 다른 모든 신문에도 1월 15일 이후 이 사건의 보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월 20일 이철원 공보부장의 기자 회견에서는 이런 문답이 있었다. (<자유신문> 1947년 1월 21일자)

(문) 강화에서 미 군정관 스타인 소좌가 조선인을 살해하였다는데.
(답) 사실이다 1월 14일 오후 4시 50분경 양사면 사무실 앞에서 스타인 소좌가 철산리 사는 승기룡 씨 옆에서 권총을 희롱하다 오발이 된 것이 승 씨의 두골에 맞아 즉사하였다. 스타인 소좌의 처벌에 관하여는 조사하여 발표하겠다.
(문) 양주군 수유리 지나 박석고개에서 일어난 미군인의 강간 미수 사건은?
(답) 미군 구급차에 조선 여자를 태우고 집까지 태워다주는 중 여자들 중 한 명이 서로 장난질을 하다 여자가 소리를 지른 것을 근처 촌민들이 듣고 몰려온 것뿐으로 강간 운운은 사실과 틀린다.

강화도의 승 씨 피살 사건을 앞서 보도한 <자유신문> 1947년 1월 19일자의 "미 군정관이 면민 사살" 기사에서는 사건 기술 뒤에 이런 말이 붙어 있다.

이 사건은 호남선 열차 내 만행 사건, 충남 삽교에서의 강간 사건, 인천의 미군 방화 사건, 창동의 강간 미수 사건 등 최근에 빈발한 불상 사건과 아울러 군정당국의 선처가 요망되는 바다.

이런 사건들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범죄라는 점에서 제한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군의 업무 수행 중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있다. 미군이 조선인을 대하는 공식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쌀 공출에 불상사 빈발-공출 장려 간 미군 발포로 나주서 농민 1명 또 사망"

미국 독려차 농촌 부락에 간 미군 장교가 농민에게 발포하여 사망케 한 사건이 또 발생하였다. 즉, 전남 나주군 남평면 서산리 2구 봉산 부락에서 24일 하오 3시경 미군 중위 1명이 부락민 김삼백 씨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김 씨의 후두부에 명중하여 앞이마를 관통하고 다량의 출혈을 한 후 참혹히 절명하였다. 그런데 총을 발사한 미군 중위 자신이 전남도 군정장관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자기가 공출 독려차 동 김 씨 집에 갔을 때 조선 사람 3명이 작대기를 들고 대항하려는 기색이 보여 장당 방위로 발사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작대기도 들지 않은 엉뚱한 사람이 맞았다고 한다. (…) 광주 기자단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즉시 현장조사단을 파견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6년 1월 28일자)

이 사건 역시 엄중한 보도 통제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정희상의 글을 인용한 강준만의 위 책에 나주 농민 사살 사건에 관한 증언도 재인용되어 있다. 그 중 "1946년 가을"이라 한 것은 증언자 위민환의 착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위 기사 제목에 "나주서 농민 1명 또 사망"이라 한 것을 보면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또 하나의 농민 사살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46년 가을 나주의 어느 동네 골목에서 한 농부가 나락 먹는 새를 쫓다가 미군한테 총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제. 소식을 듣고 광주에 있는 <동광신문>, <조선중보>, <호남신문> 등 3사 합동으로 취재반을 만들어서 현장에 갔어. 미군이 동네 어귀에 딱 버텨 서서는 정당방위였으니 들어갈 필요 없다고 그래. 확인해 보겠다고 우기며 뚫고 들어가 죽은 농부의 몸을 뒤새보니 이놈들 말이 쌩판 거짓이여. 정당방위라면 몸 앞쪽에 총알 흔적이 있어야 헌디 등에 맞았더라고. 바로 올라와 본 대로 기사를 써서 넘겼는디, 아 글씨 도 군정당국에서 신문사로 우루루 몰려와 신문을 배포하면 사건 현장에 간 3사 취재기자 전부를 무기징역에 때리도록 하겠다는 것이여. 그럼시롱 다 압수해 갔제."

군정 당국이 원치 않는 기사를 보도했다 해서 무기징역? 공갈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런데 신문사와 기자들은 이 협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군정 재판'이란 것은 모든 법 상식을 뛰어넘는 도깨비방망이였기 때문이다.

1946년 7월 29일 정판사 사건 첫 공판 날의 시위 때 연행된 50인은 치안 교란, 사법 재판 진행 방해, 공무 집행 방해, 경관 공무 집행 방해, 무허가 집회 참가 등 맥아더 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이라 하여 일반 법정 아닌 군정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8월 20일의 판결에서 최고 5년 징역 5명, 최고 4년 징역 14명, 최고 3년 징역 21명 등 대다수가 3년 이상 징역을 언도받았다. (1946년 8월 8일자 일기)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