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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이 된 독일 vs 후진국이 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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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이 된 독일 vs 후진국이 된 한국

[해방일기] 1946년 12월 14일

1946년 12월 14일

1943년 11월 창설된 운라(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의 전후 활동을 1946년 8월 22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그 이름의 "United Nations"는 '국제연합'이 아니라 전쟁 중의 '연합국'을 가리킨 것이다. 연합국의 전쟁 피해 회복을 연합국끼리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는 참전 연합국 외의 전쟁 피해국까지 지원 범위를 넓혔다. 패전한 추축국만이 운라의 지원 대상 밖에 있었다.

중국, 폴란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는 각각 4억 달러 이상의 운라 지원을 받았다. 조선도 운라의 지원 대상이었지만 실제로 받은 지원은 아주 적었다. 1946년 운라의 조선 지원액은 100만 달러였는데, 이것은 본격적 지원 계획을 위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의 시작을 위한 착수금 격이었다. 그런데 1946년 5월에서 7월 사이에 조선 남북의 조사가 행해졌는데도 추가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38선 때문에 "물자 자유 교류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47년 운라의 조선 지원 계획도 100만 달러에 머물렀다.

[워싱턴14일발AP 합동] 극동에 있어서의 명년도 운라 업무는 다음과 같다.

중국=운라 정책 하에 현재 수선되고 있는 황하 제방 공사로 인하여 200만 에이커의 경작지가 개발될 것이며 한편 중국에 배당되고 있는 5300만 불의 운라 구제 사업은 중국의 정치 군사 사태가 용인할 정도로 1947년 내에 완료시킬 계획이다.

필리핀=미국에 배당되고 있는 1200만 불의 구제 업무는 1947년도에 완료될 것이며 이것은 주로 식량 의류 직물 신 의료품 농구 공업 시설품 등이다.

조선=조선의 구제 업무로서는 약 100만 불이 배당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의류 의료품 트럭 등이라 한다. 그리고 상당한 수의 트럭은 이미 미소 양 점령 지구에 발송되었으나 조선 정치 상태로 인하여 운라 전 업무가 수행될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15일자)

이번에도 문제는 분단 점령에 있었다.

[워싱턴13일UP발 조선] 11일 당지에서 개최된 운라 이사회에서는 조선에 대한 구제 문제로 인하여 라가디아 운라 총재와 페오노프 소련 대표 간에 의견의 충돌을 보았다. 페오노프 소련 대표는 운라가 조선을 차별 대우하였으며 소련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운라 구제 계획 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라가디아 총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운라 이사회의 승인이 없는 한 조선에 대한 구제 자금을 할당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예를 보아서도 운라가 군사 당국이 점령하고 있는 나라에 진출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것이다. 설사 조선에 대한 자금이 할당되었었다 하여도 미소 양국 이사가 조선을 구제목적을 위한 단일체로 취급하도록 조처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운라는 조선에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소련이 승낙하지 않았다. 운라 이사회는 이미 결정된 내년도 구제 계획을 변경하는 것은 삼가하여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14일자)

1947년까지 운라의 활동 기금 37억 달러 중 27억 달러를 미국이 출연했다.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운라 총재를 맡은 세 사람, 허버트 레먼(1944년 1월~1946년 3월), 피오렐로 라가디아(1946년 4월~1946년 12월), 로얼 룩스(1947년 1월~1948년 9월) 모두 미국인이었다.

운라의 조선 지원 외면도 미국 정책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하겠다. 8월의 총회에서도 12월의 이사회에서도 소련 대표는 여기에 항의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라가디아 총재는 거듭해서 미군과 소련군의 협조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조선은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 사실을 운라 조사단도 확인했다. 그런데 운라가 조선 지원을 외면했기 때문에 조선의 남반부와 북반부는 각각 미국과 소련의 개별적 지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나라에 대한 남북의 경제적 종속 상태는 분단 건국을 향한 중요한 조건의 하나가 되었다.

운라의 조선 외면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추진에 도움이 된 셈인데, 이승만의 1946년 7월 8일자 담화문에서 라가디아 총재와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한 대목이 흥미롭게 보인다. 기사 중 라가디아의 이름이 "타라디에"로 되어 있으나 관계 사항이 모두 일치하므로 단순 착오로 보인다.

"운라에 참가되기를 우리가 수차 청원하였으나 여러 가지 관계로 지체되어 오늘까지 아무 보조를 받지 못하고 지내오던 바 얼마 전에 구제 회장 라이만 씨가 사임하고 뉴욕 시장 타라디에 씨가 취임된 바 씨는 한국 독립에 특별히 동정을 표하는 친우이므로 작년 3·1 경축일에 워싱턴에 있는 한국위원장을 청하여 정식 환영하는 예식을 하였고 따라서 우리 청년들로 경찰 사무를 공부할 학생을 얼마든지 추천하여 보내면 무료로 공부시켜 주마고 하였고 기외에도 여러 번 호의를 표하였었는데 지금 만국 구제 회장에 취임하여 한국 구제책을 공개 선언하였으며 메저·싸젠트 씨를 서울에 보내어 얼마 전에 착경하였으므로 우리의 정상을 조사한 후에는 특별한 구제 방책이 있을 것으로 믿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9일자)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은 원자폭탄의 독점과 함께 소련에 대한 적대 정책의 발판이 되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골자는 "소수의 무장 세력 또는 외부 세력의 위협에 저항하는 자유민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지원의 내용은 군사적 지원도 포함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지원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130억 달러를 지출한 마셜플랜이 그 주축이었다.

마셜플랜이 가동되기 전인 1945~47년간 미국은 이미 140억 달러 이상을 원조와 차관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전쟁 중 연합국 진영에서 미국은 경제적 보루의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 전쟁 후 경제 원조 제공은 전쟁 중의 역할에서 자연스럽게 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셜플랜은 경제 원조의 역할을 체계화함으로써 냉전의 무기로 발전시킨 것이다.

운라의 지원도 실제로는 미국 돈으로 이뤄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국제적 합의라는 명분이 있었다. 조선은 운라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고 남조선은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야 했다. 미국은 1946년 중 식량 등 구호 물자 원조 외에 전쟁 잉여 물자 구입을 위한 2500만 달러를 조선에 제공했다. 본격적 경제 원조는 1947년 중 시작된다. 미국 입장에서 그 원조의 의미는 그 무렵 구체화되어가고 있던 마셜플랜과 같은 맥락 위에 있는 것이었다.

마셜플랜은 서유럽 경제를 소생시킨 묘방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심화하는 수단이었다는 점, 부패한 '원조 경제'를 세계 도처에 만들어낸 점은 시행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이 되어 왔지만, '경제 회복'이라는 대명제에 비하면 작은 흠으로 여겨진다.

유럽 경제 소생에 대한 마셜플랜의 공헌이 과대평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하나의 관점이 근년 미국 경제의 침체와 혼란에 따라 새삼 각광받고 있다. 라인 강의 기적, 즉 독일의 부흥이 유럽 경제 소생의 핵심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독일의 부흥은 마셜플랜의 지침과 달리 국가와 중앙은행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이뤄졌다고 하는 것이다. 아데나워 정권에서 14년간(1949~63년) 경제장관을 지내고 이어 수상을 지낸(1963~66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다. 소련 점령 지역이 동독, 나머지 3개국 점령 지역이 서독으로 분단 건국에 이르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서독 출현의 첫 단계가 1947년 1월 영국-미국 점령 지역의 양자 통합 정부(Bizone) 출범이었다. 통화 개혁을 비롯한 서독 체제의 준비가 이 통합 정부에서 진행되고, 1948년 3월 프랑스 점령 지역까지 합친 3자 통합 정부(Trizone)를 거쳐 1948년 5월 독일연방공화국이 되었다.

이 일기를 시작할 때(1945년 8월 4일자) 연합국들, 특히 미국이 독일의 산업을 철저히 해체해서 재기의 가능성을 없애려 한 '모겐소플랜'을 설명했다. 이 방침을 구체화한 합참명령 1067호가 1945년 5월부터 1947년 7월까지 독일 경제를 옥죄었다. 1947년 봄 독일을 둘러본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은 일반 독일인의 영양 상태가 나치 수용소보다 별로 낫지 않다고 한탄했다.

합참명령 1067호가 결국 폐기된 것은 독일인들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하고 유럽 경제 부흥에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1946년 12월 영국과 미국이 독일의 양자 통합 정부 설치를 논의한 것도 더 이상 소련과의 협조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독일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분단 점령에서 분단 건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서독의 경우 미국의 단독 관리 아래 있지 않았다는 것이 조선에 비해 주체적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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