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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진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돈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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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진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돈 욕심'

[해방일기] 1946년 11월 28일

1946년 11월 28일

1945년 10월 17일, 이승만 입국 이튿날 하지는 기자 회견장에 이승만을 앞세우고 수행하듯 따라 들어왔고 이승만을 헤드테이블 중앙에 앉혔다. 며칠 후(10월 20일) 연합군 환영회에서는 이승만을 "조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로 소개하고 이승만의 연설 동안 부동자세로 시립했다. (1945년 10월 15일자 일기)

하지가 이렇게 이승만을 끔찍이 모신 것은 이승만 입국 직전 도쿄에서 맥아더에게 그를 소개받았기 때문이었다.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돌베개 펴냄) 440~446쪽에서 세 사람의 만남을 서술했다.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맥아더가 이승만을 만나게 하기 위해 하지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맥아더는 극동 지역에서 미국의 반공 노선을 일으켜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인물로 이승만을 본 것이다.

진주한 지 한 달 남짓 시점에서 하지는 이승만이 자기 일을 쉽게 만들어줄 '귀인(貴人)'으로 쳐다봤을 것이다. 연말까지는 두 사람의 협력 관계가 순조로웠다. 소련과의 협조를 중시하는 국무부의 국제주의 노선에 저항하는 방향을 10월 중순 맥아더-하지-이승만 모임에서 의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방향으로 두 사람의 협력이 계속되었고, 이승만의 극우 세력 결집도 미군정의 협조 하에 진행되었다.

연말에 터져 나온 반탁 사태 속에서도 하지에게 예측불허의 인물이었던 김구에 비해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신뢰는 계속되어 1946년 2월의 민주의원 설치로 이어졌다. 이 단계에서는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까지 하지의 고문으로 들어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미소공위 개막을 계기로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1946년 3월 광산 스캔들을 계기로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을 물러난 데는 이 입장 차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에게는 미소공위 성공이 점령군 사령관의 명백한 책임으로 주어졌다. 충분한 핑계거리 없이 미소공위를 실패시키는 것은 분명한 임무 실패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소공위의 실패를 바라고 있었다. 미소공위가 목표로 하는 통일 국가 수립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길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정읍 발언(1946년 6월 3일)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의지를 드러내는 단계에서는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굳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읍 발언 이후 좌우 합작 노력이 진행되는 동안 하지는 이승만의 존재가 부각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독촉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를 통해 지지 세력 확대에 매진했다. 그 노력의 결과 10월 말의 입법의회 선거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에 맞먹는 세력을 독자적으로 확보했다.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중심 펴냄) 193쪽에서 이 시점 이승만의 활동 방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10월 이래 이승만 진영의 활동은 두 가지 점에서 특징적이다. 첫째, 이승만은 입법의원을 자신의 정권 장악에 이용하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둘째, 모스크바 결정 자체의 폐기와 미소공위의 용도 폐기를 적극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하였고, 선전의 주요 대상을 미국 내 여론으로 옮겼다.

임병직과 임영신 등을 통해 미 국무부와 유엔에 로비 활동을 벌인 것도 이 목적이었다. 로비 성과를 국내 언론에 과정 보도되도록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리고 입법의원 장악에 하지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관선의원 임명에 합작위의 추천을 받아 중도파를 대거 포함함으로써 정치색의 균형을 맞출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건너갈 것을 결정했다. 그의 미국행에는 여러 가지 노림수가 겹쳐져 있었지만, 그 첫 번째 수순은 하지와의 결별이었다. 하지에 대한 공격과 비난을 자기 주장의 발판으로 삼는 전술로 삼은 것이다. 1945년 10월 22일자 일기 제목을 "도와주고는 후회하게 되는 사람, 이승만"이라고 했는데, 하지만큼 크게 후회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의 도미 시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정병준은 이렇게 요약했다.

하지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구상에 전적으로 공감했지만, 단정 수립은 그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는 본국의 훈령과 정책의 큰 틀 속에서 자율권을 지녔을 뿐, 미소공위나 모스크바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또한 하지는 이승만이 현명하게 정치 무대의 정면에서 비켜나 있기를 원했다.

하지는 "때가 되면 그의 힘과 그의 추종자들을 이용하길 원했고, 또 우리가 다양한 한국인들을 서로 이해시키기 위해 그동안 기울인 노력들을 대성공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하지는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이승만을 아껴두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더 이상 하지의 만류에 따라 자신이 정치 무대의 뒤편에 서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입법의원의 관선 의원 선출을 둘러싸고 이승만은 하지에게 결정적인 반감을 품게 되었고, 이미 마음속으로 하지와의 결별을 굳혔다. (<우남 이승만 연구>, 629쪽)

정용욱과 정병준 두 연구자 모두 이승만의 방미에 관한 하지와의 협의가 11월 초에 시작된 것으로 확인해 준다. 하지가 이승만의 방미를 원한 이유를 정용욱은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는 미군정이 처한 입장을 상부에 알리고 상부의 정책 결정을 촉구하는 데에 이승만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미군정은 남한의 사회 경제 상태 악화로 점령 통치가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 특히 '10월 항쟁'의 근저에는 당시의 열악한 민중 생활과 점령 정책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 정책 집행과 점령 통치상의 애로를 상부의 지원을 통해 해결하고, 그 책임을 상부에 전가하려는 미군정 당국의 입장에서 이승만의 미국 내 지명도는 적절히 이용하면 유용할 수 있었다.

(…) 둘째는 이승만을 외유시켜 그를 잠시 한국 정치로부터 분리시키고 언론의 조명으로부터 물러나 있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 이유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소-반공적 태도가 미군정을 곤란하게 하고, 미군정의 남한에서의 정치 활동 계획을 교란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승만은 이러한 구도가 우익 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권 장악에 최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고, 여기에 계속 반발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좌우 합작은 사실상의 공산주의자 지원이고, 종도 좌파는 공산주의자라며 보다 완강한 반공적 태도를 촉구하였다. 하지도 반공적 입장에선 이승만에 못지않았으나 이승만의 이러한 맹목적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196~198쪽)

이승만은 11월 22일 방미 계획을 담화문으로 발표했다.

뉴욕에서 개최 중인 UN 총회에 민주의원 대표로 임영신·임병직 양씨가 비공식으로 참석하여 조선 문제를 제출하고 활동 중이거니와 이승만은 UN 총회에 참석하여 조선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원 도미코자 준비 중이라고 22일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 문제를 연합국이 결정하기 전에는 한국에 주재한 미소 사령부에서 자유로 해결할 수 없는 형편인데 지금 UN 총회에 제출된 이때에 사실을 밝히 설명할 필요가 있는 고로 내가 즉시 도미할 준비를 차리는 중이니 그 동안에 모든 동포는 나의 정책대로 굳게 지켜서 파괴분자의 모략이나 선동에 흔들리지 말고 민주 진영이 싸우며 지켜오던 주의와 정신을 잃지 말며 통일적 조직적으로 동일한 보조를 취하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UN 총회에 이박사가 출석한다는 보도를 들은 동아일보에서는 22일 돈암장에 이 박사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특별 문답을 하였다.

(문) 출발 시일은?
(답) 아직 확정하지 않으나 준비 되는대로 가급적 속히 가기로 하겠다.

(문) 민주의원 의장의 자격으로서 가는가?
(답) 아니다. 그런 이름으로 가면 활동의 제한이 있으므로 불편할 터이니 금반 도미는 절대로 개인적 입장에서 가는 것이다.

(문) 도미의 포부와 목적은?
(답) 지금 화부(華府)에서 온 임병직 씨와 민주의원에서 파견한 임영신 여사가 UN 관계자에게 조선 문제의 정당한 인식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미국의 여론도 이에 반영하여 상당히 좋은 효과를 얻은 것 같다. 내가 가면 미소 양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는 동시에 UN 참가국 중 필리핀 같은 동지국과 규합하여 조선 문제를 크게 제기하려 한다.

(문) 도미를 결심한 직접 동기는?
(답) 지금 우리 조선은 문자 그대로 누란의 위기에 있다. 금반 UN의 챤스를 놓친다면 조선은 장구한 고난을 다시 되풀이할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써 우리 문제를 해결치 않는다면 언제 형용할 수 없는 동란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상태다.

(문) 귀국 예정은?
(답) 가급적 속히 귀국할 터이다. 개인적으로 요인을 면담하여서 정당한 인식을 하도록 애쓰겠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의 일치적 행동과 또 하나는 여비를 획득하는 데 있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23일자)

개인 자격을 강조했지만 11월 25일 민족통일총본부에서 70여 '애국 단체' 대표가 모여 이승만을 '민족 대표'로 받들었다. 26일에는 민주의원에서 위 인터뷰 맨 끝의 문답에 찔려서인지 의장 이승만의 여비 50만 원을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이 여비 타령의 파장은 민주의원에서 끝나지 않았다. 11월 26일에 '민족대표외교사절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4월 이승만의 귀국 때까지 그의 여비 모금이 그 지지 세력의 일대 사업이 되었다. 후원회가 공식적으로 밝힌 모금액은 1470만여 원이었는데, 당시에는 그 몇 배 내지 몇 십 배의 돈이 움직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우남 이승만 연구>, 601~602쪽)

이승만은 해방 전에도 돈 문제로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킨 인물이다. 지난 봄 불거진 '광산 스캔들'도 그런 문제의 하나였다. 그를 비난하는 이들이 그의 '권력욕'을 많이 들먹이지만 진짜 대단한 것은 '금전욕'이었다. 그가 권력을 추구한 것은 금전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정병준은 이승만이 모은 정치 자금이 "천문학적 금액"이었고 "남한의 우익 진영 내에서 유통되고 있던 정치 자금의 거의 대부분"이라며(<우남 이승만 연구>, 609쪽) 그 대단한 수금 능력을 몇 개 각도에서 분석했는데, 그중 흥미로운 각도 하나를 소개한다.

두 번째 배경은 자발성을 빙자한 강제 모금이었다. 이승만의 정치 자금 모금에는 후원과 지원 외에 강요와 위협이 동반되어 있었다. <주한미군사(HUSAFIK)>는 "이승만의 정치 자금 수령에는 모종의 협잡이 있었음이 분명했다"라고 썼다. 또한 버치는 이승만이 많은 부유한 한국인들에게 친일 행적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돈을 뜯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보국회가 이승만에게 1000만 원을 '헌성금'으로 제공한 것 역시 이런 주장들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을 추종하는 우익 청년 단체들과 조직들은 이승만의 이름하에서 강제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는 이후 이승만 정권기를 관통하는 특징이 되었다.

이승만이 도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면-군 단위에서 강제 모금한 사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서울의 청파동 3가 동회에서는 한국외교사절단 후원비 등의 명목으로 한 세대에 100원씩을 기부할 것을 강요하며, 이 기부에 응하지 않으면 쌀 배급을 정지하거나, 미국 사탕을 주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서울 후암동 동부동회에서는 도미한 이승만의 후원비로 극빈자는 50원, 그 외에는 100원 이상을 내지 않으면 쌀 배급을 주지 않아 사회 문제가 되었다. XX단은 이승만 방미 자금의 기부를 강요하다가, 서울시 당국으로부터 불법이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일제 말에 대조봉대일상회(大詔奉戴日常會) 불참자들을 비국민이라고 칭하며 식량 배급을 중단시킨 것과 동일한 조치였지만, 행정관리들은 돈을 잘 안 내니 이런 조치가 당연하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정도였다.

서울에서는 동회를 통해 쌀 배급을 빌미로 한 강제 모금이 이뤄진 한편, 지방에서는 말단 행정망을 통해 강제 기부가 이루어졌다. 경기도 강화군 14개 면에서는 우익 단체 인사들이 말단 경찰을 대동하고 각 면을 순회하면서 구장과 유력자를 소집해놓고 기부를 강요했고, 이승만의 도미 기금 30만 원을 전군에 할당하여 호별 분담시켰다. 경남 부산의 조산면에서도 1947년 4월에 경찰과 지역 관리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독촉국민회가 "자유의 대가"로 300만 원 모금을 추진하면서, 가난한 면민에게까지 할당액을 통보했고, 지방 부락 유지들이 이에 동원되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11~612쪽)

이승만은 정말 책략과 선동에 능란한 사람이었다. 그는 배 타러 인천으로 간다며 12월 1일 성대한 환송식을 받았다. 그러고는 그 날로 몰래 서울에 돌아와 있다가 사흘 후 군정청과 약속되어 있던 군용기에 올랐다. 군정청에게 핍박받는 시늉을 한 것이다. 몇 달 후 귀국할 때는 트루먼 독트린과 미국의 6억 달러 원조 계획을 선물로 들고 왔다. 자기가 장만한 것도 아닌 선물을 용케 주워서 들고 왔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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