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리영희의 '전환 시대'는 낡았습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리영희의 '전환 시대'는 낡았습니다!"

[동아시아를 묻다·12] '반전(反轉) 시대'의 논리

"내재적 비판이란 그 대상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대상이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를 비판자가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십분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케우치가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로 지난 글을 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서구 근대를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를 병립시키는 그의 사상적 귀결점은 결국 서구 문명의 복제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동)아시아론은 일본의 주체 형성을 위한 추상적 관념 세계에 그치고 있으니, '사상으로서의 아시아'가 아니라 아시아의 역사적 실체에 육박해 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사변적인 역사철학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거대한 뿌리'에 가닿자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화적 되감기를 통하여 서구의 가치를 보편화하는 것이 아시아가 수행해야 할 '저항'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결을 솔질하며 거슬러 올라가 자본주의적 근대가 삭제한 다양한 '초기 근대'의 가능성을 복기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때의 '초기 근대'란 자본주의와 국가 간 체제로 천하를 통일한 작금의 근대와는 상이한 '다른 근대(의 가능성)'를 일컫는 것입니다. 혹자는 '상실된 근대'(Lost Modernities)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그 '가지 못한 길'을 정성스레 되살려 가는 역사의 되새김질이야말로 21세기에 부합하는 '저항'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허나 충분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 사유가 단단히 여물지 않아서이겠지요. 그래서 다시금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의식을 저는 저 나름으로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재차 논해보려고 합니다.

반복과 계승

저는 다케우치를 인용하고 주석을 다는 훈고학적 작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 맥락을 면책 사유 삼아 변론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 또한 '심경'적으로는 그에게 공감하는 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율하기도 했던 것이고요. 허나 중요한 것은 '다케우치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필요한 태도는 엄정한 '고쳐 읽기'입니다. 그게 그 사상가에 대한 최대의 예우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이 고쳐 읽으며'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거듭 고쳐 읽는 그 부단한 행위 속에서만이 새로움이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고쳐 읽는' 행위야말로 후세가 누리는 특권이자, 감당해야 할 소명이기도 합니다. 이는 정치적 단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고쳐 읽어야' 그 다음의 일보를 내딛을 수 있는 동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사상적 전통에도 근력이 다져지겠지요. 계승은 반복이 아닙니다.

다케우치의 근대 인식의 시비를 가리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한 것은 그의 인식이 '틀렸다'가 아니라 '낡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살아가던 시대의 사상의 임계점을 보여주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 또한 거듭 읽고, 고쳐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2011년이라는 세계사의 현 단계를 고려할 때 '낡았다'는 실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김수영의 시구를 빌리자면, '선생님, 그건 옛날이야기지요'라고 할 수 있을 법합니다. 그래서 근대(사) 자체를 다시 쓰는 작업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저항도 가능합니다.

언급하셨던 과거의 사상가를 대하는 다케우치의 태도는 능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조적으로 동일한 시대를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복기하려 했던 미야자키 도오텐, 오카쿠라 덴신 등의 언설이나 '근대의 초극' 논의에는 아시아와의 연대를 통한 저항의 계기가 분명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사적 유산의 되새김질은 매우 소중하고 절실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케우치가 살아가고 있던 '전후 일본'이 '메이지 일본'을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탈아입미'는 '탈아입구'의 반복이었습니다. 즉 그가 호명했던 지식인과 다케우치 본인이 살아가던 시대는 '동시대성'이 뚜렷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0세기 초의 (일부) 사상가들에서 전후 일본의 주체성을 재건할 수 있는 비판과 저항의 계기를 포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허나 지금도 그러한가요? 2011년을 마감하고 있는 21세기의 현재가 20세기와 구조적으로 동일할 것이라고 여기시나요? 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스승들과는 전혀 다른 신세계를 목도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소련의 해체와 유럽의 지방화와 미국의 후퇴를 아우르건대, 동(東)과 서(西)가 반전하는 신세기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년의 시계추가 거꾸로 뒤집히고 있는 것이지요. 재차 "동풍(東風)"이 불고 있습니다. 중국의 굴기와 인도의 부상과 이슬람의 각성이 동시대적으로 분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새삼 1858년을 돌이켜 봅니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영국이 인도를 최종적으로 식민지로 만들었던 해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자금성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켜 미일 통상 수호 조약을 맺은 해도 1858년이지요.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1950년대는 전 지구적 탈식민 운동이 세계사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인도가 독립하고(1947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1949년)된 것도 이 무렵이지요. 그로부터 다시 100년이 흐른 2050년을 상상해보십시오. 중국이 미국을, 인도가 영국을, 인도네시아가 일본을 앞서가는 세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G7'에 유럽의 어느 국가도 포함되지 않는 '낯선 신세계'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미래'가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다케우치의 근대 인식과 저항론은 '옛날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전의 시대'에 부합하는 '저항'을 새로이 궁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가 '아랍의 봄(Arab Spring)'과 '3·11'과 '뉴욕의 가을(American Fall)'을 목도하는 2011년을 살았다면 그러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다시 근대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논의했던 것입니다.

다케우치가 그 글을 썼던 1948년이 아니라 도래하는 2048년에 부합하는 근대론을 다시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다케우치의 '태도'를 배워 오늘에 고투하는 것, 저는 그것이 우리 세대가 감당해야 할 참된 '계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대화가 근대 일반이 아니라 다케우치의 근대 인식, 혹은 루쉰적 저항의 근대에 집중하자는 제안에는 쉬이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아카데미의 논문 쓰기로 충당하면 될 입니다. 더군다나 다케우치의 사유를 '일본 근대가 지닌 뒤틀림을 어떻게 해부할 것인가'로 한정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근대의 비틀림이 비단 일본만의 것이던가요? 오히려 근대 자체가 그렇게 뒤틀려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일찍이 유럽을 모방하여 '근대의 우등생'이 되었던 일본이 근대의 폭력 또한 앞장서서 학습하고 실천했던 것이겠지요. 즉, 일본의 근대는 예외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케우치는 자신이 터하고 있던 일본의 근대를 바탕삼아 '근대란 무엇인가'로 사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가 부여잡은 '루쉰'과 '중국'이라는 저항의 계기는 재차 논구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기호들은 차별적 식민주의의 원조인 유럽의 근대와 그 변형인 일본의 근대와는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서구와 일본의 보편-특수라는 비대칭적 구도를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이 도입되었고, 그때의 중국이란 바로 루쉰과 마오쩌둥으로 상징되는 그것이었지요.

하지만 이 또한 그만의 남다른 면모라고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다케우치도 참여한 바 있었던 AA(Afro-Asian)작가회의의 궤적을 추적하다가 인도네시아의 흥미로운 지식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Pramoedya Ananta Toer(1925~2006년)는 1950~60년대 인도네시아를 풍미했던 진보적 문학단체 'Lekra'를 대표하는 걸출한 지식인입니다. 그가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함께 문화 주체성을 재건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재발견한 것도 결국 루쉰과 마오쩌둥의 중국이더군요.

▲ Pramoedya Ananta Toer(1925~2006년). ⓒ이병한
인도네시아에서 '동방적' 전통에 기반을 둔 문화 정체성을 재건하기 위해서, 중국이 적극적인 참조 축으로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1950년대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여 루쉰의 흔적을 더듬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연안문예강화(1942년)에도 깊이 공감하게 되지요.

이처럼 중국(의 근대)을 방편으로 삼아 주체성을 재건하려던 시도의 목록은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전에도 언급했던 한국의 리영희, 타이완의 천잉쩐 등도 그러하고요. 따라서 다케우치를 아우른 이들의 유사한 모습은 냉전기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들의 '전형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러한 전형성에 깔려 있는 심층 심리야말로 오늘날 엄정하게 성찰해 봄직한 어떤 과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탈식민의 지향이 중국의 구심력으로 굴절되어 가는 공통의 구도야말로 문제적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죽의 장막' 너머 아시아 사회주의권을 살펴보노라면 중국의 위상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중화주의의 유산이 여전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중화 사회주의'(Sino-Centric Socialism)라는 조어를 궁리해 본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서구의 황혼이 깊어지면 질수록, (동)아시아의 현저한 비대칭성은 한층 도드라질 것임을 예감합니다.

그리하여 중국의 지식계에서 뒤늦게 다케우치에 호응하고 있는 모양새가 썩 석연치만은 않습니다. 물론 이웃 나라의 비판적 사상을 동아시아의 공동 유산으로 삼는 작업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입니다. 서구를 매개로 삼지 않는 동아시아 내부의 지적 연대의 모색이야말로 탈식민과 탈냉전의 요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20세기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구도에서 번역되고 수용되고 있는 작금의 맥락에는 일정한 노파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동)아시아와 제3세계를 경유하여 되돌아오고 있는 루쉰과 마오쩌둥은 중국의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긍정으로 오역될 소지가 농후한 탓입니다.

혹은 반세기 전 아시아의 탈식민적 문제의식이 중국의 '반패권' 담론으로 엉뚱하게 활용될 여지도 없지 않습니다. 중국의 굴기가 엄연한 오늘날과 견주자면 자가당착과 시대착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지요. 동아시아의 비판적 사상의 유산을 재흡입하고 있는 저 대륙의 왕성한 소화력이야말로 오늘의 '문제 상황'으로 접수할 일입니다.

즉, 우리는 다케우치가 궁리했던 '일본과 아시아'와는 역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심급을 달리하는 '중국과 아시아'라는 난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동아시아론이 감당해야 할 최대의 과제일는지 모릅니다. 그간 한국발 동아시아론의 가장 취약한 지점도 여기에 있지 싶습니다. 특히나 못마땅하기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영영 헤어질 수도 없는 '북조선' 문제를 안고 가야 하는 우리이기에, 저 거대한 이웃에 대한 질문은 한층 절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환 시대'에서 '반전 시대'로

다케우치는 1910년생입니다. 조선의 식민화로 제국일본이 욱일승천하던 해이지요. 20세기를 상징하는 해에 태어난 셈입니다. 그리고 1977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의 삶이 출발합니다. 한일 병합에 버금가는 사태는 역시 중국의 개혁 개방(1979년)이라 하겠습니다. 21세기의 출발이었지요.

중국의 개혁 개방은 중국이 사회주의를 대신하여 자본주의로 갈아탔다고 여길 성질의 사건이 아닙니다. 중국의 개혁 개방으로 말미암아 세계 체제 자체가 개조되고, 근대가 뒤집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한층 정확하게 사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전환 시대'를 능가하는 '반전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동아시아에서는 중-일의 반전이, 세계적으로는 중-미의 반전이, 문명적 차원에서는 동-서의 반전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新)과 구(舊)가 반전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新)청년>과 <신(新)문화운동>과 <신(新)중국>에서 저항의 계기를 포착했던 지난 세기의 저항론 또한 낡은 구닥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1974년)를 대신하는 '반전시대의 논리'가 필요한 것이지요. 인식과 감각의 물갈이가 시급합니다.

반전하는 21세기의 저항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나왔던 지난 150년의 근대와는 다른 경로의 가능성을 역사로부터 복기하는 것입니다. 20세기를 돌아보며 20세기와는 다른 21세기를 만들어가는 것. 그 복기(復碁)와 재생(再生)의 공진화가 반전 시대의 논리입니다. 즉, 저항은 더 이상 '자기 부정(掙扎)'이 아니라 복기이자 복원(復元)이며, 재생이고 부활(復活)이어야 합니다.

다름 아닌 르네상스(Re-naissance)이지요.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문화적 되감기'가 아닐까요.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의 근대가 아니라 그것이 삭제한 동방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감각입니다. 동방의 과거야말로 우리에게 낯선 타자가 되고 말았으니까요. 기실 루쉰의 '저항' 또한 그의 정신에 체현되어 있었던 동방 고전의 '거대한 뿌리'에 기인하고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자기 부정'의 몸짓이 그토록 격렬할 수야 없었겠지요. 그런 문명적 유산에서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는 작금의 뿌리 뽑힌 정신세계에서 유럽의 근대주의와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을 넘어서자는 허울 좋은 구호는 일견 그럴듯해 보여도 그 토대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상누각'이기 십상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루쉰을 논하면서도 유독 1917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917년은 어떤 해이던가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입니다. 동서 냉전의 기원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들의 21세기는 또 하나의 1917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중국 지식계에서는 동서 문화 논쟁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허나 채 결실을 맺기도 전에 좌우 이념 논쟁으로 옮아가고 말았지요.

허나 루쉰은 역시 달랐습니다. 편협한 이념 대결에 함몰되지 않고 문명적 지평에서 사상적 고투를 지속했던 것입니다. 1917년 그가 직접 고안했던 북경대학교의 엠블럼이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웅변해줍니다. 사람(人)을 형상화하여 北과 大를 조형한 것이지요.

ⓒ이병한
그려진 두 사람을 보십시오. 한 명은 동(East)을, 또 다른 이는 서(West)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떠받들고 있는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유난히 팔이 길지요. 팔이 저토록 긴 사람은 누구던가요? 유비입니다. 삼국지의 유비는 어떤 사람인가요? 포용력의 상징입니다. 즉, 유비라는 동방 고전의 메타포를 통하여 너른 포용력으로 동과 서를 모두 끌어안으라는 것이 루쉰의 메시지입니다.

나아가 그 세 명의 인물이 하나의 원(圓=原=元) 안에 어울려 있는 구도의 이미지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一이 태초의 하나 된 세계(太極)를 상징한다면, 二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음양, 좌우, 동서의 분화된 논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三은 그 동/서, 좌/우, 남/북을 아우르는 중용을 말하는 것이지요.

즉, 루쉰은 동서 문화 논쟁과 좌우 이념 논쟁이 교착하고 있던 1917년의 갈림길이 二의 논리(=변증법)에 갇혀 있음을 절감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제3의 출로를 미리 궁구하고 있던 것입니다. 1+2=3이라는 근대의 수학(數學)적 세계관 너머에서 一·二·三을 품어 더 큰 원을 그려내는 시학(詩學)적 세계관으로의 도약을 펼쳐 보인 것이지요. 정녕 루쉰다운 사상의 진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東(아시아)學이 계승해야 할 '저항'이란 바로 이러한 수준으로까지 가닿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세계가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꿰뚫어볼 수 있는 방향 감각이 절실합니다. 반전하는 21세기의 '시중'(時中)을 움켜잡아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도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2012년을 유독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2012년은 1910년과 1917년에 버금가는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강성대국'이라는 북조선의 과대망상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환태평양 경제 협정(TPP) 참여라는 한국과 일본의 시대착오와, '대국굴기'라는 중국의 유아독존을 막기 위해서라도 2012년은 실로 중차대한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게는 한국의 좌/우를 넘어서고, 크게는 한반도의 남/북을 아우르며, 좁게는 중/일의 공존을 도모하고, 넓게는 미/중의 협동을 촉진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동과 서가 회통하는 큰 뜻을 실천하는 현장으로 한반도를 되새길 일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거듭하여 갈고 닦아야 할 동아시아론의 으뜸가는 화두이기도 하겠지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