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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똥 치웠을 뿐인데…경찰 "너 좌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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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똥 치웠을 뿐인데…경찰 "너 좌파지!"

[해방일기] 1946년 12월 19일

1946년 12월 19일

지난 11월 11일자 일기에서 입법의원 이야기를 하다가 그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너무나 재미있는 당시의 기사 하나를 소개한 것이 있다. "넘쳐흐르는 분뇨는 누가 치우나?-'나는 책임질 수 없다.'-김 시장의 무성(無誠)한 답변"이란 제목의 이 기사를 다시 올린다.

"본래 금년 2월에 예산을 세울 때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품삯을 15원으로 정한 것이 인플레로 말미암아 현재는 도저히 예산액으로서는 노동자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앞서 청소 사무를 각 구정(區町)으로 이관하는 동시에 각 동회장의 협력을 안아 동민과 더불어 자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이 안이 미군 관계자에게 부결되고 말았다. 시장인 나는 절름발이 시장이다. 부결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그 책임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제2안을 고려하고는 있으나 나는 책임을 질 수 없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2일자)

임금 인상 때문에 원래의 예산으로 청소도 제대로 못하게 된 것이다. 철도 운임과 전기료 등 공공요금이 1946년 중 두 차례 갑절로 오른 것을 보면 물가가 네 배는 오른 것으로 봐야겠다. 11월 26일 발표된 군정청 직원, 즉 공무원의 봉급 인상 방침은 서기급 2300원, 용인급 1600원으로 되어 있다. (<경향신문> 1946년 11월 26일자) 그런데 노동자 하루품삯 45원이라면 주 6일 일해도 원 400원이 안 된다. 연초 기준으로는 군정청 용인급과 큰 차이가 없는 액수였더라도 물가가 네 배 오른 이 시점에서는 비현실적인 액수다.

예산이 모자란다 해서 밑으로 내려 보내 "자치적 해결"에 맡긴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책임 회피다. 그것을 미군 관계자가 부결했다 해서 부결한 사람이 책임질 문제라고 잡아떼고 있으니 김형민 시장, 참 책임에 대해서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시장이 책임지지 않는 일을 맡아서 하겠다는 '자치적'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찰에서 그 움직임을 가로막고 나선다.

서울 시내의 청소 문제는 큰 두통거리의 하나로 당국에 대한 비난이 자자한 터인데 서대문구 조선민청원 80여 명은 우리 거리는 우리 손으로 깨끗이 치우자고 시당국의 원조 아래 지난 14일부터 매일 틈 있는 대로 시내의 청소 작업에 활동 중이던 바 15일 돌연 서대문경찰서에서는 청소작업대대장 김재국(22) 군을 본서에 소환하여 무허가 집회라는 이유로 작업을 중지시키는 동시에 작업대 해산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 민전 측 담 : 이에 대하여 민전 조사부장 오영은 다음과 같이 경찰의 태도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청소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만치 이번 서대문구 민청의원 활동은 각 방면에서 원조해 주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공연한 죄명을 들어 중지케 한다는 것은 경찰의 근본 의도를 알 수 없다. 경찰의 의도를 규명할 생각이다."

◊ 수도청장 담 : 또한 수도청장은 이에 관하여 기자단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청소 작업은 장려할 바이라고 말하였다.

"혹 경찰에서 잘못 알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으니 청소대라고 완장을 달고 일해주기 바란다. 청소에 힘쓰는 청년을 막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나는 어디까지 청소라면 장려하겠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 18일자)

완장 차지 않았다 해서 청소하는 사람보고 뭐하는지 못 알아보겠는가.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이 좌익 청년 단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경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1946년 4월중 결성된 민청은 전국에 지방 조직을 갖추고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내부의 강습회, 독서회, 야학, 음악회, 웅변 대회 등을 개최하는 외에 수해 때는 복구 사업에 나서고, 전재민 구호 기금을 모금하고, 서울 시내 청소 작업에 500여 명이 나서기도 했다. (유상영, '8·15 이후 좌·우익 청년 단체의 조직과 활동', <해방 전후사의 인식 4>, 80~84쪽)

좌익에게는 봉사 활동조차 순순히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 이후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자치 노력은 미군 진주 이후 미군정의 검열을 받았고, 이제 경찰의 검열도 받게 된 것이다. 봉사 활동까지도 경찰의 규제를 받는 정도라면 집회와 시위에서 좌익이 어떤 규제를 받았을지는 가히 상상할 만한 일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자료 대한민국사'에 1946년 12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라 하여 "최근 국내 정계 동향이 알려짐"이란 글 하나가 들어있다. 매우 긴 글이어서 지면에 올랐다면 한 면의 절반 이상 덮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 신문 자료"에서 당일 <동아일보> 지면을 찾아보니 이 글이 보이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글이기는 하지만 내용으로 보아 그 무렵에 쓰인 글은 분명하고 차분한 논조로 정계 상황을 잘 정리한 글이다. 중도적 잡지에 실린 글이었을 것 같다. 당시 상황과 논점이 잘 요약된 글이므로 옮겨놓는다.

좌익 3정당 합동 문제를 계기로 사로·남로 양당의 분립, 입의 문제로 좌익 측의 양진 형성이 최근 국내 정계의 일반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립에서 통일로 상극에서 협조로 추진 발전시키는 것이 민족의 정치 훈련이요 정계 혼란의 진화일 것이므로 우리는 좌우익 양 정당의 현상과 구성을 천명하여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정당한 인식과 이해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당면의 급선무가 아닌가 한다.

좌익 진영 좌익 3당 합동을 계기로 남로·사로 양당으로 분열되었는데 분열의 근본 원인은 공산당 내의 박헌영 노선에 추종하는 간부파의 자색 자파주의의 종파성에 있다. 이 종파성을 유지하려는 것이 남로당의 방향이요 이를 배제하고 각 당 각파의 역량을 통일 합작하자는 것이 사로당의 방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로와 남로는 정강 정책의 상이로 인한 대립이 아니라 법통 고집과 파쟁의 대립이다. 해방 후 금일까지의 좌익 노선의 정당성과 또 공산당 내의 자파 우선을 확집하는 콤그룹 계열과 그의 산하 분자를 망라한 남로당과 이의 종파성 청산을 요구하여 각 당 각파의 민주 역량을 혼연 통합하기 위하여 공산당 신민당 각 지방 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였던 세칭 대회파를 중심으로 한 사로당과의 대립은 조선 좌익 전선의 발전을 위하여 한 개의 오점일 뿐 아니라 독립 전야의 조선 정계의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로당의 전북 대표 김대희 경북 대표 윤일 서울시의 동대문구 등의 조직 대중은 그 지반이 강고하다고 전하느니만치 여운형·백남운 양씨의 정계 인퇴 성명에도 불구하고 사로의 추진력은 그다지 미미하지 않다. 공산주의자의 특색이 그러하니만치 북조선노동당의 결정자가 있은 후 사로의 강진 등 일파는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심경에 달하였다고도 전하나 신민당 계통의 고철우 허윤구 등, 공산당의 김대희 최익한 문갑 등은 사로 사수의 의도를 공고히 하고 있다.

남로당 역시 완전 통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허헌 위원장은 발언의 추진력이 미약하다. 남로의 신민당 계통과 이주하 등은 사로의 무조건 합당이 정당타고 인정하였으나 공산당 간부파(콤그룹파) 즉 중견층에서 반대하면서 사로 해체와 개인 입당을 고집하고 있다.

이로써 남로의 종파성이 강화되느냐 사로의 독자성을 유지하느냐 좌익 정당의 정화가 없이는 통합과 발전을 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로당 여운형 위원장의 인퇴 성명이 있은 후 전 인민당 계통의 일부는 입의 참가를 불사하는 동시에 구 인민당 노선에 복귀하려고 하는 동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상 요약 설명한 바와 같이 좌익 정계는 영도권 문제로 상극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정치와 훈련과 정화가 없이는 청산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익 진영은 좌우 합작 7원칙 문제(토지 개혁 문제)를 계기로 한민당을 탈퇴한 원세훈 김약수 등을 중심으로 하여 출발한 민중동맹과 좌우합작위원회와의 제의로 입법의원 관선의원을 발표하게 되었고 또 서울 강원 양지구의 민선 무효 선언 법령 118호의 무 공포 즉석 변경 등을 이유로 한민당계 입의원 18명은 전원 불참가를 결의하고 입의 불합작과 합위 해산론을 성명하게까지 되었다.

이보다 먼저 한민당과 김규식과의 관계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금하(今夏) 한민당 각 지방대표자대회에서 위원장제로 개편할 제에 김규식의 위원장 취임 내락설이 전할만치 접근하였다 한다. 한민당 원래와 희망과 태도는 한독당과 합당해서 이승만 금구 강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독당의 거부로 인하여 결국 결렬되어서 우익 측은 한민·한독 양진영으로 분립 상태에 있다. 그러던 중 금년 5월 7일 미소공위 무기 휴회 발표 이후 국내 정계의 일반적 요청에 호응하여 좌우 합작 기운이 성숙하여 김규식·여운형 양씨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가 드디어 연생케 되었다.

입의 전제의 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이에 대하여 제1진으로 반대성을 높인 것은 한민당이다. 그 이유는 합작 7원칙 중의 토지 개혁 문제에 있어서 합위 측의 유상 몰수 무상 분여에 대하여 한민당 측은 유상 매수에 유상 분여를 주장하였다. 당내의 정견 상이로 원세훈 김약수 등은 탈당하여 합작 7원칙 노선을 밟는 전기의 민중동맹을 출현케 하였다. 적어도 7원칙 중 토지 개혁 문제로 한민당에서 솔선 반대 성명 발표를 계기로 합위와 한민당과의 감정의 씨는 뿌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후 서울·강원의 민선 무효 선언은 한민의 대 합위 감정을 일층 심각케 하였고 다시 관선 발표로 가일층 가중하여 정계에 표면화하게까지 이르렀다. 그러면 합의의 의의와 성능은 무엇인가? 남북 통일과 좌우 합작이다. 그러므로 초당파 초계급적 존재요 민족 협조의 통일을 기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따라서 합위 탄생 당시의 일반 기대는 공위재개 촉진을 위한 민족 통일로서의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대하였고 지지도 하였던 것이다.

물론 미세련의 조선 사회라 부득이한 이유와 사정도 있겠지만 이번 입의의 관선 발표는 과연 공정한 선정이며 조선 민주화에 있어서 가장 적의한 인물이며 역량을 가졌다고 공평할 수 있을까? 세론이 분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한다. 정치는 감정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수개인의 주관적 선입관에 좌우된다면 독선자행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적어도 조선의 정치인이라면 조선 사정을 이해해야 하고 조선 인민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무능력한 혼란의 연속뿐이다. 합위가 일개 정당이라면 별문제이지만 민족 통일을 사명으로 한 이상 이번 관선 추천은 너무 편당적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합위의 장래는 어떤가? 좌익 일분의 대표 정당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남로·사로에서 합작위원회를 불인하고 입의 참가를 거부하는 한편 우익의 대표정당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한민·한독의 현 입의 거부로 말미암아 합위의 구성과 성능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누구와의 합위요 누구를 위한 합위인가? 관선을 계기로 우익진의 대립은 합위의 정치적 미숙-결백-에서 우러난 흥분의 소치가 아닌가 한다.

합위 지도자의 양심적 흥분이라면 내성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타력 의존의 자기 만족에서 출발하였다면 정치 혼란은 가중하고 동시에 민족의 비애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군정청의 현 입법원은 합위의 추진으로 논리적 형성은 가능할지언정 현 구성과 형태로는 임정 수립까지의 과도입법원으로서의 원래의 사명 달성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니 차제의 합위 태도로서는 우익 진영만이라도 정비하여 태세를 공고히 하겠다는 데에 양심적 안목을 두고 우선 한민·한독 등의 입의 거부 측과 허심탄회의 성의로써 진보적 타협을 하는 것이 현명한 방향일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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