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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김훈'을 좋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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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김훈'을 좋아하나?

[조영일 '김훈'을 말하다] <흑산>

0. 비평의 지겨움

비평가가 비평을 지겹다고 하는 것은 분명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뭐랄까 그가 쓰는 비평의 '성의 없음'을 상기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허구'라는 가면을 쓸 수 없는 빈약한 글쓰기(비평)에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솔직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설사 성의 없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달리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소설을 읽고 그에 대해 무언가를 쓰는 것에 대해 지겨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마흔 줄에 접어들면서 비평을 접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에 저는 그런 사람들을 '비평가로서의 사명'이 부족한 사람들 하고 비난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사명'이라…그런 게 존재할리 없겠죠.

주지하다시피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겨움과 비평의 지겨움은 조금 다릅니다. 아니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비평이란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밥벌이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지겹다'는 말에는 하고 싶지 않지만 (바꿔 말해, 재미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뉘앙스가 들어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밥벌이의 지겨움'의 경우는 먹고 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평의 지겨움'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바로 이 부분에 아마 비평가의 푸념을 '성의 없음'으로 간단히 치부할 수 없는 무엇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김훈과 역사 소설

시작이 쓸데없이 길어졌군요. 오늘 제가 다룰 작품은 김훈의 신작 <흑산>(학고재 펴냄)입니다.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즉, 시놉시스)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검색하시면 대충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매체와 비교해 다소 늦게 나오는 '프레시안 books'의 서평인지라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아마 내용 정도는 숙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상까지 차려주길 원하는 분들을 위해서 간단히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초에 있었던 신유박해를 다룬 소설로서, 정씨 형제(정약전)와 그들의 (조카) 사위 황사영의 이야기가 두 개의 큰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조선조 천주교 박해를 다루는 역사 소설인 셈이죠.

▲ <흑산>(김훈 지음, 학고재 펴냄). ⓒ학고재

이 작품과 관련하여 우리가 화제로 삼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일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남한산성>(학고재 펴냄)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역사 소설(작가 본인이 이 표현을 수긍하든 그렇지 않든)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작품을 이전의 역사소설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등과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들자면, 이 작품에 다루고 있는 것이 '천주교(넓은 의미에서 기독교)'라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꽤 오래 전에 김훈과 관련하여 장문의 평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김훈과 관련해서는 이미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흑산>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청탁을 오자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제 기억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뭘 썼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재된 잡지나 파일을 찾아서 읽어보면 떠오를지 모르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잊었다는 것은 잊을 만하다는 것, 다시 말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그것을 억지로 상기시켜 '작품을 다시 읽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의 주장이 제가 이전 글에서 한 것과 설사 모순되더라도 이해를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작가와 그가 쓴 작품도 변하지만 그것을 평하는 비평가나 비평도 변하는 게 정상일 테니까요. 사실 이런 '변함'이 없다면, 한 작가에게는 한 편의 평문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작품을 읽어가면서 저는 예전에 쓴 글의 일부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전 작품들도요. 기시감, 그렇습니다. 이미 한번 읽은 적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쉽게 말해, 김훈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변화가 없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칭찬이지만(하이데거가 그랬던가요? 사상가란 본질적으로 한 가지만 사유한다 운운), 다른 한편으로 게으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김훈을 게으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그리 공정한 태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매우 늦은 작가적 출발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1994년에 그것도 40대 중반을 훌쩍 넘겨서야 문단에 등장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문학과 관련된 양질을 기사를 쓰는 기자로서 꽤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요.

흔히 사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 운명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존재합니다(어떤 작가를 평가할 때 항상 데뷔작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변한다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작가론이란 사실 작품들 간의 차이/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등장할 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김훈의 경우는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그의 소설은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에서부터 <흑산>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습니다. 범위를 역사 소설 군으로 축소시키면 그 한결같음은 매우 심합니다. <칼의 노래>(2001년), <현의 노래>(2004년), <남한산성>(2007년) 그리고 <흑산>(2011년). 나열하고 보니 작품 주기도 3년으로 같군요. 굳이 구별을 하자면,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가 하나로 묶이고, <남한산성>과 <흑산>이 묶이겠지만요.

물론 좀 더 날카로운 메스를 사용하여 전자를 도구(칼, 현)가 그것을 소유한 자의 의지를 대변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폐쇄된 공간(남한산성, 흑산)이 그 안과 밖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이야기로 간주하고, 그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석은 '작품을 잘 읽는' 또는 '정밀하게 읽는' 비평으로 칭찬을 받겠지만, 저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차이들이란 결국 소재의 차이에서 오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에 쓴 글에서 김훈 소설은 기본적으로 테마 소설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주제)는 전혀 바뀌지 않고 소재(배경 세트)만 바뀐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컨대 <칼의 노래>에서 선조의 역할은 <흑산>의 정순왕후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인위성을 조장하는(뒷받침하는) '말'로만 등장하여(그들은 '인물'로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칫 허공으로 붕 뜰 수 있는 공간에 최소한의 현실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그와 대립하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부여된 인위성을 지워가며 삶을 꾸려갑니다(물론, 정반대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김훈의 소설은 역사학적 층위라기보다는 문명사적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문명(인위성)과 자연(스스로 그러함)의 긴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작가는 후자에서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반문명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 텐데(더 나아간다면, 생태주의자!), 그런 명명이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은 그의 소설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이라는 것 자체가 문명의 부정(내지 비판)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설을 문명사적 상상력과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틀린 이야기만도 아닌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가 역사 소설에 전착하는 이유가 이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신화적인 장치를 도입하지 않고서(그의 현대 소설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사는 시대를 하나의 문명으로 바라볼 만큼 거시적 시각을 획득하기란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과거는 그런 무리수를 쓰지 않아도 되고, 또 설사 그런 수를 쓴다고 해도 현대를 다루는 소설에 비해 이질감이 적지요.

2. 자연과 문체

▲ 김훈. ⓒ연합뉴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왜 별 차이가 없는 소설들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찾아 읽는 것일까?"

저는 그것이 소위 '김훈 마니아'를 낳은 김훈식 문체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김훈의 문장은 그야말로 많은 문학인들의 숭배(적어도 찬탄) 대상입니다. 그런데 소위 '김훈 문체'라는 것의 비밀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볼 텐데,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김훈소설의 핵심 구조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인간을 묘사할 때 자연 묘사에 흡수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순문학(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배경 묘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위 대중 문학의 경우 집중력을 요하는 묘사를 매우 간단하게 처리하고 곧바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데에 반해, 순문학의 경우 묘사란 작가가 자신의 문장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영역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김훈 소설의 경우 이 점에서 여느 순문학보다도 순문학적이라 하겠습니다(주지하다시피 최근의 젊은 작가들은 묘사보다는 대화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즉, 한번 묘사한 공간이 다시 등장할 경우 많은 경우 생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훈은 약간을 변주하는 형태로 되풀이합니다. 왜 그는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그것이 불러오는 효과에 주목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의를 기울여보면, 우리는 그의 반복 묘사가 작품에 공간적 리듬을 부여해주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것이 각각의 인물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자연스러운 것'(숙명)으로서 빚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물(묘사)이 반복적 자연 묘사에 흡수되어 '자연과 인간' 내지 '공간(세계)과 시간(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들을 마모시키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가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흑산> 서술자는 '새의 눈'으로 소설 공간을 날아다니면서 부분과 전체 사이를 어떤 머뭇거림 없이 자유롭게 왕복합니다. 그는 이 책에 그가 상상한 '가고가리'라는 새를 직접 그려서 안표지 그림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책 껍질을 벗겨보시기 바랍니다), 다소 뜬금없이 그의 이런 행위는 소설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작가적 입장(시선)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독일 낭만주의자 졸거가 말한 것처럼 아무리 잔인한 전쟁도 멀리서 보면(즉 줌 아웃시키면) 조화로운 풍경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줌 인하면 서사가 발생하여 소설이 되지만, 줌 아웃을 하면 서사가 소멸하면서 회화가 된다." 즉, 김훈의 소설은 줌 인과 줌 아웃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인물의 성격이 '개성'의 형태로 부각되거나 사건이 배경 앞에 나가서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가 스스로 걸어가도록 놔두게 되면, 문체를 통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김훈의 문체에 보내는 감탄이란 실은 서사(소설적 갈등)의 소멸(내지 왜소화)에 대한 대리 보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평자들은 문체에 매혹된 나머지 서사의 부재(또는 빈약함)를 그것으로 과대 해석하곤 하는데, 적어도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웃음)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신다고요? 그럼 단순화를 무릅쓰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김훈의 역사 소설이 '김훈 표 역사 소설'일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거기에 역사(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본 문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은 모리 오가이의 역사 소설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모리의 역사 소설도 루카치적 의미의 '근대적 역사 소설'(루카치의 관점에서 '근대적'이라는 수식은 동어 반복이지요)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부재하는 인물들을 그린 모리의 소설(몇 년 전에 그의 역사 소설집이 <아베일족>(노재명 옮김, 북스토리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으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은 '근대 소설에 대한 거부'라는 나름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물들에 대해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도 없이 서술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은 그와 정반대의 형태를 취합니다. 그는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을 자아의 확대를 통해 건너 뛰어 '세계 전체'(자연)와 교감하기에 이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과정이 다른 한편으로 사회를 자연화시킴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자아를 억압하고 있는(제한하는) 사회를 긍정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무언가를 초월한다는 것은 대상의 극복과는 관련이 없으며, 도리어 그것의 긍정을 함축하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점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그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동물의 왕국> 같은 것을 즐겨보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저 역시 우연히 TV에서 나오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자연 다큐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첫째 동물들을 삶을 들여다보다 보면, 뜻밖에도 우리와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먹기 위해 싸우고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사랑하는 모습에서 우리를 재발견합니다.

물론 동물들의 투쟁과 사랑은 인간의 그것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우리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연 다큐의 성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쉽게 말해, 다큐(논픽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는 얼핏 보면 '있는 그대로'(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있는 그대로'라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즉, '있는 그대로'란 동물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인간의 모습(즉 인간의 자연화)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죠. 그런데 그런 '있는 그대로'는 본질적으로 자아의 확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소 어려운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실지 모르지만, 자아가 지나치게 확대되면 욕망은 욕구로서 정당화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욕망의 자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공감하실 텐데, 동물을 다룬 자연 다큐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개체의 '생존'에 있습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긴박감과 스토리는 그런 생존 과정과 관련이 있고요. 그런데 소위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존이란 주어진 본능에 의해 결정됩니다. 먹거나 먹히는 관계, 양육강식에 의해서요.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아무리 잔인한 상황이나 장면도 매우 자연스러운(당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떠올리는 '양육강식의 세계'란 그 자체로 본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세계(인간계)를 규정하기 위해 제시된 일종의 가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엄밀히 말해, 동물들에게는 생존 스토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서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소설이 아니라 회화인 셈이지요. 자신의 삶을 과거나 미래와 연관시키지 않고 온전한 현재만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의 중첩이 부재하면, 스토리가 존재할 수 없으며, 스토리가 없으며 도덕(그리고 사회) 또한 성립할 수 없지요.

김훈의 역사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의 시대와 불화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것은 해결 과정이 아닌 자연의 순리를 통해 끝을 맺게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선택들이 제시되고 있기는 합니다. <흑산>을 예로 들자면, 정씨 형제 중 누구는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죽었고, 누구는 유배를 당해 평생을 섬에서 썩었고, 누구는 천주를 배신함으로써 이후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에게 윤리적 경중을 부여하고 있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선택 모두를 무화시키는데, 문제는 이와 같은 차별성이 이에 머물지 않고 '선택적 상황'마저도 삼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김훈의 역사 소설은 역사(선택적 상황)를 제시하고 여러 가지 선택(과 그 결과)을 보여줍니다. 그런 후 새의 눈으로 그런 선택을 무차별화(즉 자연화)한 후 이내 역사마자도 무차별화하는 것으로 소설을 끝맺습니다. 요약하면, '문화의 혼란→자연의 조화'라는 구조로 소설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지요? 어떻게? 자아의 확대하여 사회(선택의 세계)를 건너뜀으로써 입니다. 욕망을 욕구로 치환하여 자연의 본성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러므로 김훈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격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흑산>에서 그것을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입교에 대한 서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흑산>은 종교 박해(선택적 상황)를 다루는 일종의 종교 소설입니다. 따라서 입교와 배교라는 선택적 상황이 소설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등장 인물은 물 흐르듯이(저항 없이) 입교를 하고("그들은 왜 천주교도들이 되었는가?"라는 물음 자체가 부재합니다) 또 자연스럽게 신앙을 지키거나 배교를 합니다.

예를 들어, 황사영이 마부 마노리에게 천주교리를 설명하는 장면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마노리에게는 그 뜻이 분명하고 손에 잡힐 듯이 확실했다. 마노리는 그 분명함에 놀랐다. 황사영의 말을 듣기 전부터 마노리는 그 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드러나지 않고 몸속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목마른 자가 저절로 물을 찾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나서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는 것처럼 분명했다. 마노리는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중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174쪽)

그런 의미에서 <흑산>의 소재가 꼭 천주교박해가 되어야 필요성은 어디에도 없다 하겠습니다. 어떤 선택도 알고 보면 내부에 본래 있는 것이 발현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것으로 교체될 수 있는 팩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김훈 문체의 비밀의 또 한 가지는 오감을 건드리는 표현들에 있습니다. 그의 문장들은 시각적인 면만이 아니라 후각적, 청각적, 미각, 촉각적 면들도 놓치지 않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것을 찾아내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잔인한 장면(처형)에 대한 묘사나 잦은 성 묘사(김훈의 에로티시즘은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출산과 유산과정에 대한 서술, 그리고 직업에 대한 기능적 묘사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처럼 오감을 강조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그것은 서사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인간의 오감은 생각만큼 민감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10분 전에 맡은 냄새를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방금 상대방이 한 말도 깜빡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의 감각력이 어느 순간 크게 향상된다면, 일상적인 삶(서사)이 거의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특정한 감각을 일정 정도 발전시켜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가능하지만('생활의 달인'처럼 말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다른 감각의 상대적인 쇠퇴는 필연적입니다. 즉 '오감총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김훈의 소설은 이런 감각을 인위적으로 증폭시켜 문장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감탄하는 문체란 이런 자극들의 총체라 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보면 다소 부담스러운 그것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서사(또는 이야기의 속도)를 조절함으로써입니다. 예컨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떤 대상을 오감을 통해 느끼기 위해서는 차가 정지하거나 최소한 천천히 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고 대상이 부여하는 감각을 흡수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 소위 멀미입니다.

하지만 김훈의 소설을 읽고 우리가 멀미를 하는 일은 없지요. (웃음) 그 이유는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입니다. 그의 소설에는 인격을 가진 인간들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앞서 언급한 '자아의 확대'(당연 이것은 인격의 축소를 의미합니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타인과 역사에 의식한다면, 온전한 감각 능력의 발휘나 충분히 거리를 확보하거나 사회를 떠났을 때 비로소 발견되는 자연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란 무색무취라는 주장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소설은 오감의 민감성을 무디게 함으로 비로소 탄생한 장르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격 축소와 관련하여 덧붙이자면, <흑산>에서 신분이 낮은 인물들(마노리, 육손이)은 동물에 가깝게 묘사되고, 정순왕후는 '말방울 세 개'로 요약되고 있지요. (웃음) 그런 의미에서 <흑산>의 주인공은 정약전이나 황사영도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도 아닐지 모릅니다. 즉, 그들 모두의 삶을 결정하고 그들을 감싸고 있는 물(강물)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릅니다(<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에서 '불'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비단 물로 둘러싸인 장소(섬)에서 벗어나지 끝내 못한 정약전만이 아닙니다. 강가에 있는 처가로 옮기게 되는 황사영은 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사영은 처가 마을 마재에 올 때마다, 산 위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강은 흐르고 또 흘러서 합쳐지고, 합쳐져서 더 큰 물을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 도성의 들을 적시고 먹이면서 바다에 닿았다. 강은 합쳐져서 스스로 새로워지면서 새로운 들과 새로운 시간 속으로 나아갔다. 흐르는 강물 위에서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앞으로 나아갔고, 그 강물이 황사영의 마음속으로 흘렀다. 마음이 강물과 같아서, 마음이 세상으로 흘러 마음으로 세상을 이룰 때 세상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었다. 그것은 푸른 강물처럼 분명했다. (63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우리는 매우 문학적인 위 문장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추적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자연(강물)과 자아(마음)의 직접적인 교감이 사회(세상) 앞에 놓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고자 합니다. 그런데 자아의 확대, 그리고 사회를 건너뛰어 바로 자연(우주)와 합일하는 김훈의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라이트노벨(또는 세카이계 소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카이계(世界系) 소설은 작은 관계(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 항(사회)을 상실한 채로 추상적인 거대한 문제(인류의 위기, 세계의 종말)와 직결되는 작품 군을 가리킵니다.)

새의 눈으로 보면, 인간계처럼 가벼운 것도 없지요. 그리고 보니 <흑산>에는 안표지 그림이 똑같이 인쇄된 엽서 같은 것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는 문제의 새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첨부되어 있군요.

이 괴수의 이름은 '가고가리'이다. 원양을 건너가는 새, 배, 물고기, 그리고 대륙을 오가는 말(馬)을 한 마리의 생명체 안으로 모았다. 시조새의 화석 사진을 보면서 그렸다. 가고가리는 가고 또 간다. 가고가리는 진화의 수 억만 년 시공을 건너서 가고 또 간다.

여기서 우리의 눈에 걸리는 단어는 아마 '진화'일 것입니다. 작가 김훈은 최근 <종의 기원>을 언급한 것으로 아는데, 미안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진화'만큼 다윈과 무관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일련의 김훈 소설들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작품들은 소재만 다른 것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 진화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웃음) 그래서 이 글도 <흑산>에 대해 논한다고 해놓고서 실은 김훈 소설을 이야기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진화를 조망하는, 또는 진화를 거부하는 가고가리 때문입니다. (웃음)

그런데 여전히 그로 인해 저에게 항의를 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부디 그것은 진화하지 않는 작품을 읽고 평해야 하는 비평가가 지겨움을 우회하는 방법 중 하나 정도로 이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보니 문득 궁금하군요. 이전에 쓴 글과 비교해서 제 글이 진화를 했는지가 말입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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