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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카뮈'가 있었다!"

[김영글이 사랑하는 저자] 이균영

'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신년호를 '내가 사랑하는 저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사랑하는 저자와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저자와 만나는 기쁨을 누리길 기대합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 이외에는 누구나 자기의 진실을 끝까지 지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사라진 나라')

이 원고의 임무가 '한 권의 책'을 꼽는 것이었다면 아마 좀 더 섹시하고 명랑한, 신년호의 활기찬 공기에 어울릴 법한 작품을 골랐을 것 같다. 그러나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저자를 꼽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신통찮은 시 나부랭이를 쓰는 데 매진하던 문학소녀 시절로부터 문학과 미술의 어정쩡한 경계에서 미술 작업을 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저자'라는 단어의 무게에 자동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사람은 국내에서는 단연, 이균영이라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이균영은 교통사고로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요절한 천재 소설가' 따위의 진부한 수식을 얹을 필요는 없다. 한창 활동할 나이에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천재라기보다는 노력가형 문학 청(장)년이었고, 꾸준히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해 꽤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남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책으로는 <멀리 있는 빛>(정음사 펴냄), <노자와 장자의 나라>(중앙M&B 펴냄),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민음사 펴냄), <떠도는 것들의 영원>(문학사상사 펴냄) 등 여러 권의 소설집과 <무서운 춤>(샘터 펴냄) 등 두 권의 동화책이 있다.

먼저 운을 떼자면, 이균영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오갈 데 없는 허무에 사로잡혀 있다.

"엄마, 우리 이곳을 떠나요." "어디로 말이냐?" "머언 곳으로요. 나도 잘 알 수 없지만 머언 곳이에요…겨울이 없는 곳이면 좋겠어요." ('동동')

"저는 어디론가 가고 싶어요." 아버지는 놀란 얼굴을 하였다. "어딜 말이냐?" "아주 멀리요." "글쎄 그곳이 어디냐?" "저도 몰라요." (…) "미국이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불란서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럼 남극이냐 북극이냐 말을 해봐라. 답답하구나." "아버지 그건 저도 몰라요. 아버지, 여름밤이면 평상에서 저녁을 먹고 강냉이를 뜯으면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러다 우리는 길게 꼬리를 끌고 떨어지는 운석을 보았어요. 우리는 그 떨어진 곳이 무슨 산 너머다, 무슨 동네 앞이다, 무슨 강변이다 하고 짐작대로 말하곤 했어요. 그러나 아버지 그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 눈에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지 사실 그 운석이 떨어진 곳은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멀리 있는 빛')

▲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이균영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멀리는 김승옥을 가깝게는 기형도를 떠올리게 하는 이 문학 소년형 인물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처지 사이의 긴장이라는 대결 구도 위에서 언제나 방황한다. 특히 그의 유작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는 평생을 레일 위에서 산 늙은 기관사의 이야기를 통해 도망치려 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인생의 기구한 숙명을 그린 소설로, 이균영 표 '신파'의 극단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신파는 삶의 비극성을 체념하면서 얻어지는 종류의 신파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자 반항하면서 얻어내는 종류의 신파다.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엄정한 법칙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대결하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굉장히 부드러운 싸움의 한 형태인 것이다.

다른 독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균영을 한국적인 카뮈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 어쨌든, 범속하고 내밀한 인간사에서 개인의 양심에 제기되는 내적인 갈등 문제와 죄의식은 이균영 작품 세계의 중요한 테마였다. 혹자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에서 1980년대는 가담하지 않았어도 누구에게나 치욕인 공간이자 시간이었다. 그래서 1980년대 문학은 많은 부분 그 치욕에 관해 힘겹게 말하려는 열망, 혹은 말하지 못해 곪은 상처의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성복, 황지우와 같은 시인이 우상 파괴와 언어 해체로 그 시절에 응수했다면, 양귀자나 이균영 같은 소설가는 역사의 한 파편인 소시민적 풍경에 바짝 엎드려 개인들이 말하는 진실에 천착했다.

이균영은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바람과 도시'가 당선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1984년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제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최연소 이상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이야 세간에 쉽게 잊히는 허명일 테지만, 그가 소설가이기 이전에 <신간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라는 저술에서 좌우익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연구로 한국 독립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저명한 진보 역사학자였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종의 기행소설인 <떠도는 것들의 영원>을 보면,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저자 특유의 입담이 잘 드러나 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출판사가 주선한 광복 50주년 기념 여행단의 일원이 된 여덟 명의 사람들이 만주, 연변, 백두산 일대를 탐방하며 역사적 토론을 나누는 것이 전부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처럼 몇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다.

운동권 출신 학생, 교수, 기자, 사업가 등 각기 다른 직업과 정치관을 가진 인물들이 항일 투쟁의 공간에서 주고받는 격렬한 논쟁은 역사를 바라보는 세대 간 관점과 입장의 유형화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민족주의를 둘러싼 저마다의 의심과 공포, 각기 다른 심리의 패턴이 펼쳐지는 광경을 수집하듯 냉철한 시선으로 관조하는 기자 캐릭터는 아마도 저자 자신의 페르소나일 것이다.

이균영에게 있어서 역사적 균형 감각이란 그저 역사학자로서 갖는 학문적 엄정함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문학과 역사의 만남이라는 기획이 형식적 결합을 넘어 더 정교하고 예민한 시대정신의 발로를 추구하려 한다면, 소설은 바흐친이 정의했던 것처럼 "다양한 사회 이념적 언어들 간의 대화적 공존"으로서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균영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그러한 대화의 상태, 갈등과 긴장의 상태를 구현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추를 쉽게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균형 감각이 인상적인 까닭은, 독자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화자의 윤리와는 별개로, 타인과의 상호 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자라나는 것이 윤리라는 진실을 소설이 스스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균영의 단편들 중에서 가장 재미난 것을 꼽으라면 교수 사회의 지독한 보수성과 당파성에 시달리는 한 교수의 딜레마를 다룬 <자유의 먼 길>이다. 여기서도 저자는 인생에서 개인이 내리는 판단이 그렇게 간단한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특유의 균형 감각으로 그려낸다. 특히 조직 사회에서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며 나타나는 타자의 이미지를 위트 있게 그려내는 부분이 압권이다.

그런데 가만. 지금 이균영을, 1980년대에 열심히 쓰다 1990년대에 세상을 떠난, 이상문학상 수상자라는 일말의 영예가 없었다면 절판된 누런 책들로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소설가를 굳이 다시 읽는 것은 왜인가? 사실 여기에는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자동 반사적으로 떠올랐다는 단순한 대답 말고도, 다소 긴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하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을 시작으로, 한국 문학의 존재를 두고서도 이러쿵저러쿵 한동안 말들이 많았다. 조영일은 고진의 "근대 문학은 끝났다"라는 선언을 국내로 끌어들이면서 그 선언을 한국의 문단 문학에 적용했다. 이때 핵심이 근대 문학이란 무엇인지 정의하려는 관념적 차원에 있다기보다 문학의 질적 빈곤함을 방기하고 있는 문단과 비평 내부의 문제를 겨냥하려는 실천적 차원에 있다는 점은 자명해 보였다.

소위 '칙릿'을 놀림거리로 삼으면서도 문학의 힘이란 게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로밖에 입증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문학에 깊은 조예가 없는 이들이라도 인지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 이중의 아이러니 속에서 순문학이라는 환상과 공모하는 비평에 책임을 물으며, 문학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헛된 기대는 접어버리자는 조영일의 과감한 제청이 가지는 의미는, 여러 사람들의 부차적인 논의들 속에서 적잖이 희석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나를 건드리는 의문은 오히려 이런 것이었다. 근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억압의 환경이 문학에 진실의 힘을 실어주었지만 지금은 그 구조 자체가 변화했다는 점, 이 사실이 문학의 죽음을 얘기하기 위한 기본 전제라고 한다면, "과연 그러한가?"라는 근원적 질문 또한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즉 문학의 무의식을 떠받치고 있던 그 현실적 토대가 한국 사회 안에서 과연 얼마만큼 변모했느냐, 혹은 그 변모가 무엇을 남기고 있느냐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한국 근대 문학사'는 상상된 권위에 기대어 구축된 허구일지 몰라도, '한국 근현대사'는 엄연한 역사로 존재하고 있다. 문학이, 특히 소설 장르가 공동체의 역사 체험을 반영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면, 거꾸로 가는 시계라도 탑재한 듯 역사를 거스르는 파행적 한국 사회에서 문학의 시간 역시 온전한 정주행일 수는 없을 게 아닌가.

근대 문학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만, 내가 관심 있는 건 어쨌든 지금까지 문학이 있었고, 앞으로도 어떤 이름과 형태로든 존속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끝났다"는 선언을 문학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의 레토릭으로 전용할 것이 아니라면, 근대 문학이 실제로 현재와 어떤 괴리를 낳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도 종언 이후의 문학을 고민하는 나름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이 시점에서 내가 별 수고롭지 않게 스스로에게 권할 만한 일은 1980년대의 문학을, 특히나 어린 날 의심 없이 좋아했던 이균영을 다시 펴 보는 일이었다. 재밌는 점은,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명제에 관한 긍정과 부정의 가능성이 이균영의 소설에 애매모호하게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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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기억의 저편 : 1984년 제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균영 외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대해 얘기해 보자. 대부분의 분단 문학은 이념 문제를 중심으로 분단이라는 화두에 접근했지만 <어두운 기억의 저편>은 평범한 대도시 샐러리맨의 개인적인 일상을 통해 접근한다. 주인공은 필름이 끊겨버린 지난밤의 술자리 여정을 역 추적하는 과정에서,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이산의 상처를 탐험하며 독자를 말 그대로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이끈다.

분단 국가의 현실이 공동체의 명료한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잠재의식의 층위에서 유령처럼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인식은, 2000년대에 들어서는 상당히 익숙해진 개념일 것이다. 냉전과 분단을 주제로 일련의 작업을 발표한 바 있는 미술가 박찬경은, 분단이란 하나의 이미지, 지금도 우리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걱정-이미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 개인의 실존과 거대한 역사적 지평이 대립 관계에 있지 않음을 담담한 필치로 폭로하는 <어두운 기억의 저편>은 국가보안법이 무책임한 칼날을 아무 시민에게나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1980년대가 맞서 투쟁했던 야만과 억압의 구조가 오늘날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을 사는 젊은이들은 치욕의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가짐직한 역사적 부채감보다는 오히려 이 시대에 겪지 않아도 될 것을 되풀이해 겪고 있다는 이상한 치욕에 시달려야 하니까.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분단 문학은 198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어쩌면 2020년대에도, 근대문학이 아니라 분단문학일 것만 같다.

한편, 이균영의 작품 연대기를 살펴보면 중간에 무려 10년의 절필 기간이 있다. <신간회 연구> 등의 역사 저술이 그 기간에 쓰였다. 그러나 그는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신적으로 여전히 '문학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다고 회고했다. <신간회 연구>의 머리말에서 어떤 구절은, 역사와 문학을 서로 간의 벌충 관계로 여긴 그의 가치관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자.

"내가 쓴 역사 논문, 책들 속에는 개인을 타파하고 민족적 삶을 살았던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누구였던가. (…) 3·1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학력은, 또한 직업은, 수형(受刑)사실은 있는가. 민족주의 진영인가 사회주의 진영인가. 어떤 기준으로 그러한 구분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들은 민족 혹은 사회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는가. 사회주의 진영이라면 어떠한 경위로 어떤 계파에 속하였는가. 그들은 왜 거기에 있는가. 그들을 거기에 있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민족적 대의가 그들을 규정하였는가. 그들의 민족 운동 참여의 동기를 신념이나 정서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가능한가. 경제적 요인은 얼마만한 비중으로 평가되어야 할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옷차림, 운동 자금 조달 방법, 그들이 읽었던 책 등 궁금한 것은 헤아릴 수 없도록 많았다. 따라서 내가 추구하는 구체적이며 생생한 역사란 사람들의 역사이며 그 개개인의 인물들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의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했다."

결국 역사 속 개인들을 현실에서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역사가 겸 소설가는 작품으로 사려 깊은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세계의 양면성과 인류의 허접스러운 욕망에 대한 집요한 애정이 있었다. 무한 회귀하는 레일 위의 기차 같고 정신병동 같은 이 극복 불가능의 세계에서, 각자의 치욕과 상처를 이해하고 한 자리에서 쓰다듬는 것. 서둘러 말하자면 결국 이균영의 소설은 사랑의 담론이었다. 방황하던 인물들은 항상 현실의 자리로 돌아오고, 그 귀환은 타협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치유로 그려진다. 물론, 그의 몇몇 소설의 결말이 표면적으로 멜랑콜리의 정서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러한 태도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촌스럽다. 그래서 다시 읽은 이균영의 소설에는 어떤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방황의 과정에서 늘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김승옥에게 하숙방이, 이성복에게 유곽이 있었듯이 이균영에게도 특유의 공간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상상 공간으로, 누이라고 하는 심리적 공간이다. 별로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멀리 있는 빛>이나 <노자와 장자의 나라>에서 주인공에게 여동생은 황폐한 현실 세계의 빈 틈 같은 존재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의 주인공이 술에 취해 찾아가 몸을 섞고 비밀을 털어놓는 술집 아가씨도, 사실은 자신이 잃어버린 여동생이라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던 기억 속 여성과 겹치는 존재다. 그가 결코 유토피아를 함부로 상정하지 않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형적인 남성적 처리는 소설에 흐르는 아름다운 긴장을 훼손시키는 측면이 있다.

이미 역사적 균형 감각을 그의 미덕으로 짚긴 했지만, 그럼에도 과연 지식인 중심의 소시민 문학을 극복했는가 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몇 안 되는 이균영 논문이 그를 양심 있는 지식인 유형의 민족문학 작가로, 혹은 그저 협의의 리얼리스트로 예찬하고 있는 점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균영과 같은 텍스트를 지금 읽는 것은, 현재와 결코 단절되지 않은 근 과거의 역사를 다시 읽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역사를 그렇게밖에는 쓰고 읽을 수 없었던 낡은 정념들과 매순간 작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문학의 종언이라는 골치 아픈 테제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본다. 제도 비평을 작품 비평과 분리하고 보면, 외람되지만 죽음이라는 말은 사실상 말장난에 가깝다.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은 것, 매번 새롭게 죽는 것, 죽었고, 죽어버렸지만, 여전히 지리멸렬하게 남아 있는 어떤 역사. 문학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 세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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