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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기다리며 감방에서 쓴 오페라, 세상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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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기다리며 감방에서 쓴 오페라, 세상은 울었다!

[서경식이 말하는 윤이상] 음악과 정치성

최근 경상남도 통영은 한 인물을 둘러싼 논란으로 진통을 겪었다.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1917~1995년)이다. 보수 단체들은 윤이상이 '반국가 행위'를 했다면서 통영에서개최되어 온 윤이상 음악제를 과격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같은 곳에서 추모제와 규탄 대회가 동시에 열린 것이다.

통영에서 유년기를 보낸 윤이상은 일본 오사카 상업 학교에 다니면서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고, 광복 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1960년대 베를린에서 서양 음악에 동아시아의 음악 요소를 접목시켜 세계적 음악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박정희 정권이 윤이상을 유럽의 다른 유학생과 함께 간첩으로 몬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윤이상의 수감에 항의하는 구원 활동이 펼쳐졌고, 그는 1969년 석방된다. 그러나 이후 한국은 그의 입국을 허하지 않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금지했다. 사망 11년이 지나서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이 '과장되고 확대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런 이 나라에서 그 이름에 덧씌워진 '친북' 딱지는 여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그 이름 석 자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그의 음악 역시 유독 고국에서만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예술을 만드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족 통일과 전쟁·가난 등 사회, 정치적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여러 활동을 펼친 것도 사실이다. 곡들 역시 그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복잡해진다. 음악과 정치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한 예술가의 정치적 족적과 예술적 결과물을 어떤 연관 관계로 파악해야 하는가? 그를, 그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해야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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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서양 음악 순례>(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창비 펴냄). ⓒ창비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의 눈으로 예술과 언어를 바라보고, 미술 작품과 시 속에 드러난 삶과 정치성을 추적해 온 서경식 도쿄게이자이 대학 교수가 이번엔 <나의 서양 음악 순례>(한승동 옮김, 창비 펴냄)로 돌아왔다. 이 책은 그의 "동반자이고 벗이고 아내이며, 때로는 딸 같기도 한 여성"인 'F'와 함께 한 시간들과, 그 속에 등장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이다.

책에서 서경식 교수는 많은 장을 할애해 윤이상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 치열한 음악 세계를 탐구한다. 그에게 동백림 사건으로 고국에 영영 돌아올 수 없었던 윤이상은,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된 두 형의 옥바라지를 20년간 해야 했던 그 자신의 모습과도 겹쳐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윤이상을 정치적 수난자로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의 음악과 정치성의 입체적인 조화를 강조한다.

책 발간을 기념해 지난달 말 한국을 찾은 서경식 교수가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저자 강연회를 열었다. 주제는 '음악의 정치성에 대하여'. 바로 윤이상의 삶과 음악을 둘러싼 주제다. 서경식 교수는 "윤이상 선생은 자신의 예술적 면모와 정치적 면모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통일시키려 했던 드문 천재였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이날 강연은 일본 NHK에서 만든 윤이상에 대한 다큐멘터리 상영 후 평화박물관 김영환 씨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윤이상이 살았던 서베를린 자택의 모습에서 시작되는 다큐멘터리는 윤이상의 인생과 음악을 한 가닥씩 촘촘하게 엮어 보여준다. '프레시안 books'는 다큐멘터리 영상, 영상에 대한 서경식 교수의 언급 그리고 강연 후 이어진 질의 응답을 정리했다. <편집자>


▲ 서경식 도쿄게이자이 대학 교수. ⓒ프레시안(김하영)

옥중의 작곡

고교 시절(1960년대 중후반), 윤이상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선 하나도 몰랐다. 당시만 해도 내 마음 속 그의 존재는 '동백림 사건의 희생자' 정도였다. 잘은 모르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조선의 작곡가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 없는 자긍심이 있었고, 그런 분이 비합리적인 이유로 고통을 겪었다는 것에 대한 착잡함이 있었다.

1971년, 모국으로 유학을 가 있던 나의 형 둘이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갇혔다. 곧바로 형들의 구원 활동에 들어간 내게 동백림 사건은 전보다 훨씬 더 절박한 것으로 다가왔다. 국제 여론의 힘으로 희생자 원상회복을 실현한 그 사건의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더 깊이 공부하고 조사하게 되었다.

▲ 윤이상(1917~1995년). ⓒ연합뉴스
그는 독방에서, 그리고 병으로 보석을 받고 수용된 병실에서 연필과 오선지만으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8년) 등 3곡을 작곡했다. 감옥에선 연필 소지가 금지되지만, 서독 정부와 국제 여론에 힘입어 윤이상 선생은 연필을 쥘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그의 오페라가 상연되었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성공을 일각에선 정치적인 구명 운동의 일환으로만 보는데, 작품 수준이 낮으면 그것도 실현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당국(중앙정보부)은 그것이 정치적 암호가 아닌지 의심하여 예술 대학 교수에게 악보 감정을 의뢰했다고 한다.

깨진 창문으로 영하의 한기가 스며드는 그곳에서, 그는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나가면서 조금씩 음표를 써내려갔다. 독방엔 책상도 없고, 차가운 마룻바닥 밖에 없었다. (…) 곡을 쓰는 것은 그에게 구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NHK 윤이상 다큐멘터리 중)

"작곡을 통해 감옥에서의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윤 선생의 말. 어떤 사람들은 나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이 행위야말로 가장 강인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예술'이라는 다른 척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치적, 윤리적, 경제적 등 여러 가지 삶의 척도를 갖는데, 윤이상 선생은 '예술'이라는 또 다른 척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있을 때도 '살 만한 삶'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해외를 중심으로 윤이상 구원 활동이 펼쳐졌고, 그는 무기징역에서 20년, 10년 형으로 재차 감형되다가 1969년 석방되었다. 서독으로 추방되었고, 대한민국 입국 자격을 빼앗겼다. 이때부터 그는 해외에서 민주화 운동에 힘을 쓰게 된다. 특히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을 보고 해외에서의 구명 운동에 집중하기로 더욱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하다

허나 그때에도 역시 내 관심은 윤이상 선생의 예술이 아닌, 정치적 수난자로서의 측면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변한 사건이 있다. 윤 선생과의 첫 번째 만남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1981년 말 그와 루이제 린저의 대담집인 <상처 입은 용> 일본어판(<傷ついた龍ー一作曲家の人生と作品についての対話>)이 나왔다. 사회당 도이 다카코(土井多賀子) 의원의 비서인 고토 마사코(五島昌子) 씨가 도쿄에서 열린 이 책의 출판 기념회에 초대를 해주었다. 고토 씨는 형들의 구원 운동에 중요한 지원을 해주었던 분이다.

당시 나는 30대 초반으로, 출판 기념회 참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 이유로 윤이상 선생께 꽃다발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워낙에 말수가 적은 윤 선생을 앞두고 엄청나게 긴장했지만, 그는 내가 정치적 희생을 당한 사람의 가족이란 이유도 있어선지 특별히 더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들었다. '가사(Gasa for Violin and Piano)'라는 곡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연주되었지만 강한 흡인력을 느꼈고, 거기서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Piri for Oboe Solo)>의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했다. 음악은 굉장했다. 재일 조선인 2세인 나는 조선의 전통 악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당연히 피리 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주된 오보에 음에서 피리를 재발견한 게 아니라, 반대로 오보에 연주에서 거슬러 올라가 나 자신은 몰랐던 내 뿌리의 음악, 피리의 음색을 상상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하에서 '민족 중흥'이라는 구호로 국수주의적인 민족 음악이나 관광 상품화된 민족 음악이 권장되던 시기였는데, 윤 선생이 보여주는 '민족성'은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조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뭔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보편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정치, 사회적인 아이덴티티에 대해 고뇌해 온 내게 윤이상 선생의 음악은 '나는 누구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압도적인 고뇌를 음악이라는 측면에서 또 한 번 마주하게 했다.

'민족성'을 넘어

오늘 복사물을 나눠드렸는데, 그 원본은 1984년 일본 군마(群馬) 현 쿠사츠(草津) 고원에서 열린 '쿠사츠 국제 음악 아카데미'에 찾아갔을 때 구입한 악보다. 4320엔이라는 거금이었는데, 윤이상 선생 사인을 받으려고 샀다. (웃음)

이때가 윤이상 선생과 나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기간 중 그의 작품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윤이상의 밤'이라는 콘서트가 열렸고, 그 마지막에 소프라노와 실내 앙상블을 위한 '밤이여 나뉘어라(Teile Dich Nacht)'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윤이상 선생이 1980년 광주에 대한 보도를 접한 뒤 작곡한 것이다. 부인인 이수자 여사는 윤 선생이 '울면서' 곡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악보에 노벨상 수상 시인 넬리 작스(Nelly Sachs)의 시가 적혀 있다. 유대인인 작스는 나치 시대에 박해를 받았고,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시를 썼다. 작스는 스톡홀름의 아파트에서도 나치가 자신을 도청하거나 감시한다는 피해망상과 그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독하게 세상을 떴다. 이 시가 작스의 '밤이여 나뉘어라'이며, 윤이상은 거기에 곡을 붙인 것이다.

나뉘어라, 밤이여
너의 빛나는 두 날개는 경악으로 떨고 있다
내가 가서
피비린내 나는 지난밤을
되돌려놓고 오겠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점이 있다. 원래 윤이상 선생은 서양 음악, 특히 현대 음악을 해왔는데, "당신만의 뿌리에서 나오는 독창적인 음악을 만들어라"라는 스승 보리스 블라허 교수의 가르침을 듣고 조선 민족의 음악을 서양 음악에 접목해 아주 독자적인 음악을 창조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다시 보편성에 주목했다고 할까, 조선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고통-시의 배경인 유대인의 고난처럼-에 깊이 공감하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불안을 직시하는 음악 예술

곡이 탄생하고 10년 뒤 동서 독일이 통일되었는데, 그로서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하나는 자신의 출신지인 조선에서는 아직도 분단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가 살던 서베를린 교외 지역을 포함해, 여러 곳에서 극우파들이 베트남 이민자 등 소수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남부 도시 임멘슈타트에서는 방화로 외국인 5명이 부상했고 북독의 로스톡, 그라이프스발트에서는 우루과이와 모로코 청년이 집단 폭행을 당했다. 독일의 정치인조차 "보호 없는 외국인을 짐승처럼 사냥"한다고 표현하는 네오나치, 스킨헤드 등 과격분자들의 만남은 지난달 말 구 동독 지역인 작센 주의 폴란드 국경 인접 도시 호이에르스베르다에서 아프리카, 베트남인 등 230명이 수용돼 있던 소위 망명 신청자 대기소가 1주일간 밤마다 습격당하면서 내외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결국 당국은 외국인들은 타 지역으로 분산·이주시켰지만 그 이후 동서독 전역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외국인에 대한 각종 테러 사례가 10여건씩 보고되고 있다." ('통일 독일, 반 외국인 폭력', <연합뉴스> 1991년 10월 14일자)

'밤이여 나뉘어라'를 듣고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던 '서양 음악'과는 안 맞았고, 어렵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머릿속엔 있었으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이 음악에 의해 유인되는 느낌을 받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어떤 차원일까. 대개의 서양 음악을 들으면 별 어려움 없이 아름답고 섬세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밤이여 나뉘어라'는 그보다 더욱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극우 청년들이 베트남 외국인 노동자들의 숙사를 공격하는 그 영상처럼, 우리가 직면하고 있으나 외면하면서 살았던 사회의 공포와 불안 같은 것들이다.

아시다시피 일본에서는 지난 3월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큰 사고가 났다. 나는 그때 TV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그곳에 가게 되었다. 도쿄에서 멀어질수록 불안감이 증폭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사고가 난 중심 구역에 다다르면서 오히려 불안과 공포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곳 사람들은 오히려 생생해 보였다.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공포를 지우며 회피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힘이 없으면 불안도 공포도 느낄 수 없다. 반대로 얘기하면, 위험에 다가갈수록 우리에겐 위험을 느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바로 그 불안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은 정말 강인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나약해서 비관주의자가 되는 게 아니라, 강인해서 비관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예술가가 표현하는 불안이나 '이대로 있으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는 고립될 수밖에 없고, 그런 고립 상태를 감당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진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윤이상 선생은 자신의 예술적 면모와 정치적 면모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통일시키려 했던 드문 천재였다.

음악의 정치성

그에게 있어 음악과 정치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의 서양 음악 순례> 184~185쪽에 인용된, 일본 현대 음악가 다케미츠 도오루(武満徹)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동백림 사건으로)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뒤 인간생활에서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정치가 아닌지, 그걸 단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치 아닌 것이 거의 없습니다. (…) 진정한 인간 문제, 사회 문제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고 힘을 쏟는 것. 이것은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할 일이고, 또 가장 인간적인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이상 선생에게 있어 예술과 정치, 삶과 정치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예술적 영향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어떻게 되었다'거나 '정치를 위해 예술의 힘을 이용했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선생께서 하고 있는 해외 민주화 운동과 작곡을 통한 예술 운동은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라 이어져 있었다.

정치와 예술은 그 척도가 다르다. 정치적으로 옳다고 해도 예술적으로 뛰어나다 할 수 없고, 그 반대도 성립할 수 없다. 이는 입체적인 2차 방정식의 관계라고 본다. 이를 평면적으로, '이 음악이 정치적으로 어떻다. 그래서 나쁘다'라고 파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단순히, 오늘 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에 나가지 않고 이 자리에 와서 음악을 듣고 있느냐를 물을 수 없다. 설사 단기적으로 정치에서 지더라도, 긴 척도로 볼 때는 예술로 이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물론 그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지만 말이다.

또한 예술과 정치는, 당연히 떼어놓을 수 없다. 예술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만 충족하면 되지, 정치적으로 너무 따지지 말자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그 주장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다. 음악이란 행위 자체가 정치적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이나 미술이 '현실 정치'와는 관계없이, 예술적인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은 옳지만, 예술에 정치를 완전히 몰아내려는 모종의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정치적인지에 대해 늘 주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상처 입은 용, 윤이상

1980년대 말 나의 형 둘은 다행스럽게도 석방되었고, 윤이상 선생과의 관계 역시 계속 이어졌다. 특히 1992년엔 일본에서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크고 작은 연주회와 강연회가 열렸다. 일본에서도 자주 뵀지만 내가 베를린에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은 마지막에 또 다른 고난을 겪었다.

한국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고, 그동안 윤이상 음악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완화되면서 드디어 선생에게도 그렇게까지 그리워하던 고국 땅을 밟을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공항에 도착하면 지금까지의 행동을 반성하고 앞으로 북한과는 연을 아예 끊겠다는 입장 표명을 하라는 한국 정부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그걸 거절했다. 또 하나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일부 인사들도 그의 한국 입국이 해외 통일 운동에 타격을 줄 것이라며 귀국을 강경 반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곡가는 귀향 기회를 영원히 잃었다.

1995년에 베를린으로 찾아뵙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당시 나는 <상처 입은 용>에 이어, 동백림 사건을 겪고 서독에 돌아온 다음의 삶을 다루는 책을 쓰고 싶었고, 그래서 그와 인터뷰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선생께선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러나 독일에 당도한 나와 F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몇 번의 전화 연락 실패 끝에, 선생께서 입원해 계시고 이수자 여사도 간병으로 부재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늦었구나' 느꼈을 때,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를 조문한 날, 세상은 꽁꽁 얼어붙은 듯 추웠다.

▲ 윤이상(1917~1995년). ⓒ연합뉴스
윤이상 선생의 자택에는 통영시가 내려다보이는 파노라마 사진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고향 통영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래서 나도 늘 통영에 가보고 싶었다. 안식년을 받아 한국에 왔을 때, 드디어 통영에 갈 수 있었다. 나와 F는 남망산 공원의 자그마한 전망대에 올라섰다. 윤 선생의 자택에서 본 파노라마 사진과 똑같은 앵글의, 탁 트인 통영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나 같은 비관적인 사람조차, 한국에 와 있던 2006~2007년엔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었다. 윤이상 선생에 대해서도 이제 곧 그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며, 사람들이 보다 더 자유롭게 그의 음악을 듣고 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거라고 낙관했다. 그런데 최근에도 보수 단체의 항의로 통영 윤이상 음악제에서 진통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역시, 골수 비관주의자는 낙관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내가 그의 음악을 거슬러 올라가 나의 음악적 뿌리를 생각했듯, 지금의 젊은 음악가들도 윤이상이 겪었던 시대의 아픔과 역사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음악이 나온 경위를 알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윤이상의 음악은 아직 역사화 될 수 없는, 현재 진행형인 음악이다.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에 대해 가장 깊은 깊이 있는 성찰, 표현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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