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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년 G7에 유럽은 없다!" 정말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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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년 G7에 유럽은 없다!" 정말로 그런가?

[동아시아를 묻다·13] 어느 시대와 호흡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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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지들이 오가며 인식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그 차이를 유의미한 대화의 소재로 벼리고자 합니다. 지난 편지는 '반전(反轉) 시대의 논리'라는 제목을 붙여 보내주셨죠. 인식의 차이란 우선 시대 인식의 차이를 뜻하고, 되돌아보면 지금까지의 대화에 잠재하고 있던 간극은 거기서 기인하는 바가 큰 듯합니다. 그리하여 그 대목을 물음으로 구성하겠습니다.

그 전에, 아니 그 물음을 구성하기 위해 지난 편지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에 관해 지적하신 부분에 관해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상가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라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바로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문제를 파고든 사상가였기 때문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이병한 님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인식은 틀린 것이 아니라 낡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로서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인식"을 주어로 놓고 "낡았다"거나 "여전히 유효하다"를 술어로 붙여 문장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제 애정 탓이기도 하지만, 낡았다면 어떻게 낡았는지, 왜 낡았는지를 헤아려 그 낡음을 부여잡고 분해하고 계승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병한 님의 지적대로 낡았는지 모릅니다. 다만 오늘날 상황에서 비춰보건대 낡았을 뿐 아니라, 그가 활동했던 당대에서도 어쩌면 낡은 사상가였고, 그 낡음이란 다케우치의 자각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그런 태도를 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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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님은 '일본의 아시아주의'에서 다케우치가 다룬 미야자키 도텐, 오카쿠라 덴신 등과 다케우치는 구조적으로 같은 시대를 살아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진단은 일본사, 일본사상사를 몹시 단순화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 메이지와 쇼와 시대, 전전과 전후의 차이를 지우고 아주 긴 호흡으로 재단해야만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진단이 가능하겠죠. 물론 이병한 님은 논거를 꺼내고 있습니다. 다케우치가 살아갔던 '전후 일본'은 '메이지 일본'을 답습하고 있으며 '탈아입미'는 '탈아입구'의 반복이라고 지적하셨죠. 그러나 저는 역사를 거스르는 솔질에는 섬세함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언급 직후에는 이런 자문을 던지셨습니다. "2011년을 마감하고 있는 21세기의 현재가 20세기와 구조적으로 동일할 것이라고 여기시나요." 그러고는 '신세계'를 목도하고 있다고 답하고 그 근거로 "중국의 굴기와 인도의 부상과 이슬람의 각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환태평양 경제 협정(TPP)에 참여하려 드는 '탈아입미'의 일본은 신세계에서 어느 즈음에 있을까요.

그런 일본은 시대에 뒤쳐졌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수사적 발언일 수는 있을지언정 분석적 발언은 아닐 것입니다. 일본은 신세계의 주요 행위자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뒤쳐졌다/앞섰다'라고 할 때 시대는 역사라기보다 당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자칫 역사 상황으로 진입하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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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도 지금은 그 표현을 사용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저 역시 다케우치가 메이지 사상가들과 얼마간은 같은 시대의 공기를 호흡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메이지 사상가들과 같은 시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병한 님의 표현대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다케우치 자신의 표현을 따른다면 "불 속에서 밤을 주우려는" 노력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대가 변했다"는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인간 유형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운운하는 자들을 곁눈질하며, 자신이 놓치지 않으려는 '시대 과제'가 그런 '시대 분위기'에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케우치는 종종 시대착오적이었습니다. 혹은 반시대적이었습니다. 가령 그는 전후 일본을 '식민지'로 명명했습니다. 사실 미군이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식민지라는 규정은 학문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많은 발언이었습니다. 더구나 방금 전까지 제국이었는데 식민지라니, 그 말이 안기는 심리적 낙차는 너무도 컸습니다.

하지만 그는 점령을 당해 식민지가 되거나 패전으로 독립을 잃은 게 아니라 전시기에 식민화(=제국주의화)에 대한 저항을 방기하고 전쟁에서 노예성을 발휘했던 때 이미 식민지가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가 내놓은 '식민지'라는 말은 학문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후 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식민적 속성을 해부하려 들었고, 그래서 낡아지려 했습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시대에 반보 뒤처지려고' 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정리한 텍스트인 '근대란 무엇인가'도 '일본의 아시아주의'도 그 낡은 태도로 작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병한 님이 "서구 근대를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를 병립시키는 그의 사상적 귀결점은 결국 서구 문명의 복제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발언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근대란 무엇인가'를 정리할 때 '이중의 저항'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다케우치 근대 인식의 핵으로 여기며, '서구 문명'의 덫에 걸리지 않고도 근대를 사고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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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지의 말미에는 루쉰의 저항에 관해서도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루쉰은 동서 문화 논쟁과 좌우 이념 논쟁이 교착하는 상황이 二의 논리(=변증법)에 갇혀 있음을 절감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제3의 출로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적은 대목은 자못 궁금합니다. 이병한 님이 오히려 루쉰의 행보를 변증법적으로 정리했다는 인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선구자적 루쉰의 면모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다케우치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루쉰을, 루쉰의 저항을 어떻게 이해했던가요. '낡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다케우치는 누차 말합니다. "루쉰은 문학가다. 문학가인 루쉰은 선각자일 수 없다." 루쉰이라고 바른 길을 제시하거나 중용을 지켰던 것은 아닙니다. 대신 루쉰은 중국 사회 그리고 중국 문단과 함께 동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대에 반보 뒤처져 있었습니다. 왜 뒤처졌던가. 자신이 지닌 모순의 무게 탓이었습니다. "사상가 루쉰은 항시 시대에 반보 뒤처져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그를 격렬한 전투 생활로 몰고 갔던 것은 그의 내심에 깃든 본질적인 모순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루쉰>) 그리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요하면서 써낸 루쉰의 문학은 긴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선각자일 수 없었던 까닭도 그의 문학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도 루쉰이 자신 안에 모순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사상이 출현했다고 이후 반드시 성숙하는 법이란 없습니다. 체계를 구축해 성을 쌓는 사상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 완성으로 향하지만, 사상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근원적인 모순을 잃는다면 사상누각일 따름입니다. 그 모순을 철학적 체계로 세운다면 선각자일 수 있겠으나 루쉰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모순이 있었지만, 그는 변증법적이지 않았습니다. 문학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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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의 체계가 모순의 무게로 비틀려 터진 자리에 한 사상이 출현합니다. 그러나 곧 그 사상을 간직한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평정되어 긴장을 잃는 때가 옵니다. 내면의 모순이 사그라지면 사상은 평면화됩니다. 근원적인 모순은 사라지고 안정이 도래합니다. 이후로는 지속의 나날입니다. 그러면 타락합니다. 어둠 속에서 토해낸 사상이 빛 아래서 형상을 갖춰가다가는 이내 굳어버립니다. 남들은 이를 두고 발전이니 진보니 떠들겠지만, 다케우치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응고되지 않으려면 내부 모순을 간직하고 버티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밝은 빛 아래로 나오고 나서도 그림자를 짊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루쉰의 행보입니다. 어둠에서 빛 아래로 나왔지만 여전히 그림자는 따라옵니다. 빛을 쏟아내는 자리를 향해 앞으로 걷는 동안에도 자신의 존재로 인해 자기 뒤로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림자는 빛에 의해 생기지만, 빛은 자신의 존재에 가로막혀 그림자를 직접 비추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빛 아래로 나왔지만 여전히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겨 앞을 향해 걷는데도 뒤를 돌아보느라 엉거주춤합니다.

이처럼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겨 빛을 향해 똑바로 걷지 못하는 자는 선각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루쉰의 문학은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긴 까닭에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엉거주춤한 자세였으니 루쉰은 뒤처졌으나 그런 루쉰의 후진성은 중국이 겪은 근대화의 후진성과 겹쳐지니 따라서 진실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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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진성으로 말미암아 식민지 사상가에게 표현을 골라내는 일에는 이중의 부담이 따릅니다. 후진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니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말을 골라야 합니다. 그러나 방향을 제시하는 말은 대개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지 자신이 일궈낸 말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후진적(식민지적) 상황은 반복됩니다. 현실은 몇몇 개념에 의탁해 정리할 만큼 간단치 않고, 상황은 바깥에서 들여온 몇몇 처방으로 타개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합니다.

이 조건에서는 뒤처졌다는 자신의 무력감을 곱씹으면서도 따라잡는 일에 관한 회의 능력을 잃지 않는 자가 현역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난번에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근대란 무엇인가'의 일구를 취해오겠습니다. 다케우치가 일본의 사상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새로운 말이 잇따라 생겨나기는 하지만(말은 타락하게 마련이니 새로운 말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말은 옛 말을 타락시킨다), 그것은 본디 뿌리가 없는 까닭에 탄생한 것처럼 보여도 탄생한 것이 아니다. 성장, 결실, 알맹이의 무게로 자연스레 갈라지고 거기서 새로운 싹이 움튼 그런 말이 있었던가. 물론 타락도 하지 않고 소멸도 하지 않는 말이 없지야 않겠지만, 유심히 보면 그런 말은 다른 것에서 영양을 공급받고 있어 영양이 끓기지 않는 동안만 생존할 수 있다. 그 자체에 생산성이 있지는 않다. ('근대란 무엇인가')

새로운 말을 구해와 옮겨 심지만, 후진성이라는 토양이 바뀌지 않았으니 제대로 뿌리내릴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다케우치는 이렇게 제안하는 듯합니다. 우선 민감해져야 합니다. 현실을 담는 말의 능력을 부단히 고심하며 조절하는 긴장을 품어야 합니다. 주어진 말들이 유혹하는 사고의 타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깥에서 들여온 가치들을 후진적 상황을 극복하는 처방처럼 사용한다면 사고의 도피처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대결해야 합니다. 한 명의 사상가가 탄생하려면 바깥에서 주어진 의미에 저항하는 시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이미 만들어진 관념을 빌려 몸에 두르고 있는 자기 사회의 직업사상가들과도 대결해야 합니다. 사상은 늘 논쟁이라는 모진 토양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사상가는 모순의 무게로 갈라져 자기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말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저항하는 사상가는 낡은 구석을 지닙니다.


7

그리고 다케우치는 바깥에서 주어지는 올바름도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 따위의 유럽산 가치를 매개 없이 들여오는 태도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근대화의 지체를 겪은 곳에서는 바깥에서 재빠르게 가치를 기성품 삼아 들여오는 진보주의가 타락하게 마련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후에 일본인의 심정을 울트라(노예적)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데 써먹는 보수주의자와도 타협 없이 싸웠지만, 유럽산 가치를 제 권위인 것처럼 들먹이는 진보주의자와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는 구세대를 공격했을 뿐 아니라 신세대도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보수주의자·진보주의자·구세대·신세대의 비판을 달게 여기며 '동 중 정'을 지켰습니다.

깨어나 떠나야하나 길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제 손으로 어둠의 구석구석을 더듬으며 길을 내야합니다. 그것이 다케우치에게는 지난 역사에서 전통의 요소를 건져내고 동시에 현재를 전통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일을 해내려면 어떤 자각이 필요합니다. 즉 선각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 대립하는 가치들과 입장들과 세대들 속으로 들어가 양측의 무게를 받아 안으며 그 사이에서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선각자가 되기를 포기한 자의 역할이란 그 모순의 무게를 받아 안고 답이 아닌 물음과 고뇌를 역사에 새기는 일입니다. 그가 루쉰을 평생의 동반자로 삼은 까닭도 이것입니다. "새로운 가치가 밖에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낡은 가치를 갱신함으로써 생겨나는 과정에서는 어떤 희생이 요구된다. 그 희생을 한 몸에 짊어졌던 이가 루쉰이었다." (<루쉰>)

▲ 동과 서의 힘의 반전은 과연 이루어질까? 그 반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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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를 호흡할 것인가. 혹은 시대를 어떻게 호흡할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를 사유하려는' 우리가 꼭 한 번 씨름해야 할 주제일지 모릅니다. 물론 사유하는 자에게는 자신의 시대를 전환기로 움켜쥐는 힘이 필요합니다. 저도 그 힘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나중일인 것 같습니다. 아직은 시대를 대하는 다른 감수성을 기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케우치의 낡은 태도가 제게는 소중합니다.

이제 이병한 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지난 편지만이 아리라 확실히 이전 편지에도 그런 말을 하셨죠. 1991년 2011년까지의 상황을 훑으며 "20세기를 지배했던 서도(西道)가 끝내 종언을 고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새 길은 보이지 않는 세기말적 상황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재차 동방의 길을 다짐하는 까닭입니다."

저는 그 문구에서 서양과 동양에 관한 상호단순화를 느꼈습니다. 역오리엔탈리즘적 편향이 잠재한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도 했는데, 그때는 아직 진의를 파악하기에는 내용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묻지 않았습니다. 지난 편지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동과 서가 반전하는 신세기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년의 시계추가 거꾸로 뒤집히고 있는 것이지요. 재차 '동풍'이 불고 있습니다."

먼저 그런 인식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이병한 님은 여러 차례 '중국의 굴기'를 강조했고, 지난 편지에는 2050년에는 주요 7개국(G7)에 유럽의 국가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셨죠. 실제로 그 예측이 들어맞을지는 차치하더라도 경제력에 기반을 둔 진단인가요. 물론 경제력은 문화력도 동반하겠지만, 중국의 굴기가 '반전 시대'의 충분조건이 되나요. 즉 '동양'과 '서양'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거기에 '인도의 부상' 등을 덧붙여도 이 물음에 관한 충분한 대답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굴기하는 중국은 어떻게 동양적인가요. 그 반전이란 힘의 이동 이외에 어떤 세계의 전환, 세계관의 전환을 말하고 계신 건가요.

또 한 가지 물음입니다. 지지난 편지에서도 "초기 근대의 가능성을 복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 의미를 더 듣고 싶습니다. '초기 근대'로는 자본주의와 국가 간 체제로 재편되기 이전이며, 아마도 대등한 문명적 교류가 가능했던 시대를 상정하는 것 같습니다. 거론하신 사건들은 주로 14, 15세기의 것들이었죠. 다소 혼란스러웠던 것은 지지난 편지에서 '초기 근대'의 가능성을 언급한 후 "역사의 결을 거슬러 솔질하는 '저항'의 하나"로 신해혁명을 반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해혁명을 복원해야 할 '초기 근대'의 한 가지 사건으로 언급하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만약 '초기 근대'에서 '초기'가 단순히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역사의 원형질을 뜻한다면 그런 '초기 근대'를 상정할 수 있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초기 근대'를 오늘날 상정해 어떤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인지를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해혁명을 거론해 '자본주의와 국가 간 체제' 성립 이전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던 것이리라 짐작하지만,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 편지의 말미에 이렇게 맺음하셨습니다. "한국의 좌/우를 넘어서고, 크게는 한반도의 남/북을 아우르며, 좁게는 중/일의 공존을 도모하고, 넓게는 미/중의 협동을 촉진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동과 서가 회통하는 큰 뜻을 실천하는 현장으로 한반도를 되새길 일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거듭하여 갈고 닦아야 할 동아시아론의 으뜸가는 화두이기도 하겠지요."

아마도 이병한 님께는 이런 발상이 '초기 근대'를 복기하려는 시도와 맥을 같이 하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위의 문장의 매 쉼표마다 파열음이 들립니다. 저 지난한 과정들은 연속적이지도 순차적이지도 포함 관계에 있지도 않다는 것이 동아시아에 관한 제 실감입니다. 그리고 저는 '동과 서의 회통'을 제 동아시아 사유의 목적지로 삼지도 않습니다.

이제 이렇게 우회하고 쟁점들을 챙겨 '동아시아를 묻다'라는 대화의 본줄기로 돌아갈 수 있겠네요. 물음에 관한 대답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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