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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비스킷 낼름! 이런 서울 시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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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비스킷 낼름! 이런 서울 시장도 있었다!

[해방일기] 1946년 12월 2일

1946년 12월 2일

12월 1일부로 철도 운임이 두 배로 인상되었다. 1킬로미터당 3등 여객 운임이 40전이 되어 부산까지 182원, 목포까지 172원이 되었다. 5월 1일에 종전 운임의 두 배로 인상되었던 것이 7개월 만에 다시 두 배로 인상된 것이다(<서울신문> 1946년 11월 27일자).

같은 날 군정청 인사행정처장 정일형이 공무원(군정청 직원) 처우 개선 방안을 발표했는데 장관급인 부-처장 월급을 3200원에서 6000원가량으로, 최하급인 10급 월급을 1660원에서 2247원으로 올린다는 것이었다. 본청 직원 4313명 중 3분의 1인 1407명의 감원과 함께 추진하는 계획이었다(<동아일보> 1946년 12월 1일자).

전차 요금도 두 배 올라 1원이 되었고, 전기료도 올랐다. 전기는 값이 올랐을 뿐 아니라 공급이 불안정해지기까지 했다.

조선의 전력은 동양에서는 제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발전소는 대부분이 38 이북에 있고 남조선에는 극히 약한 전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빈약한 발전소가 두 곳뿐이다. 그러나 38 이북의 송전으로 남조선의 전기 사용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5일은 이북에서의 송전선 고장으로 경인 지방은 전차는 물론 각 공장의 기계까지 두 시간에 걸쳐서 쉬었다는 해방 후 처음의 장시간 정전을 보았다.

5일 전선의 고장인지 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9시 3분부터 38 이북에서 오는 송전이 두절되어 일체의 전기 사용이 정돈되어 전차가 못 움직임은 물론 전등까지 전부 꺼져 전차 정류장마다 통근자를 위시하여 일반 승객들이 때마침 쏟아지는 눈보라와 함께 오도 가도 못하고 대 혼잡을 이루었다. 그뿐 아니라 요즘 가끔 일어나는 정전 관계로 전등불이 꺼져 가정의 불편도 적지 않다. 그러면 현재 서울 주변의 전기 상태는 어찌되며 북조선 전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현재 서울 주변에는 청평천의 수력 발전소와 당인리의 화력 발전소가 있을 뿐인데 이나마도 당인리 발전소는 석탄이 다량으로 소비되므로 석탄이 없으면 발전할 수 없으며 현재는 두 곳 다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유사시에 발전 작업을 시작하더라도 두 시간 아니면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며 전량도 겨우 4만5000킬로 밖에 안 되어 서울시의 전등용으로나 겨우 족하며 그 외의 동력은 쓸 수 없는 전력이라고 한다.

압록강 수전과 금강산 발전소에서 송전되는 120만 킬로 중 4만 킬로만이 현재 남조선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만일 이 방면서 전력이 오지 않으면 남조선 일대에 대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당국자의 담을 들어보자.

"송전이 두절된 원인은 방금 조사 중이라 알 수 없으나 북조선의 적설로 인하여 정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하여간 이북 전기가 오지 못하게 되면 남조선의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는 물론 공업이 전부 정돈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6일자)

금 10일 아침 9시 50분경부터 시내에 정전이 있어 우선 청평 발전소로부터 송전하여 제한배전을 실시하고 있는 형편인데 원인은 금조 이래 뇌격 관계로 인하여 북선에 있는 발전소에 불안 상태가 있게 되어 평양에서 응급 수동 차단을 한 까닭이라 한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11일자)

1946년 2월의 미소공위 예비 회담에서 남북 간의 물자 교환이 긴급 의제였는데, 이북의 전기와 석탄, 이남의 쌀이 제일 중요한 대상이었다. 미군정의 미곡 정책 실패로 인해 여기서 쌀을 내놓지 못한 것이 소련 측의 불신을 사는 빌미가 되었다. 소련군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석탄을 보내지 않아서 일본에서 수입해 왔는데, 전기만은 안정된 공급을 계속해주었던 모양이다. 송전 중단 기사는 12월 들어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송전을 중단한 것은 아니고 사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5월 정치적 이유의 송전 중단이 일어나게 되지만, 아직은 전기를 전략 무기로 쓸 의도를 북쪽에서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본식 배전 시설의 유지와 관리에 소련의 도움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반적 물가 상승이 민생을 압박하는 상황을 넘어 물자의 품절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분야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일본 제국 시스템의 붕괴로 인한 것이 많다. 12월 10일자 <조선일보>에서 크게 다룬 종이 문제가 그중의 하나였다.

방금 남조선에는 출판 문화의 일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38선 이남 지구는 본래부터 펄프재의 생산지가 아니어서 종래에 있어서도 용지는 일본이나 북조선에 의뢰하여 사용하던 바 해방 이후 38 장벽인 생겨 물자의 교류가 두절되고 대외 무역도 안 되어 건국을 앞두고 활발히 전개되어야 할 문서 운동은 현재 총 소요량의 1할도 안 되는 휴지를 원료로 하는 몇 개의 재생 제지 공장의 생산품에 매달려 허덕이고 있어 서울만을 단위로 하고 따져 보아도 200여 대소 출판사가 총휴업에 빠져 있고 600 인쇄소도 용지가 없어 인쇄를 못하고 있는 기막힌 현상에 있으며 따라서 이 용지 기근은 각 학교 교육에 막대한 불편을 주어 소학 중학 전문대학 등의 교과서를 못 만들고 또 학용지 구입난으로 거의 수업 불가능 상태에서 학교 당국은 임시 교과서 용지와 학용지 구득에 동분서주하는 현상이라 한다.

그리고 일반 가정에서도 겨울을 앞두고 소용되나 한 장의 종이를 구할 수 없어 이 용지난이 가져오는 우리 생활에 영향됨은 실로 막대한 것으로 현하 남조선에 있어서는 다른 부면에 시급을 요함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과 동시에 특히 이 용지 대책에 시급한 조치가 적극 요망되는데 이와 같이 위기에 직면한 용지난의 상황을 각 방면을 통하여 들어보기로 하자.

현재 이 제지에 대한 통제는 그 철저를 기하지 못한 관계로 같은 적산 공장이면서도 지리적 조건으로 어떤 공장은 원료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누구를 물론하고 생산량의 25퍼센트의 용지를 떠 준다는데 현하 남조선의 절박한 용지 사정으로 보아 적정 분배가 철저히 요청되는 이때에 목적하고 원료를 가진 자에게 종이를 떠 준다면 그 종이는 결국 고등한 값으로 시장에 나오게 되는 결과가 되어져서 현재의 종이 값을 폭등시키며 따라서 간상배의 모리행위 할 조건을 주어 휴지가격도 인상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한다.

이 기사에는 출판사, 제지 회사, 문교부 편수국, 각급 학교와 군정청 유기 가공과 관계자들의 논평이 붙어 있는데, 그중 금강제지 고문 허균의 이야기 일부를 인용한다.

"현재 남조선에서 제지 생산을 하는 공장은 13개소인데 남조선에는 펄프재가 없어 이 13 공장이 모두 휴지를 원료로 하는 재생지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용되는 소위 선화지란 것인데 첫 번 재생 때는 종이 질도 좋았으나 2생 3생이 되면서 종이 질은 아주 나빠져서 현재 사용되는 3생지는 휴지만도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 이 3생지를 원료로 다시 4생을 하면 정말 종이 질은 사용치 못할 정도로 나빠질 것입니다. 휴지로 재생시키는 것만큼 원료의 약 3퍼센트 내지 5퍼센트가 종이가 되고 나머지는 소모되어 남조선의 휴지는 점점 줄어지는 형편인데다가 기계 부속품 약품 특히 모포 등은 지금까지는 재고품으로 이리 저리 써 왔으나 앞으로 조선 내에선 구입할 수 없어 2~3개월 내에 공장 운영은 아주 위기에 서게 되었습니다."

배재중학교장 박임련은 교과서는커녕 "앞으로 수업 증서나 졸업 증서도 주게 될지 의문"이라고 한탄했고, 금화국민학교장 최태윤은 "아이들을 책망해야 소용없는 것이요 학교에 대한 특별 배급이 없고서는 향학에 대한 장려가 실로 우려되는 바"라고 탄식했다. 군정청 유기가공과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남조선의 생산량으로는 수요량의 9퍼센트 남직 하다 하니 지금의 용지난이 얼마만큼 심하다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종이를 증산할 수 없는가? 첫째로 제지 재료인 펄프가 남조선에는 전혀 없고 제지 기계에 쓰는 담요와 쇠 그물 같은 재료가 없어서 군산 춘천 안양 순천의 제지 공장들이 간신히 재래품으로써 생산을 연명시키고 있다. 군정청으로서는 미국에 원료 수입을 수차 교섭하였으나 지금 같아서는 언제나 실현될지 그 앞길이 막연하다 한다."

물자 부족 중에도 제일 절박한 것은 역시 식량이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월동 식량을 충분히 준비한 국민은 많지 않았다. 대도시 식량 공급은 미군정에게도 최대의 과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형민 서울시장을 둘러싸고 시민을 짜증나게 하는 일이 거듭 벌어졌다. 지난 5월 시장에 취임한 김형민은 9월 말 서울시가 특별시로 개편되면서 초대 서울특별시장이 된 사람이다. 11월 30일 기자 회견에서 김형민은 이런 해명을 했다.

"소위 고구마 사건은 검사국은 물론 시장인 나 자신도 철저히 그 진상을 조사하여 봤으나 일반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고구마는 서울 시민용으로 가지고 온 것이 아니고 개인 상인들이 가지고 온 것을 시청과 회사에서 그 처분을 알선해 준 것이다. 시민의 이름을 팔아서 부정 처분 운운은 당치않은 말이며 여하간 검사국에서도 진상을 조사하고 있으니 그 결과가 발표되면 일반의 오해가 풀릴 것으로 믿는다." (<경향신문> 1946년 12월 1일자)

'열두 차 고구마 사건'이란 서울 시민의 식량용이라고 나주에서 화차 열두 차에 실어온 고구마 5000여 가마가 개성의 고려약품회사에 알코올 제조용으로 팔려간 일이다. 식량 통제 정책 아래 대량의 고구마를 구입하기 위해 '시민 식량용'이란 명분을 상인들이 이용한 것인데, 김형민의 방조 여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터진 '비스킷 사건'에서 김형민의 역할이 들통 나기 때문에 고구마 사건에 대한 심증까지 굳어지게 된다.

비스킷 사건 의혹은 11월 27일 기자 회견에서 제기되었다. 군정청에서 서울시 빈민용으로 7만 파운드의 비스킷을 반입했는데 서울시가 그 많은 분량의 배급권을 두 명의 업자에게 맡겨 폭리를 취하게 했다는 의혹이었다. 이에 대해 김형민은 시청 상무국의 라일리 대위의 책임으로 넘겼고(<조선일보> 1946년 11월 28일자), 12월 4일 기자 회견에서 다시 제기되자 "'빈민용의 5만 명 이외에는 시로서 전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동문서답식의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46년 12월 5일자). 그런데 문제의 업자 한 사람이 김형민의 잡아떼기에 열 받았던지 이튿날 기자단을 찾아와 김형민의 역할을 폭로해 버렸다.

말썽 많은 비스켓 모리 사건은 의외로 확대될 듯하다. 즉, 서울시장 김형민은 4일 군정청기자단 시청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문제의 비스켓트로 서울화신 내 삼화사 책임자 신선호가 썩은 것 4분가량을 배급까지 해서 약 10만 원의 모리를 한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나도 모르고 있던 중 근자에 조사한 결과 비로소 알게 되어 시민에게 미안하다' 하고 말한 바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申은 5일 시청기자실을 찾아와 기자단에 다음과 같이 이외의 진술을 하여 그 사실 여부가 주목된다.

"최초 비스켓트 칠만 폰드를 맡을 때 한 폰드 15원에 불하하니 20원씩에 배급하라는 조건으로 김 시장이 결재까지 해준 것을 나는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다. 그것을 가지고 썩은 것 4분을 뻔뻔히 배급까지 해서 모리를 했다고 하니 그런 사실이 없는 나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당초부터 김 시장이 결재해준 사실은 뻔한 증거가 있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 6일자)

결국 12월 6일의 기자 회견에서 김형민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 말썽 많은 비스켙 문제에 대하여 김 시장의 결재가 있었다는데?
(답) 결재 도장을 찍었으나 사실을 말하면 맹판(盲判)한 것인데 결과에 있어서 불미하게 되고 보니 시민 여러분께 대단히 미안한 일이며 맹판에 대하여는 책임을 지겠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7일자)

고구마 사건도 비스킷 사건도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검사총장 이인은 12월 10일의 기자 회견에서 이들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검사국에서 조사한 결과 시장이 허가하였고 또 가격까지 정해준 것이 판명되었으나 이것은 법률상 위반은 없으나 행정 처리상 타당치 못하다. 시민의 한사람인 나로서도 식생활이 가장 중대한 이때 고구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나 또는 아동의 영향 가치에 대하여 이윤을 추구함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군정장관에게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11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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