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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이 살해한 '탐정' 양근환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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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이 살해한 '탐정' 양근환의 정체는?

[해방일기] 1946년 12월 16일

1946년 12월 16일

최능진의 파면 이후 그와 조병옥-장택상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대한 제3자의 개입은 보도된 것이 거의 없다. 조병옥-장택상을 옹호하는 측과 규탄하는 측이 이미 명확하게 갈라져 있어서 굳이 의사 표시의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례적으로 혁신탐정사라는 조직의 대표 양근환의 성명서가 보도되었다.

전 경무부수사과장 최능진의 파면을 계기로 한 경무부 내의 내분 사건에 관련하여 혁신탐정사 양근환은 조 경무부장이 이번 사건의 전책임을 지고 사직하라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경찰 수뇌부로서 근신치 않는 태도에 분개하는 동시에 경고를 발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6년 12월 15일자)

탐정사? '탐정'이라면 누구에게나 셜록 홈즈가 떠오를 텐데, 해방 당시에도 그랬을 것 같다. 1930년에 죽은 코넌 도일의 작품은 일제 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니까. 경찰 아닌 민간인으로서 범죄를 조사한다는 의미의 탐정사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조병옥의 대응은 명쾌했다.

사설 탐정사 등은 법령 28호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17일 경무부에서는 부장 명의로 다음과 같이 발표를 하였다.

"시내 수송동 46번지의 1호에 본거를 둔 혁신탐정사는 16일부로써 그 해산을 명하였다. 그 해산 명령은 그 기관 대표자인 양근환에게 전달하였다. 원래 사설탐정사는 군정청에서 승인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 혹은 집단을 불구하고 이러한 기관을 운영하는 사실이 발견되는 때에는 그 행위는 1945년 11월 13일부 군정청법령 제28호 제3조에 해당한 범죄다. 그러므로 그 사실은 즉시 경찰에 보고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18일자)

1945년 11월 혁신탐정사의 설립에 관해서는 이런 기사가 있었다.

"반역자에 단(斷)! - 義士 양근환 씨 성명"

과거에 일본 제국주의에 사신(捨身) 투쟁하여 친일파의 거두 민원식을 암살한 의사 양근환 씨는 조선 해방 이후의 혼란 상태와 정당 대립을 우려하여 여운형 안재홍 허헌 송진우 씨 등 정계 거인을 일당(一堂)에 초청하여 통일을 종용한 바 있었는데 씨는 기후 동지를 규합하여 혁신탐정사를 창설하고 건국도상의 암흑면을 탐정하여 반동분자의 발호를 봉쇄하려고 기도하고 있는데 동 사두로서 다음 같은 일문을 초하여 동포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8월 15일 이후 벌써 3삭여가 지났다. 현하 정치적 정세는 매우 혼돈하여 국민 대중이 바야흐로 희구하는 대동 단결 자주 독립 완성은 하시일에 도래할는지 참으로 막연하다.

나는 기간 정관(靜觀)하였다. 그러나 우리 국민 대중이 절실히 바라는 민족 통일 전선과는 딴 방면으로 분열의 길로만 질주하고 있으니 이것은 누구의 소위(所爲)인가. 그들은 즉 친일파 민족 반역자 매국노 또는 경제 교란자들의 음흉한 술책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나는 본다.

3000만 동포에게 나는 엄숙히 선언한다. 민족 통일 전선을 방해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매국노 또는 경제교란자들은 각오하여라. 너희들에게는 민족의 존귀한 피로서 물들여주려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범주를 규정한다. 그러나 이 기준 밑에서 최후적 결정권은 우리 신 정부에 있지만 위선 잠정적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교란하는 사이비 민주주의자는 곧 처단하려 한다. (...)" (<자유신문> 1945년 11월 29일자)

양근환(1894~1950년)은 천도교 계열 민족주의자로서 1921년 도쿄에서 당대 친일파로 명성 높던 민원식을 찔러죽이고 11년간 일본 감옥에서 복역한 사람이다. 해방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탁치반대국민총동원회에 중앙상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위 기사 내용대로 1945년 가을 그가 정당 통합 운동에 나섰던 사실은 1946년 7월 12일 송진우 살해범 한현우 공판에 정당 통합 운동에 관한 증언을 하기 위해 안재홍과 함께 증인으로 출석한 사실로 확인된다(<자유신문> 1946년 7월 13일자). 1950년 7월 인민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고 한다.

1946년 가을 혁신탐정사 개혁 보도 기사를 보면 그 조직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총재에 양근환 씨-혁신탐정사 개혁"

친일파 민족 반역자 등 건국도상에 장해가 되는 일체 불순분자의 소청(掃淸)을 목적으로 활동 중인 양근환 씨를 사두(社頭)로 한 혁신탐정사는 기구를 개혁해서 위원제로 하고 양근환 씨를 총재로 추대, 그 직속으로 별탐대를 도구 위원장에는 손기업 씨가 취임하여 총무부 감찰부 등 6부를 두고 활동을 강화할 터이라 한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28일자)

이 '탐정사'는 영리를 위한 회사가 아니라 투쟁을 위한 결사였던 것이다. 이사장을 맡은 손기업(1905~1985년)은 중국 천진 지역에서 조선혁명당총동맹 소속으로 일제 주구 숙청과 일제 고관 암살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33년부터 10년간 여순 감옥에서 복역한 인물이다. 양근환과 손기업, 두 지도자의 프로필로 볼 때 혁신탐정사는 식민지 시대 폭력 항쟁의 전통을 이은 조직으로 보인다.

폭력 항쟁의 전통을 이은 조직이라면 백의사가 떠오른다. 이북 공산주의 지도자 현준혁 암살, 1946년 3월 일련의 평양 테러 활동, 1947년 7월의 여운형 암살에서 1949년 6월의 김구 암살에 이르기까지 백의사의 이름은 해방 공간의 여러 정치 테러를 둘러싸고 오르내렸다. 지금까지 내 조사로는 그 맥락이 명쾌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더 조사한 다음 설명할 기회를 찾도록 하겠다.

혁신탐정사는 백의사와 달리 공개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양근환이 후에 인민군에게 처형당한 사실에 비추어서도 우익 성향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이고, 항일 경력을 통해 우익 진영에서 존중받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 최능진이 경찰 내에서 조병옥-장택상의 경쟁자였다면 양근환은 우익 내에서의 경쟁자였던 셈이다. 10월 말 이래 조비공위의 비판 앞에 위기에 처했던 조병옥은 12월 초 미군정의 재신임으로 이 위기를 넘긴 후 경쟁자 제거에 거침없이 나섰던 것이다.

한 가지 일을 덧붙여 적어 둔다. 한민당은 12월 13일 담화문을 통해 합작위를 비난하며 그 해산을 촉구했고, 합작위는 그 이튿날 이를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민당 선전부에서는 13일 기자단에게 여좌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1) 금반 창설된 입의(立議)에서 서울시와 강원도 대의원이 결정되기 전에 개원한 것이며 특히 의원 구성 의원이 전원의 4분지 3임에도 불구하고 개회 전 즉각 법령을 개변하여 법령의 공포도 없이 전 의원에 통고함도 없이 실시한다고 선언하고 개회한 것은 아무리 군정 하라 할지라도 있을 수 없는 위법 행위다. 본당 출신 의원은 상기 지구 의원이 결정될 때까지 개원의 연기를 요청하고 그때까지 출석하기를 보류하고 있거니와 군정청이 이같이 법령을 자의로 개변하여서까지 전제 독단을 감행함에 있어서는 의연히 기(起)하여 그 비민주적임을 지적하고 민의 민권을 옹호하기 위하여 항쟁할 결심이다.

2) 본래 합위의 사명은 좌우 합작으로서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데 있었는데 결과로 보면 좌우 양대 세력을 이탈시키고 어떤 정책을 공동히 하는 정치 행동 분자와 정실 관계의 인물만을 관선으로 선정하여 일종 중간당적 정당을 구성하였다. 이런 좌우 합작은 3000만이 원치 않을 것이며 그 해독이 만천하에 침투할 것이다. 입의 개원을 계기로 당파적 편파적 동 위원회를 속히 해산함이 당연하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14일자)

한민당 선전부 담화 중 합위 해산을 운운한 점에 대하여 합위 선전부에서는 14일 요지 다음과 같은 반박 성명을 발표하였다.

"본 합위를 중간당이나 정당화한다는 부당한 언사로 비난 공격하여 한민당의 무지를 폭로하였다. 합위가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합위의 7원칙은 3000만 민족의 철칙이다. 다만 합위로서는 이 실천에 대하여 광범한 민주 세력을 규합하여 남북 통일 정부 수립에 매진하고 있으니만큼 오직 조선 민족의 당면한 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일 것이며 한민당의 주장은 전 민족적 요청을 거부하는 민족분열행동이다. 그리고 관선 의원 추천에 있어 정실관계 운운은 한민당의 자당 자파 독점욕에 나온 만부당의 중상이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15일자)

여름 이래 좌우 합작이 진행되는 동안 한민당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10월 초 합작위의 7원칙 발표에 대한 한민당의 반대는 우익 통합 세력의 성격을 포기하고 '지주당'의 본색을 분명히 한 반동 노선이었다. 이로 인해 원세훈과 김병로를 필두로 한 민족주의자와 중도파가 한민당을 탈퇴하고, 노선을 좁힌 한민당은 입법의회를 세력 근거로 확보하면서 중도파의 발판인 합작위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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