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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을 개방하라!" "우린 어디서 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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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을 개방하라!" "우린 어디서 놀라고?"

[해방일기] 1946년 12월 21일

1946년 12월 21일

실권을 미국인들이 갖고 있다 하여 스스로 "절름발이 시장"이라며 무책임의 극치를 달리던 김형민 서울 시장이 모처럼 한 가지 해냈다.

"13개 요정 개방 결정"

엄동에 집 없이 떨고 있는 전재 동포를 수용하기 위하여 서울시에서는 그 동안 적산 요리점의 개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20일 김형민 서울 시장은 군정청 공보부를 통하여 다음의 13개소 요리점을 개방하여 시내의 집 없는 전재민 중 우선 시급을 요하는 2460명을 수용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13개소의 요리점 주인이 역시 갈 곳이 없어 개방된 주택의 일부를 사용하려면 관재처에다 새로이 차가(借家) 계약을 맺은 후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개방될 적산 요리점은 다음과 같다.

본정 2정목 鳳月館, 동 1정목 春香園, 동 2정목 松竹園, 동 蓬萊閣, 동 3정목 春香閣, 욱정 1정목 蘭亭, 동 香化園, 동 漢陽館, 동 漢城館, 동 稻香閣, 명동 2정목 鳳凰閣, 동 國泰館, 동 高麗亭 (<자유신문> 1946년 12월 21일자)

본정(本町, 충무로)과 욱정(旭町, 회현동), 명동에 있는 요정들인데,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것을 누군가가 넘겨받아 경영하고, 그것을 군정청에서 묵인해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식 절차를 밟아 승인받은 것이라면 이런 개방 조치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유입된 인구를 전재 동포 또는 전재민이라 했는데, 중국과 일본에서의 귀환자가 각각 100만 전후에 지난 봄 이북의 토지 개혁 이래 월남자가 수십만이었으니 이남 유입 인구는 200만을 훨씬 웃돌았다. 그중 일부는 각 지역 사회에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지만 그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주거 조건은 시골이 나아도 시골에는 생계를 위한 일거리가 별로 없어서 도시, 특히 서울에 유입 인구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1946년 6월 21일자 일기).

유입 인구의 주거 문제는 일찍부터 떠올라 있었다.

해방된 고국에 돌아온 전재민들을 싸고도는 주택 문제는 그들의 호구(糊口) 문제와 함께 중대한 사회 문제의 하나이다. 그럼에 경성부에서는 (…) 전재민 수용소를 장충단 전 일군 건물을 이용해서 개설하고 그동안 수천의 전재민들을 수용 원호해 왔으나 이곳에서 소정의 수용 기간이 지난 전재민으로서 역시 갈 곳도 없는 그들은 그 후 어디로 갈 것인가. (…) 일전의 용산 육군 관사에서 사정에 의하여 나오게 된 전재민들을 위하여 장충단 부청 전재민 수용소에 임시로 들여놓고 현재에는 직원들로 하여금 전재민의 본직업과 고향 신분을 조사하여 일인 가옥을 두서넛씩 접수하고 있는 모리배들에게 주택을 빼앗아서 알선하고 있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3일자)

주거 문제에 근본적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로 겨울이 다가오자 움집이라도 지어주자는 방침이 나왔다. 이 방침을 둘러싼 상황이 11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지금 서울의 참경만 보더라도 전재민들은 공원을 비롯하여 방공호 철교 밑 같은 데서 노숙하는 비참한 궁상은 실로 목불인견의 현상이다. (…) 현재 남조선에 있는 전재민은 실로 197만7500명이란 다수에 달하고 또 이들에게 제공해야 할 주택만도 7만3311호인데 이들에게 임시로 토막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여기에 대한 비용은 약 9000만 원을 요한다.

이러한 비참한 현상을 시급히 타개하여 노숙하는 전재 동포를 구하고자 이번에 군정청 보건후생부장 이용설을 회장으로 서울 시내 각계 유지로서 구성한 전재민가주택건설조성회를 보건후생부내에 설치하여 일반의 협력을 얻어 5000만 원의 조성 의연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13일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이사회를 개최한 후 조성 협의회를 개최하고 긴급책을 협의한 결과 엄동을 앞둔 절박한 현실에 비추에 시급한 구제를 느끼고 즉시 착수하였다.

그런데 동 건설조성회의 5000만 원 의연금 모집보다 한걸음 앞서 보건후생부에서 이미 4000만 원을 응급 자금으로서 각도에 분배하였으므로 전부 9000만 원으로서 움집(토막) 3만6218호(7만3300세대)가 건설될 것이라는데 이번 구제 의연금 모집에 대한 더욱 일반의 적극적 원조를 바라고 있으며 의연금은 12월 말까지 군정청보건후생부내 전재민가주택건설조성회나 각도 지부 혹은 전 각도 부 군 읍 면 각 신문사로 보내기를 바란다고 한다.

(…) 엄동설한을 앞두고 어린 자녀를 거느리고 주택난으로 떨고 있는 전재민은 서울 시내에만 2만 세대 10만 명을 계산하고 있는데 서울시 당국에서는 과동 긴급 주택으로 삼각형 토막 소위 움집을 집단적으로 건설하고자 방금 적당한 토지를 물색 중이다. 이번에 건축할 긴급 주택은 1350여 호로 서울 도심 지대를 떠난 영등포 이태원 등 4-5지구에 국유지나 적산 용지를 이용하여 지을 예정으로 준공은 12월 중순까지는 마치기로 되었다.

7만3311호의 움집 제공에 약 9000만 원을 요한다면 한 호에 1200~1300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쌀 한 말 값이 400원이라는 기사를 보았으니 쌀 한 가마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이것은 군정청 보건후생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으로 보인다. 같은 발표를 근거로 한 11월 22일자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전국에 건설이 필요한 호수가 7만3311호에 자재비가 총 1억80만2625원이라고 되어 있다.

11월 10일자와 24일자 <서울신문>에는 경기도의 움막 건설 계획을 보도한 기사가 실렸는데, 이에 따르면 한 호당 비용이 2500원 또는 3000원으로 되어 있다. 군정청에서 발표한 1400원보다는 현실적인 금액으로 보이지만, 이것 역시 쌀 두 가마 값이 안 된다. 그 수준이 어떤 것이었을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나마 11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논의가 이런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니 당장 올 겨울의 대책은 막막하다. 11월 22일 경기도 각 군 후생과장 회의에서 이 계획을 "올 겨울 안으로" 완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니 구호 대상자 측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토막 지어도 안 살겠다, 요정-유곽을 비워 달라. - 전재민 대표자들 결의"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 산하에 있는 시내 27개소 연락소와 중앙본부 직속 5개소의 수용소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동 대표자회의에서는 금번 후생부에서 건축한다는 토막집은 장소나 시기로 보아 기대하기 곤란할 뿐만 아니라 완전치 못한 토막을 지금으로부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짓느니보다 유곽 요정 여관 사찰 등 유휴 적산 가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들지 못할 움집에 들라 함에는 들지 않기로 의견이 일치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6년 12월 14일자)

요정-유곽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것은 전재민 측에서 먼저 꺼낸 얘기도 아니었다. 해방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전재민들이 귀환했으면 일본인이 비운 자리에 전재민을 수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과정이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군정청의 할 일이었다. 요정-유곽을 특정해서 우선적으로 전재민에게 배정하자는 주장을 제일 처음 내놓은 것으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나타난 것은 민족통일총본부(민통)의 11월 14일 담화였다.

"동절을 임박하여 전재 동포의 주택 문제 해결이 끽긴한 일이니 경향을 막론하고 적산가옥 더욱이 적산 요리점 여관 등의 영업을 폐지시키고 전재민에게 분여할 것이며 도읍 근처의 신한공사 토지에 귀환 동포의 주택 건설을 허하도록 하여 전항 경지 분양 문제와 결부시켜 적극적 방침을 세우도록 위정당국에 요청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4일자)

민통에서는 12월 3일에도 성명서를 내어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졸한이 급습한 이때에 수십만의 전재 동포가 남조선 방방곡곡의 바라크 창고와 역두와 가두에서 집 없이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적산 요정과 여관 등을 전재민에게 양여할 것을 누차 성명하여 당국의 선처를 요청하였으나 마이동풍 격으로 이에 대한 관심조차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심히 유감이다. 장외에는 신음하는 전재 동포의 강시가 나려고 할 시에 적산 요정에서는 미주가효의 가무성이 높아가는 이러한 적산까지 이용시키는 개인 자본주의의 옹호정책이 용인된다면 재건 조선의 전도는 암담한 것이다. 우리는 당국의 맹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시각을 다투어 차의 급속 실현으로서 전재민을 강시에서 구출할 것을 강경히 요망하며 주목한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4일)

이승만 지지 단체인 민통에서 이렇게 나온 것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인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울시도 그 직후 26개소의 적산 시설을 전재민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2월 20일 공보부를 통한 요정 13개소 개방 결정은 이 방침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해방된 지 이미 1년이 넘어도 서울의 거리에는 남부여대로 거리에 거리로 헤매는 보기에도 참담한 전재 동포가 유리 방황되고 있다. 엄동이 닥쳐옴에 따라 한파의 가두에서 고국산천을 원망하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오늘날 위정 당국의 무엇보다 긴급한 과제일 것인데 이에 서울시에서는 적산으로서 종래 일인들이 우리에 고혈을 빨아 분 냄새와 알콜에 취하여 유흥하던 전 일인의 소유 요정 유곽 여관 등을 전재민 숙사에 제공키로 되었다.

이번에 전재민 숙사로 지정되는 것은 종래 조선인은 그다지 사용하지 않은 것뿐으로 시내 26채의 요정 유곽 여관 등의 훌륭한 건물인데 이는 현재 장충단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100여 세대와 시내 각처의 방공호에 들어 있는 200여 세대의 전재민들로 현재 들어 있는 사람들을 정리하는 대로 수용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현재 서울 시내에는 노숙 전재민이 약 600세대인데 이번 제일차의 수용이 완료되면 집 없는 재민들의 주택 문제가 해결될 모양이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7일자)

서울 시내 노숙 전재민이 약 600세대라는 <동아일보>의 파악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위에 소개한 11월 17일자 자기네 기사 내용도 잊어버린 것일까? 연말을 앞두고 13개소 요정에 2460명을 수용한다는 것은 사실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한 조치였다. 그나마 특권층이 유흥을 즐기던 장소를 궁한 사람들에게 제공한다는 상징성은 있는 조치였다. 그런데 정작 기막힌 일은, 이 정도 상징적 조치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적산 요정을 개방하여 23일부터 전재민을 입주시키겠다는 시 당국의 언명은 전자에 보지 못하던 당국의 대 영단이라 하여 일반 시민이 쾌재를 부르짖으며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전재민 구제 문제에 서광이 비쳤다 하여 시당국의 전재민에 대한 금후의 시책에 크나큰 희망을 품고 한시바삐 다음 조처가 있기를 고대하고 있어 저물어 가는 서울 거리에 명랑한 화제를 던지고 있는데 명도 명령을 받은 13개 요정 중 문제의 도색 영화 사건 때에도 물의를 일으킨 청향원과 난정을 비롯하여 갑종 요정만 여섯 집이 종업원을 시켜 명도 명령 철회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고 있다.

(…) 특히 23일 아침 시당국의 명령으로 난정에 입주하려고 온 동일자혜원의 불쌍한 고아 70명을 시당국과 교섭중이라는 이유로 문간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한 난정의 처사는 언어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관계자들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김 서울시장 담 : "종업원의 진정서 아니라 그보다 더한 문제가 있더라도 13 요정에 전재민 입주는 강행할 것이다. 다만 종업원에 대한 실직문제에 대하여서는 적극 알선하여 줄 용의는 가졌다."

◊ 동일자혜원 한몌례 담 : "추위에 떨고 찾아온 고아들을 문간에 들이지도 않아서 이같이 거리에서 떨게 하다니 세상에 이런 악독한 일이 있겠어요?"

◊ 난정 종업원 측 담 : "나는 난정 이하 여섯 갑종요정의 종업원 대표이다. 요정 개방의 취지는 좋으나 방법이 틀렸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리는 단결하여 우리의 생활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겠다." (<경향신문> 1946년 12월 24일자)

전 일인 소유였던 13개 요정들에 대한 전재민 입주 문제로 요정 측과 전재민 간에 분쟁이 일어나 전재민들은 시당국의 입주 지령을 받은 이상 들어가겠다 하고 요정 측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여 서로 싸워 23일 각처에서 일대 혼잡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회현동에 있는 난정이란 요정에서는 동일자혜원 고아 김혜옥이란 두 살 된 여아가 추운 날 오랫동안 밖에서 떨고 있었던 관계로 급성폐렴이 돌발하여 죽은 사실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시당국에서는 23일까지 기정 방침에 따라 전재민 수용을 강행하겠다고 언명하여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되고 있었던 바인데 24일에 이르러 돌연 참페니 민정장관의 명령이라 하여 전기 요정 등의 영업 정지와 아울러 전재민 수용 문제를 앞으로 한 달 동안 연기하였다고 한다.

시당국의 무정견하고 무책임한 그와 같은 처사로 말미암아 전기 각 요정에서는 다시 활기를 띄고 영업을 계속한다는 광고를 써붙이는가 하면 다소 희망을 가지고 몰려온 수많은 전재민들은 다시 실망에 잠겨 거리에서 방황하며 방성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등 각처에서 희비곡이 연주되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시당국에서는 참폐니 민정장관의 명령이라 하여 어찌 할 수 없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경향도 있으나 이 책임은 마땅히 시당국이 져야 할 것이며 갈팡질팡하는 시당국의 무책임한 처사에 일반의 여론이 자자하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25일자)

챔피니(A S Champeny) 대령이 또 나타났다. 1946년 3월 2일자 일기에 등장한 적이 있는 자다. 화신 사장 박흥식이 경제사범으로 구속되었을 때 장택상과 함께 대법원장과 검사국장을 찾아가 하지 장군의 명령을 빙자해 석방시킨 인물. 여론이 들끓자 이틀 후 재구속한 것으로 보아 하지의 명령도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서울 시장이 몇 주일 전부터 공개적으로 약속한 일이고 수천 명 전재민이 엄동설한에 쉴 곳을 얻는 일인데, 미군 대령이 툭 튀어나와 가로막으면 가로막히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지 사령관은 조선인을 상대로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내놓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고래로 성탄제때 친구에게 축하를 보내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관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인을 대표하고 또 余 자신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1947년의 신년을 앞두고 본관은 조선 국민 여러분에게 대하여 건강과 행복과 번영과 및 민주주의 자치국가로서의 독립이 하루바삐 실현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24일자)

건강과 행복과 번영? 사람 놀리나?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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