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원고를 읽기보다는 늘 어딘가가 부족한 원고를 읽고 또 읽는 것이 나의 일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이 글이 잘 쓰인 글인지 내가 이 저자의 글쓰기에 익숙해져버린 건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그렇게 이리 만지고 저리 쓰다듬고 하다보면 어느새 원고는 뽀얗게 화장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예쁜 옷을 입고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향해 집을 나선다. 하지만 집을 벗어난 그곳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집 안에서는 그리도 귀하디귀한 자식이었지만, 수많은 경쟁자들이 너나없이 멋지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로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그 속에서는 자신만 귀하다 할 수 없다, 자신만 최고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최고라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집을 떠난 나의 책들은 지금도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해 책방의 길거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홀로 외로이 지키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김무곤 교수의 <종이책 읽기를 권함>(더숲 펴냄)과 함께 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책이 나에게 너무도 많은 세상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티 없이 맑고 소박한 목사님을 만나면서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성철스님의 책을 작업하면서 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다. 재계의 내로라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나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인들을 만나면서 내 안에서 자라지 못한 작은 감수성을 발견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학력과 배경을 갖고 시작했지만 자신의 의지 하나로 억대 연봉을 받는 세일즈맨을 만나면서 나약했던 나를 채찍질할 수 있었다… 이렇듯 책은 매순간 나를 또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바로 책의 이런 매력 때문에 나는 이 일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종이책 읽기를 권함>(김무곤 지음, 더숲 펴냄). ⓒ더숲 |
김무곤 교수는 책의 이런 무한한 힘을 어린 시절부터 만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다. 먹고사는 데 바빠 여유가 없었던 시절, 어느 날 그의 집에 엄청난 양의 책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밥을 먹는데 그의 아버지는 불쑥 이렇게 말한다. "그것, 모두 너희들 책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는 동네 책방에 들러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은 다 배달해 달라"고 하셨던 것이다. 한 권 한 권 일일이 고르신 게 아니라, 작은 서점 하나를 통째로 그대로 옮겨다 놓으셨던 것이다. 책방의 책을 모두 살 만큼의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보다는 소중한 책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치열한 책읽기는 시작된다. 을유문화사 세계 문학 전집부터 삼중당 문고본, 정음사 중국 고전시리즈까지. 그래서 그런지 그의 책읽기는 그저 즐거움이자 생활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책을 읽을 때 어떤 목적을 두지 않는다. 자신에게 인내심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는 <종이책 읽기를 권함>에서 내내 말한다. 책을 읽기 싫으면 읽다가 그만 읽으라고. 읽고 싶은 부분만 찾아 읽으라고. 그리고 부모들에게는 아이들에게 책값을 넉넉히 주라고 한다. 보고 싶은 책값이 비싸 그보다 싼 책을 사는 일이 없도록. 책방에서는 아이들을 그냥 방치하라고. 그들에게 책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자유를 주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책읽기를 강조하는 그조차도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는 책읽기에 사람들이 소홀해지는 것이 무척 안타까운가 보다. 그는 왜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명료하게 얘기한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앞 페이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지탱해야만 뒤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 사람은 정신의 팽팽한 탄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팽팽한 탄력을 밀고 가는 힘. 이 지탱력이야말로 사람이 오직 책읽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이건의 다른 이름이 바로 '지성(知性)'이 아닐까요."
역시 그는 자신의 본문을 잊지 않았다. 책의 가치를 우리시대 푸른 영혼들에게 전해야 하는 자신의 책무를 잊지 않은 것이다.
종이책의 종말을 고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속속들이 들려온다. 나 역시도 전자책이 종이책의 많은 부분을 잠식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인생은 매순간 자신의 선택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된다. 지금 책을 읽을 것인가 안 읽을 것인가 역시 자신의 선택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들은 책을 읽고 세상의 흐름을 통찰한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다, 세상의 지혜를 배운다, 그리고 세상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은 계속 읽고 안 읽는 사람은 계속 모르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책을 읽는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으니, 갈수록 태산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