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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세 칸의 삶, 그래도 사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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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세 칸의 삶, 그래도 사랑스러워!

[親Book] 호연의 <사금일기>

"언니의 단점은……. 진지하다는 거?"

졸업을 앞두고 서울을 떠났다.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숲 속 어딘가 예쁜 집을 빌렸다. 모닥불을 곁에 끼고 고기도 구워 먹었다. 으슥한 밤, 옹기종기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한껏 분위기에 취했을 즈음 진실 게임을 했다. 여기 있는 애들 단점을 말해야 했다. 옆 동네라 종종 집에 같이 가는 동생이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요즘 따라 이 말이 자주 떠오른다. 그리고 나를 가둔다.

"성격이 독특해."
"자세가 안 됐어."
"하는 게 뭐야?"

나는 주목 받는 사람도 아닌데 어쩌다 이런 말을 듣게 됐을까.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나는 이상한 사람이구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뻔했다. 나는 안다. 조금 내성적이거나 사회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행복한 삶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나를 울리고 이상하다고 말하니 마음이 우울하고 표정 관리가 안 된다. 너무 괴로워서 쉬이 힘을 얻고 싶을 때 나는 만화책을 꺼낸다.

만화책을 즐겨 본 지는 얼마 안 됐다. 한때 만화가를 꿈꾸었다는 남자 친구를 따라 한두 권씩 읽기 시작했을 뿐. 그러다 <비빔툰>(홍승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을 보고 생활 만화에 푹 빠져버렸다. 삶의 고단함을 깜찍한 상상력으로 이겨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다소 싱거웠지만 <낢이 사는 이야기>(서나래 지음, 씨네21 펴냄)를 통해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동시대인의 비애를 느꼈다. <요츠바랑>(아즈마 키요히코 지음, 대원씨아이 펴냄)을 보면서는 걱정 없는 아이가 된 착각에 행복해졌다.

"가난하고 이상한 사람이어도 죽지 않고 견디면 언젠가 상 받을라나."

▲ <사금일기>(호연 지음, 애니북스 펴냄). ⓒ애니북스
호연의 <사금일기>(애니북스 펴냄)는 백수부터 대학생, 사회인이 되기까지 약 9년간 틈틈이 쓴 만화책이다. 모래알 같이 무수한 하루 속에서 발견하는 소중한 순간들인 사금(砂金)을 그려냈다. 재밌는 사금도 있고, 슬픈 사금도 있고, 알 수 없는 사금도 있다. 제목과 날짜, 세 칸뿐인 흑백 그림은 단순하지만 개인의 일상사를 부족함 없이 드러낸다. 오히려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구도를 활용해 삶과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의인화된 주변 인물은 이 책이 만화임을 잊지 않게 해주며 유쾌한 소동으로 미소를 자아낸다.

"고된 일이 겹치면 눈물을 흘리고 언제 또 다시 기운을 차리다니 이 얼마나 재미없는 각본인가."

띠지의 문구는 기존과 다른 생활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고 쓰여 있다. 또 다른 자아를 꿈꾸었을까.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배경으로 자기 삶과 우리 그릇의 유사성을 담아낸 전작 <도자기>(애니북스 펴냄)와 달리 작가의 분신은 남자다. 우유에 콘플레이크를 타 먹고, 무협지와 클래식 감상을 즐긴다. 피아노를 치고 자전거를 타며 진심으로 행복해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비슷해서였을까. 은연중 그의 삶에 부러워하고, 완전한 절망도 희망도 아닌 단상에 마음이 기운다.

"오늘을 많이 죽이고 싶어 사람과 함께함이 이토록 괴로울 줄"
"사람에게 실망해도 다시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내겐 프리랜서에 대한 막연한 선망이 있다. 사람과 안 부딪히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일 없어 보이는 것처럼 비칠까 전전긍긍하는 게 싫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는 백석 시인의 말처럼 떠나고 싶다. 그러나 사람을 안 보며 살 순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제 아무리 혼자 일한다 해도 어쩔 수 없구나.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구나.' 비겁하게도 누구나 사람을 힘들어한다는 점이 위안을 준다.

"그 앤 너랑 나이가 같은데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대학도 다니고 장학금 받고"
"이야! 그 놈 참 나쁜 놈이네요 지 혼자 잘났으면 됐지 우리 집 어른 분들이 절 병신 취급하게 만들고 전 그런 나쁜 놈 안 될 테니 걱정 마세요. 이 날 밥상이 뒤집어져도 의외로 그릇이 잘 안 깨진다는 걸 배웠다!"


비교 당한다 해도 '인생 뭐 있어?' 꿍얼대며 가볍게 넘어가고 싶다. 남이 내게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당당해지고 싶다. 누군들 진지하게 고민하며 피곤하게 살고 싶으랴. 무슨 말을 들으면 가슴 속에 묵혀 놨다가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졸렬하다. 상상과 유머의 힘이 부족한 나는 이렇게 만화책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반면 쿨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애초에 내 것인 것은 어느 것도 없었으니 잃은 것도 잃을 것도 없다 (…) 그렇게 말했지만 슬퍼져서 술을 마시는 우리."

살면서 그까짓 말 좀 들었다고 잔뜩 수그러진 내가 가련타.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대충 살자고 생각도 했다. 그 동안 묵묵히 내 길을 걷자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누가 알아주면 뿌듯하고 몰라주면 우울하던 지난날을 몇 번이나 반성했던가. 나보다 더 심한 말 듣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 이도 많은데 무슨 투정이 그리도 많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내가 부끄럽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내 모습을 이해하고 싶다.

"밥 먹는 법은 1년이면 배우는데 사는 법은 28년 배워도 서투르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내게 면죄부를 준다. 어려서 그렇다고. 미숙해도 봐달라고. 나이 들면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나의 이 날도 사금 같다는 것. 슬픔도 나를 형성한다는 것. 그래서 모든 날은 소중하다. 뿌리치지 말자. 다시 반복되는 일기를 적는다. 울고 웃는다. 요즘 따라 우는 일이 많았을 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주말에 영화를 본다. 공원에 올라 바람도 쐰다. 차를 마신다. 남자친구의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다행이다 나는 내가 참 좋아 내 옆의 너를 끝까지 사랑할 자신도 있지 이 세상도 아름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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