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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부처의 일생'을 한글로 펴낸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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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부처의 일생'을 한글로 펴낸 진짜 이유는…

[기고] <뿌리 깊은 나무>가 말하지 않은 것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자신이 어디에서 연원했는지 까먹은 모양이다. 세종의 개인적 실존적 고민만 부각되는 이 드라마의 내용과 제목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용비어천가>에 담긴 이 말은 앞선 조선 건국의 시조들을 찬양하여 조선 왕조의 뿌리가 깊으니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글을 통해 처음 만든 것이 바로 이 <용비어천가>다. 세종은 한글로 자신의 조선 왕조와 조선 개국을 찬양하는 글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글 창제의 목적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바로 세종은 선전 선동과 국정 홍보를 위해서 한글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극중에서 세종이 새로운 글자로 처음 만든 것이 <석보상절>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석보상절>은 밀본 본원 정기준의 말대로 불씨의 일대기, 석가모니의 일생을 담은 책이다.

잠시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면, 정기준은 한글로 성리학적 세계를 백성에게 알릴 수 있다면 효과적이라는 세종의 말에 그간의 생각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성리학적 세계가 더 빨리 백성에게 구축되니 한글을 애써 막을 필요는 없겠기에 말이다. 그런데 <석보상절>을 보고 생각을 바꾼다.

정기준은 새로운 글자로 처음 만든 책이 성리학 관련 책이 아니고 불교에 관한 책이니 세종(이도)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한다. 분노한 정기준은 광평대군을 시해하기에 이른다.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새로운 글자의 반포를 방해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세종이 한글을 처음 만든 뒤 간행한 것이 <석보상절>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세종의 명에 따라 정인지 등이 만든 간행물은 <용비어천가>였다. 세종 27년 1445년이었다. <석보상절>은 1446년 소헌왕후가 죽자 명복을 빌고자 수양대군 등을 시켜 1447년 만들었다. 내용은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담았다.

ⓒSBS

드라마의 설정은 정작 한글로 처음 만든 것이 <용비어천가>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말았다. <용비어천가>가 조선 개국의 정당성과 왕조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었음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는 데 말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스토리 컨셉트를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이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한글의 목적은 세종이 백성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조선 왕조를 위해서 만든 글자인 것이다. 국가에서 학교를 만드는 이유와 같다. 백성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산업 시대에 부르주아지의 전위였던 국가는 학교를 통해 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배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육 체제에서는 깊은 지식과 교양을 가르치기보다는 읽고 쓰고 산술하며, 간단한 조작 중심의 교육을 담았다.

한글의 목적도 이와 마찬가지로 <용비어천가>를 지어 조선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을 조선 통치 논리로 세뇌시키려 했다. 무엇보다 문화 전략 차원에서 <용비어천가>가 노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노래는 입으로 부르는 것이고 한글은 표음 문자였다. 이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백성들이 노래로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따르기를 바란 것이다.

세종에게 성리학보다 급한 것은 그것이었다. 왕권의 확립과 지지 없이 조선이 존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각종 발명품들을 만든 것도 조선 왕조가 백성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말 백성을 사랑했다면 백성과 지역 세력에게 자유를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드라마는 교묘하게도 세종이 처음에는 백성을 사랑해서 만들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나중에야 세종이 개인적 욕심 때문에 글자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더 성공시키기 위해 불경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실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 욕심으로만 치부하여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국정 운영의 혼란과 딜레마가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 시기는 불교와 성리학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000년 이상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불교는 일반 민간에 뿌리가 깊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유생과 사대부들은 불교를 혁파하라고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엘리트 집단은 성리학으로 완전 교체가 되었지만, 민간에서 불교는 학문이나 국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영혼을 지배하는 종교였다. 불교의 완전한 혁파는 민심이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국 초기에 민심이반은 치명적인 것이다. 신권보다 더 신경 써야할 것은 조선을 받들 백성의 확보와 지지였다.

글자를 통해 일정한 정책과 국정 홍보와 선전이 필요한데 글자에 대한 관심을 끌려면 사람들이 잘 아는 내용, 흥미 있어 하는 내용을 담아야 했다. 그래야 적극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석가모니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고도의 문화 전략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드라마에서 세종의 말대로 얼마 전까지 고려의 백성이었던 이들이고 불교를 숭상하던 나라가 고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려만이 아니라 삼국 시대 통일 신라, 후삼국을 거치는 장구한 세월에서 형성된 문화적 토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한꺼번에 없앨 수가 있었겠는가.

새로운 미디어도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익숙한 내용, 재밌는 내용을 담아야 집중하는 법. 그러나 성리학은 재밌는 이야기이거나 일반인들이 잘 아는 내용도 아니다. 머리 아픈 성리학의 논리를 한글로 대대적으로 편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성리학을 백성이 모두 다 섭렵한다면, 사대부를 비판하고 권위를 뒤엎으려 할 것이다.

물론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을 한글로 만들어 읽히는 것은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기 때문에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제왕과 제왕을 보필할 이들의 학문이었다. 글자와 학문은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성리학은 한자로 존재할 때 의미를 가지며 사대부들, 위정자들만이 공부하여 할 것이었다. 백성들은 쉬운 글자로 의사소통을 아니 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간단한 유학적 가치였고 그것은 통치 질서를 위해 긴요한 반면 그 이상도 아니었다. 따라서 성리학 경전을 한글로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한글을 어떤 목적으로 누가 만들었는가가 아니다. 한글을 지키고 오늘날 세계적인 글자로 형성시킨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세종 이후에 왕족들과 사대부들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한글을 지킨 사람들은 민중, 민초들이었다. 무엇보다 조선에서 천대받고 핍박을 받았던 여성들이 지켜냈다. 특히 그들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한글을 올곧게 잇고 이어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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