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공동체. 최근 10여 년간 교육 개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배움의 공동체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기적의 학교'를 낳을 수 있는 교육 개혁 운동이다. 다음 기사를 보자.
"이 개혁을 하면 아무리 황폐한 학교여도 약 1년 후에는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학생 간의 폭력 행위가 아예 없어지거나 전무에 가까운 상태가 된다. 또 학생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적극적으로 배움에 참가하는 상태로 변한다. 그리고 개혁을 시작한 2년 후에는 미등교 학생(연간 30일 이상 결석하는 학생)이 이전 30퍼센트에서 10퍼센트 정도로 급격히 감소한다. 학력 향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1년 후 성적이 낮은 학생의 학력이 대폭 향상되고 2년 후에는 성적 상위자의 학력도 향상된다." (☞관련 기사 : "조는 학생, 학교 폭력 사라지는 '기적'은 가능하다")
가히 기적이라 불릴 수 있지 않은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토 마나부가 이 운동을 처음 적용·실천했던 학교에서는 4.6퍼센트에 이르던 미등교자 비율이 2년 만에 1퍼센트 미만으로 줄었고, 시내 14개 학교 가운데 열 번째 정도였던 학력 수준도 2~3위권으로 뛰어올랐다. 그 이후 배움의 공동체 운동은 급속하게 퍼져, 현재 20퍼센트 이상의 공립초등학교와 10퍼센트가 넘는 공립중학교, 5퍼센트가량의 고등학교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숫자로 보면, 100개의 거점 학교를 비롯해, 전국 3000개의 학교에서 지금-현재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본의 이야기다. 그러나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800명이 넘는 우리나라의 교사가 배움의 공동체를 배우기 위해 일본 학교를 찾았었고, 교육 운동의 대명사로서 각종 교원 연수에도 도입되고 있고, 연구회도 만들어져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혁신 학교 관련 세미나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메뉴이기도 하다. 이미, 배움의 공동체 운동은 한국 사회의 교육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교육 개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운동의 주창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 할 법하다. 사토 마나부의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박찬영 옮김, 살림터 펴냄)가 바로 그 책이다. <교육 개혁을 디자인한다>(손우정 옮김, 학이시습 펴냄),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손우정 옮김, 에듀케어 펴냄)로 우리에게 배움의 공동체 운동의 철학과 실천 방략을 제시했던 사토 마나부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통해 "교육 과정과 수업, 배움 그리고 학교 개혁" 등 교육 전반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한다. "복잡하고 애매하며 다양한" 교육 이론과 지식의 문제를 "가능한 한 흥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학습의 '매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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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사토 마나부 지음, 박찬영 옮김, 살림터 펴냄). ⓒ살림터 |
이 책의 원제는 "교육의 방법"이고, 역서 제목은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이다. 아이를 가르치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 있을 듯한 제목이다. 그러나 정작 차례를 보면, 어떻게 아이를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은 고작 두어 장(章)에 불과하다. 현재의 교육 상황과 개념, 역사에 대한 개괄이 5장에 이르고, 그 이후로도 배움의 창조, 협력적 배움, 교실의 딜레마 등 상당히 추상적인 제목이 이어진다.
우리 상식으로 '방법'에 적합해 보이는 제목은 9장에서 12장에 이르는 수업 디자인 및 수업 연구 등인데, 이 역시 정작 내용을 보면 수업 상호 작용 분석 방법론과 교육사회학적 지식에 대한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도 교사론이다.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매뉴얼은 단 한 줄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구체적으로 이러저러하게 학생들을 만나라라고 하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사토 마나부는 '교육의 방법'이 매뉴얼화되어 전달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교육 방법에 대한 연구는 실천적인 성격을 지닌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을 습득했다 하더라도 (…) 그 교실에서 일어나는 아이들의 배움의 실제 모습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어떤 의미도 없다. 이 책에서는 (…) 전문적인 지식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내고, 교실의 현실에 들어맞게 인식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4쪽)
교육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낸다? 뭔가 익숙하지 않다. 교실에 쉽게 적용될 수 있는 교육학적 지식이란, 학습 목표에서 결과 평가에 이르는 '매뉴얼'을 제공하는 일 아니던가? 그런데 사토 마나부는 '실천적 이미지'를 제시하겠다고 한다. 책을 꼼꼼히 훑어보아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교육하라는 매뉴얼 지침은 하나도 없다. 책 제목을 배신한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점, '매뉴얼'을 벗어나 '이미지화'를 주창하는 것이 사토 마나부의 독보적 기여이자 운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 이미지를 가지고 교육 실천을 할 때에야 비로소 지속적인 교육 혁신이 가능하겠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매뉴얼은 친절하고 쉽게 특정한 지식에 도달하게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데는 실패한다. 매뉴얼적 지식은 수행자의 주체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뉴얼적 지식은 지식을 가진 자로부터 가지지 못한 자에게로 전달되고 복사되는 지식이다. '완전 학습'과 같은 교육 플랜을 통해서, 학생들은 수학의 '달인'이 될지는 몰라도 수'학자'는 될 수 없다.
이미지는 매뉴얼과 다르다. 이미지에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의 상상이 개입된다. 그 개입의 여지로 인해서 사람들마다 다른 적용과 실천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서 수차례 강조되는 '호혜적 대화'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나서 우리가 갖게 되는 이미지는 '평등하고 서로 도움을 주며 친밀한 두 친구'일 것이다.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학생을 대하는 것은, '학생에게 평등하게 대하는 방법'을 순서대로 알려주는 어떤 매뉴얼보다도 지속적이고 근본적이다. 어떤 내용을 어떤 맥락에서 진행할 것인지, 대화의 시작과 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지는 않는 것. 스스로 만들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실천적 이미지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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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서 보면, 에세이처럼 보이던 이 책의 목차는 명료한 체계로 다시 읽히게 된다. 교육사와 교육 철학, 교육 사회학과 교육 심리학, 교사론 등 교육학에서 다루는 거의 모든 영역은 '수업'을 중심으로 묶여있으며, 사토 마나부는 "학교 교육의 현실과 그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기존의 편견과 왜곡을 깨는 과정으로 그의 책 <교육의 방법>을 집필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육 처지에 대한 비판과 동서양의 수업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기존의 교육'이 전제로 해왔던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점검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앞으로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미지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 두 이미지는 교육 패러다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책에는 유독 개념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구미 학교와 일본 학교의 대립, 모방 양식과 변용 양식의 대립, 공부와 배움의 대립, 수양으로서의 배움과 대화로서의 배움의 대립, 테일러링과 오케스트레이팅의 대립,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의 대립. 목표 중심-계단형 교육 과정과 주제 중심-등산형 교육 과정의 대립, 이에 따른 교과 학습과 총합 학습의 대립, 기술적 숙달자와 반성적 실천가의 대립….
전자가 주입식-고립적-교사 중심적 교육이라는 '극복해야 할 이미지'이라면, 후자는 구성적-상호 작용적-학생 중심적 교육의 '지향해야 할 이미지'이다. 예컨대, '공부'가 어떤 것과도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는 기억과 암기 활동임에 반해, '배움'은 대화에 의해 세계를 읽어 넓혀가는 과정이다. 계단형 교육 과정이 학습 도달점을 목표로 학습 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하여 학습을 획일화하고 좁은 경험에 가두어버림에 반해, 등산형 교육 과정은 주제를 중심으로 학습하며 설사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학습 경험 자체를 즐긴다.
기술적 숙달자로서의 교사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수업의 프로'를 지향한다면, 반성적 실천가로서의 교사는 실천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스스로의 전문성을 키워나간다. 이런 방식으로 사토 마나부는 교육 평가에서 교육 철학에 이르는 교육 논의들을 두 가지 패러다임으로 구획하고, 그 이론의 토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배움의 공동체'를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무리수도 없지는 않다. 구미 학교를 지식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로, 일본 학교를 인간성 형성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로 본다거나, 수양과 대화를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마나부의 가름에 따르면, 지역을 불문하고 학교가 수행해왔던 사회화의 기능을 무시해야 하며, 수양을 위한 대화나 대화를 통한 수양은 제외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이원적 대립의 목적'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배움의 공동체라는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고, 교육 개혁의 지향성을 분명하게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육의 보다 좋은 본연의 모습"(12쪽)을 복구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이자 개념을 통한 운동의 일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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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라면 마나부의 책 속에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배움의 공동체를 통해 학교가 개혁되었음을 강조하지만, 아이들이 성인과 어떻게 다른지, 아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그들을 발달을 도와야 하는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파울루 프레이리나 앙리 지루, 벨 훅스나 린드만과 같은 '진보적 교육 이론-실천가'들과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이리의 논의에는 언제나 '학습자'가 중심에 있다. 의식화라는 교사의 분명한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과 학습의 진행 방식은 철저히 학습자의 현재 인식과 상황에 따른다. 학습자가 사는 지역을 문화 기술적으로 연구 조사하고, 핵심적인 언어를 추려내 철저히 학습자를 이해하고 나서야 교사들은 대화를 시작한다. 학습자는 교육을 통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고, 해방적 인간이 된다.
벨 훅스는 학습자들이 "차이를 정당화하는 기준에 맞춰 세워진 경계를 넘도록 하기 위해"(<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윤은진 옮김, 모티브북 펴냄) 교사들이 공동체적 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공동체'라는 방법은,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습자'의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토 마나부의 문제의식이 제대로 살아나려면, 배움의 공동체는 '마이다스적 방법'이 아니라, 아이들을 활력화하고 주체화하는 일련의 학습 과정과 결합된 '의미 있는 학습 환경'으로 위치 지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아이들을 키워낼 것인가'라는 내용이 전면에 제시되어야 한다. 아이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교사의 안내와 결합된 아이들의 변화 과정이 배움의 공동체 운영 방법 이상으로 탐색되어야 한다.
듀이의 교육적 실험이 엄청난 반대에 좌초되고 만 것은, 그의 실천을 추동시켜 내는 '계속성과 상호 작용성'의 원리를 교육 실천가들이 이해·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동 중심적 교육은 아동 추수적 교육으로 변질되었다. 반면 프레이리가 45일 만에 300명 이상의 빈민을 문해 상태에 이르게 하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학습자인 빈민들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토대로 도달해야할 '해방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사토 마나부의 논의는 명확하게 듀이 쪽이다. 배움의 공동체는 자칫하면 '괜찮은 수업 방법' 정도로 해석/오해될 여지가 많다. 우리나라처럼 일제식 수업에 익숙한 문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혁신 학교에서의 배움의 공동체 실천에 대한 생산적 비판은, 그래서 너무나 필요하다. 아무리 '혁신'을 외치더라도, 배움의 공동체를 'ㄷ'식 책상 배치를 하고 진행하는 토론식 수업으로 생각한다면, 또는 아이들에게 적당한 토론거리를 던져주는 것으로 여긴다면, 실패는 명약관화하다.
비판의 핵심은 배움의 공동체의 '매뉴얼화'다. 배움의 공동체는 철학의 전환이어야 한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도달해야 할 건강하고 공정하며 성숙한 인간상을 '이미지화'해야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는 위치'로 내려와야 하며, 동시에 학생에 대한 강력한 교육적 의지를 가져야 한다.
어렵다. 하지만 이런 일을 시작하는데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나의 실천'들을 편 나눠보고, 고민하고, 새로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론적 잣대'를 명료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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