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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SF 독자라서 행복했다!"

[2011 올해의 책] <SF 명예의 전당>

'프레시안 books' 송년호(71호)는 '2011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독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1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11년은 과학 소설(SF) 독자들에게 즐거운 한 해였다. 우선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나왔다. 번역 출판의 시차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해도, 오랫동안 수십 년 전 SF 작가의 재간에 만족해야 했던 SF 독자들에게는 풍요로운 한 해였다. 출판된 작품들의 폭 또한 넓었다.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의 몰락>, 이언 뱅크스의 컬처 시리즈 <게임의 명수>, 파울로 바치갈루피의 <와인드업 걸>과 같은 대작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전편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존 스칼지의 우주 활극 <마지막 행성>이 출간되었고, 네빌 슈트의 우아한 종말 소설 <해변에서>도 조용히 나왔다.

SF 장르의 정수인 단편 소설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한 해였다. 연초에 완간된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외에도, 체코 SF 단편 모음집인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 '종말'이라는 단일 주제를 다룬 <종말 문학 걸작선>, 한국 SF 기획 단편집 <멀티버스>, 과학 웹진 <크로스로드>가 펴낸 <목격담, UFO는 어디에서 오는가>, 듀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같은 책이 서점에서 독자를 반겼다.

스팀 펑크 SF의 매력을 보여준 필립 리브의 <견인 도시 연대기>(전4권)가 완간되었고,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은 지금까지 한국에 나왔던 어떤 SF와도 다른 '정말 새로운' 소설이었다.<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로 한국 SF 동화('동화로 오인 받는 SF'가 아닌 진짜 'SF 동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배명훈의 장편 <신의 궤도>도 두 권으로 나왔다. 한국의 SF작가가 동시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화성의 타임 슬립>, <죽음의 미로>, <닥터 블러드머니> 동시 출간으로 시작, 얼마 전 <높은 성의 사내>를 재간하고 다섯째 권으로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을 선보인 폴라북스의 '필립 K. 딕 걸작선'은, 책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한국 SF의 지형을 바꿀 만한 크고 중요한 기획이다.

이렇게 좋은 SF가 많이 나온 2011년 한 해, 올해의 책은? 하나하나 색깔이 다른 책들이었기에 한 권만 꼽기가 정말 어렵지만, [SF 명예의 전당](전4권, 시어도어 스터전 외 지음, 박상준 옮김, 오멜라스 펴냄)을 억지로 골랐다. 이 책은 미국 SF작가협회에서 선정한 SF의 고전 중, 단편, 중편 등을 모은 책이다. (1~2권은 단편, 3~4권은 중편 모음이다.)

잡지 게재가 가능한 단편, 연재를 하거나 단행본으로 낼 수 있는 장편과 달리, 중편은 출판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 나온 SF 중에서도 중편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보통 번역 출판되는 기획 단편선은 분량 문제로 중편을 잘 싣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중편을 소개하려면 작가의 개인 단편선이 나오는 편이 가능성이 높은데, 한국에 나온 SF 작가의 개인 단편선은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르 귄, 테드 창 정도이다.

이런 현실에서 중요한 고전 SF가, 그것도 중편이 제대로 출판된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옛날 책이 많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막상 따져 보면 소위 '빅 3'인 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을 제외한 고전 SF 작가들의 작품은 그다지 소개된 적이 없다.


▲ [SF 명예의 전당](시어도어 스터전 외 지음, 박상준 외 옮김, 오멜라스 펴냄). ⓒ오멜라스

1930년대 갓 탄생한 SF는 우주 배경에 인류가 갓 경험하기 시작한 핵과 같은 과학기술 발전을 끼워 넣은 서부극의 변용에 불과했다. 1960년대 말의 뉴웨이브 이후 SF는 소위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장르 문학이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에 번역 소개된 SF는 대부분 바로 이 뉴웨이브 팽창기 이후의, 그 중에서도 어떤 경향성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한국의 SF 번역 출판에는 공백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 사이에는 어떤 SF가 있었을까? [SF 명예의 전당]은 지금까지 한국 SF 번역 출판계가 잘 대답할 수 없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침내 보여준다. C. M. 콘블루스, 폴 앤더슨, 코드웨이너 스미스처럼 인용되기만 하던 작가들, 누구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다며 언급만 되던 이야기들, '캠벨'처럼 상 이름이 되거나 '델 레이'처럼 출판사 브랜드가 된 '고유명사'들의 진짜 소설이 온전히 한국어로 옮겨졌다.

개인적으로 특히 반가운 소설은 4권에 실린 스터전의 '아기는 세 살'이다. 십수 년 전에 절판되어 아무리 찾아도 구할 수 없었던 소설 <인간을 넘어서>의 후반부를 이루는 경이로운 중편이다. 이렇게 [SF 명예의 전당] 3, 4권은 우리에게 남아 있던 오랜 숙제, 어딘가 부족한 것 같던 빈 칸, 시간이 갈수록 메우기 어려워졌을 어떤 지점을 마침내 훌륭한 중편으로 채웠다.

좋은 책을 보면 좋긴 좋은데 앞으로 이런 책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서는 것은 한국에서 SF 독자로 살아온 자가 경험적으로 체득하는 불안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책은 정말로 다시 나오기 어려우리라. 중편을 내기도 어렵고, 중요하지만 이미 지난 시대의 이야기를 내기도 어렵고, 그 중요한 중편이 SF라면 아무리 멋진 이야기라도 더더욱 어렵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온 책, [SF 명예의 전당]을 2011년의 SF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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