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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뉴라이트'부터 '대장금'까지…다 '꼼수'다!

[철학자의 서재] 키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역사의 이미지와 사극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배운 국사와 세계사를 아마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은 암기 과목 가운데 하나쯤으로 기억할 것이다. 입시를 위한 공부에서는 묻거나 따질 필요 없이 일단 외워야 점수가 잘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과서에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나오지만, 이들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잘 모른다. 그저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중요할 뿐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도 막연히 고등학교 시절의 '역사'를 생각하면 '퀴즈쇼'가 떠오르곤 한다. 앞뒤 맥락은 모른 채 그저 나열된 사실과 용어만 외우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TV를 켜면 사극이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극이라는 장르는 참 오묘하다. 가깝게는 몇 십 년 전, 멀게는 천 년 전의 인물이 살아나 수많은 사건들이 화면에서 진짜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궁금한 게 많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대장금', '선덕여왕', '추노'를 예로 들어보자. 대장금은 실록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지만, 주변 인물들과 대부분의 사건들은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다. '선덕여왕'에는 미실이라는 매력적인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나타나지 않고 <화랑세기>라는 필사본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추노'의 경우 역사적인 배경은 있지만 주인공들은 모두 역사에서 배제된 민초들이다. 역사의 무대가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리고 기록이 소략할수록 재현은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자들의 역사가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역사가들은 과연 이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 교과서에서는 분명 답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정답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이런 추측에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하는 책이 있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키스 젠킨스 지음, 최용찬 옮김, 혜안 펴냄)는 상당히 도발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고정된 역사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반박하며 새로운 방식의 역사 보기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 하나가 아닌 여럿의 역사학

▲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키스 젠킨스 지음, 최용찬 옮김, 혜안 펴냄). ⓒ혜안

실증사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종의 제한 조건들을 달기는 하지만 역사 연구를 통해 결국 진실 탐구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진실 탐구에 이르는 방법은 꼼꼼한 방법상의 규칙을 발현해내는 것이다. 그들은 사료란 소략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정교한 방법을 통해 과거가 스스로 말하도록 놔두고 역사가는 그저 증거 앞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역사가 자신의 '도덕적' 개입을 축소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젠킨스는 해석이라는 행위 자체에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있다고 본다. 게다가 완벽한 실증의 추구 자체가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엄밀한 방법의 사용에 동의한다면 그동안 제시된 수많은 방법론 가운데 무엇이 가장 엄밀한지 판단하여 선택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는 역사를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산물로 보면서, 역사란 권력 관계에 다양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 재정리된다고 이해한다. 재정리 과정은 종종 논쟁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때 담론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각자 자신의 이해를 지지해줄 사람을 동원하기 위해 애쓰게 되고, 이러한 갈등 속에 역사는 '날조'된다.

젠킨스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물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형태로 서술된 역사는 각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자가 원하는 역사와 혁명가가 원하는 역사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단일한 역사는 불가능하다. 다양한 입장이 반영된 여럿의 역사가 곧 앞서 말한 사극 속 주인공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을 살펴보자. 동학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봉기, 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각 역사가의 이론적인 입장, 곧 담론이 투영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경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을 두고서도 누군가는 행복한 이미지로, 누군가는 매우 슬픈 이미지로 기억할 수 있다. 다수의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는 이렇게 다양한 입장을 반영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젠킨스는 결국 역사란 세계를 해석하는 여러 담론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하며, 범주 상 과거와 다르다고 본다. 과거는 일어난 일이다. 과거는 이미 사라져버렸고, 사라진 과거는 역사가를 통해 다시 살아난다. 젠킨스가 보기에 역사가들은 책 논문 기록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원상태와 별로 일치하지 않는 형태로 다시 옮겨놓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는 역사가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과거에 대한 일종의 구성물이다.

우리가 어떤 역사가의 책을 통해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공부한다고 해보자. 책의 내용을 완전히 외우고 이해했다고 해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임진왜란을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은 단일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며, 다양한 사료들과 해석의 집합체이다. 어떤 사료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임진왜란이 서술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한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된 임진왜란을 공부했을 뿐이다. 역사는 결국 서술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역사가의 의도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에 인용된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의 말을 들어보자.

"역사학과 역사철학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역사철학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론을 통해 자리매김하고자 할 때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적 틀을 텍스트 표면 위로 솔직하게 드러낸다. 반면 이른바 순수 역사학은 이 개념적 틀을 이야기 안으로 깊숙이 파묻어버린다. 이때 이 개념적 틀이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은닉된 또는 내포된 형성 장치의 작용을 하게 된다."(22~23쪽)

역사는 기본적으로 치밀한 방법론을 토대로 서술된다. 그 방법론과 내용, 개별적 사실들에만 집중하면서 무엇이 진실인지에만 몰두한다면, 역사가의 의도나 담론은 알 수 없게 된다. 담론은 역사가의 치밀한 서술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 우리는 지금껏 서술 자체에 집중하느라 무엇을 위한 서술인지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역사 연구는 왜 하는가?

젠킨스가 정의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역사는 유동적이며 문제투성이인 담론이다. 겉보기에 이는 세계의 한 단면인 과거에 관한 담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 얽매여 있는(대체적으로 월급을 받는) 연구자 집단이 만들어낸다. 이 연구자들은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와 실천적 측면에서 일정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이 연구자들이 만들어낸 생산품은 일단 유통되면 논리적으로 무한히 이용되고 남용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것은 주어진 일련의 권력 토대에 부합되고 지배 주변의 스펙트럼을 따라 역사의 의미를 구조 지으며 유포시킨다."(89쪽)

역사 연구의 결과물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상대적일 뿐이라면 역사가는 혼란스러워진다. 모든 역사가 상대적일 뿐이라면 역사가들이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젠킨스의 대답은 아주 담담하다. 그냥 여럿의 역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는 무한한 상대주의의 늪에 빠지는 것을 '불행한 상대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반대로 '행복한 상대주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회의적 시각은 오히려 적극적인 방식이며,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역사를 해체하는 작업이 곧 자신의 역사를 세우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 역사는 무엇인가?

복수의 다양한 역사가 가능한 시대에, 일방적인 지식 전달 수준의 역사 교육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지금도 다양한 집단이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역사 교육의 방향은 이 다양한 역사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각 역사에 서술된 내용이 어떤 맥락에서 서술되었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판단할 능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철저한 균형과 객관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본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사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 교육의 축소가 우려되는 현실에서 기존의 역사 교육을 유지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역사 교육의 방식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다. 크로체(Benedetto Croce)의 말대로 '모든 역사가 현대사'라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단순한 지식 전달 위주의 역사 교육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서술된 역사가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민족 담론을 중심으로 한 '국사'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겉보기에 역사 논쟁은 지나간 과거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대입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이다. 이들 역사 서술은 같은 시기 같은 사건 속에 각각의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과거를 재구성해내고 있다. <만들어진 고대>(삼인 펴냄)라는 책에서 이성시는 고대사 연구에 투영된 근대 민족국가의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실을 민족담론만으로 대응한다면 역사분쟁은 끝낼 수 없다. 민족담론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역사연구가 이러한 분쟁의 대안을 마련해줄 수 있다. 한중일의 공동역사를 지향하는 '동아시아' 담론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젠킨스의 지적대로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음은 부정할 할 수 없다. 그래서 뉴라이트의 대안 교과서가 정말 이름처럼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대안은 수많은 대안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들의 담론은 겉으로는 완벽한 실증을 표방하고 있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완벽한 실증이란 불가능한 편견이다. 게다가 실증을 표방하는 것과는 달리, 기존 학계의 연구물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거나 누락시키는 폐쇄적인 전략을 쓰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2011년 교과부가 교과서집필기준 발표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삭제시키려는 움직임에서도 볼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유산이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를 삭제하여 없었던 일처럼 만들려는 역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그래서 앞서 인용한 헤이든 화이트의 지적은 적절하다. 현실을 반영한 여럿의 역사 가운데 일부는 '진실'이라는 이름을 빌어 아무도 모르게 기득권의 의식을 주입시키려는 '꼼수'를 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역사 연구는 역사가들의 몫으로 돌리더라도, 독자인 우리들은 누구를 위한 역사인지를 깨닫고 거짓된 '진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혜안을 지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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