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당 대회가 11월 23~24일 양일에 걸쳐 관훈동 시천교당에서 열렸다. 첫날 발표된 "합당 경과 보고"는 지난 8월 이래 3당 합당 과정의 곡절에 대한 남로당의 공식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 국내 모든 정세는 민주 세력의 단결을 무조건적으로 요청하여 남조선 3대 민주 정당의 합당 운동이 시작되었다. 즉 지난 8월 6일 조선인민당에서는 합당에 대한 제안을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에 보내어 동월 8일에 조선공산당에서 동월 9일에는 남조선신민당에서 각각 동의를 얻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각 당에서는 합당 준비 위원 9명씩을 선임하여 합당 사업을 일임하였다.
이래 3당 합당 준비 위원은 5차에 걸쳐 연석회의를 열어 구체적 수행 방침을 토의한 후 9월 4일에 정식으로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선언 규약 초안을 결정하였다. 이 강령 규약 초안에 준하여 각도 각부·군에 합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하부 세포로부터 합당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남조선 전역에 뻗친 인민 투쟁에 대한 강압과 당내 옳지 못한 분자의 합당 공작 방해로 인하여 조직상 지장이 많았으나 전 당원은 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합당 운동에 매진하여 군 합당과 도 합당이 예기대로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에 남조선노동당결당대회를 개최하여서 근로 인민의 유일 최대한 정당이 발족하게 된 것은 민주 건국을 위하여 실로 경하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6년 11월 24일자)
이 대회에서 남로당준비위원장 여운형의 축사가 대독된 것은 본인이 승인한 일로 봐야겠다. 그는 남로당과 사로당 양쪽 준비위원장 명함을 함께 갖고 있었지만 어느 쪽에서도 운신의 폭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남로당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 세력은 여운형의 명망 때문에 (그리고 아마 북로당 지도부의 희망 때문에) 준비위원장으로 이름을 걸어놓고 있었지만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로당 위원장 선임이 발표되기 전인 11월 30일 남로당 대변인 이걸소(본명 이기석)는 여운형이 남로당 노선을 고수하면 당수로 추대하겠으나 남로당이 노선을 변경하여 여운형을 쫓아갈 수는 없다고 밝혔다. 12월 10일 남로당은 제1회 중앙위원 및 중앙감찰위원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중앙위원 위원장에 허헌(신민당), 부위원장에 박헌영(공산당), 이기석(인민당)을 선임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481쪽)
한편, 사로당은 확고한 중심 세력이 없기 때문에 여운형이 영수를 맡을 수 있는 여건이기는 했다. 그러나 북로당의 지지와 지원 없이 순탄한 진로를 바라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사로당은 11월 16일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백남운과 강진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공식 출범하였으나 바로 그 날 북로당 중앙위원회에서 사로당을 비판하는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그런데 사로당은 북쪽으로부터 전보다도 더 강력한 결정서가 내려옴으로써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1월 16일 북로당중앙위원회에서는 사로당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서는 박헌영 선생을 수위로 하는 남조선공산당의 정치 노선은 정확한 노선이라고 지적하고, 강진을 주모로 한 분파적 행동은 원수들의 힘을 도와주는 것으로서 민주주의 진영을 분열시켜 민족의 멸망을 초치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사로당은 소위 좌우익 합작을 찬성하며 입법 기관의 창립을 지지하는 분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 결정서에서는 강진과 백남운의 이름을 열거하여 이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479~480쪽)
좌우 합작을 비판하는 11월 21일 사로당 담화문은 북로당의 압력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좌우 합작이라는 것이 반민주 혹은 반동파와의 원칙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원래 박헌영과 이승만과의 타협 교섭에서 시작되었고 그 뒤에 여운형·이주하 등과 김규식의 협상에까지 이르렀다. 민전의 5원칙으로 말미암아 이 협상은 결렬되고 여 씨와 김 박사와의 상의만이 계속되어 좌우합작위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민주진영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7원칙이 발표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원래 무원칙한 존재인 만큼 민주주의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입법 기관의 탄생을 합리화시키는 등 반민주 노선에 기여하였다. 우리 당은 당초에 좌우 합작 문제에 대하여 애매한 반대의 태도를 가졌을 뿐으로 아무런 책임을 질 바는 아니지만 지금 애매한 태도를 청산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도달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23일자)
이 시점까지 여운형의 공식적 입장은 좌우 합작에 참여하고 미군정의 입법의원 설치에도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되, 민주적 개혁을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며 졸속한 설치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사로당마저 좌우 합작 자체를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11월 29일 사로당 선전부장 이우적의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답이 오갔다.
(문) 과반 사로당의 좌우 합작에 관한 발표에 대하여 당내 의견 대립이 있었다는데 진상 여하?
(답) 다소 있었으나 결국 좌우 합작의 당사자가 여 선생이니만큼 전 인민당 당수로서 여 선생 개인이 책임을 지고 처리하도록 되었다. 사로당으로서는 전일 발표한 바와 같이 종시일관 반대의 태도를 견지하겠다. (<경향신문> 1946년 11월 30일자)
지난 여름 이래 여운형은 좌우 합작과 좌익 합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쫓고 있었다. 박헌영의 독단적이고 과격한 노선에 대한 좌익 내 반발을 규합하면서 민족 통일 전선을 지향하는 좌우 합작을 추진함으로써 두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전략의 성공을 위한 열쇠가 북로당의 지지에 있었다.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여러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북로당 세력은 이남 좌익에게 큰 언덕이었다. 북로당 지도부의 지지를 받는 노선이라야 이남 좌익의 안정된 통합을 바라볼 수 있었고 좌우 합작에도 힘을 가지고 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로당은 박헌영의 손을 들어줬고, 여운형은 두 토끼를 다 놓치고 말았다. 두 토끼를 포기한다는 사실을 여운형은 12월 4일 발표한 "좌우 합작과 합당 공작을 단념하면서"란 제목의 자기비판 글에서 밝혔다. 정계 은퇴의 뜻을 담은 글이었다.
"조국 건설에 충성을 다하고자 적은 힘이나마 바쳐 여러 선배와 동지들의 뒤를 따르리라고 해방 후 1년 이상 노력하였으나 역량과 덕망이 없을 뿐 아니라 지식과 준비가 부족하여 본의 아닌 과오를 많이 범하였다. 조선의 독립 완성에는 국제적 관련성이 적지 않으므로 독립을 갈망하는 조선 인민은 미소공위가 재개되어 막부 결정이 속히 실현되기를 거족적으로 요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소공위 휴회의 원인과 재개의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자력으로 해야 할 건국의 준비를 위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자가 회담하여 공통된 조건을 발견하려고 노력한 합작 운동이 속칭 좌우 합작 그것이었다. 이 운동을 통하여 무슨 건설적 효과가 있기를 무한 기대하였으나 아직까지 소기의 목적을 달할만한 물질적 조건이 모이지 않으므로 좌익진영에서는 이를 반대 규탄하여 나의 행동은 제재되었다.
좌익 삼당 합동 문제가 제기된 이래에 지도층의 경험 부족과 기술 빈궁으로 일어난 오해 충돌은 결국 좌익 진영에 커다란 분열을 초래하였으니 이에 관하여는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그 책임을 느끼게 되어 남로 사로 양당의 무조건 통일을 주장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최후로는 사로를 해체하고 남로에 통일하기를 간청하여 이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합작 운동은 전 민족 통일을 의도함이요 좌당 합당의 혁명 역량을 단일화하려 함이다. 그러나 현상은 근본 의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치 못한다면 우리의 전도는 실로 암흑하다.
이러한 난국에 처하여 역량 없고 과오 많은 내가 이 중임을 지려다가 일보도 전진 못하고 넘어져서 이를 그르치는 것보다 차라리 민중 앞에 사죄하며 이 중책에서 물러감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군이 남조선에 군정을 포고한 후 군정이 조선의 민주건국에 원조하고 성공하기를 바라고 항상 협력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금 남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사태는 혼란이 극도로 달하였고 좌익 투사는 거개가 투옥당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민중은 나의 정치적 행동이 애매하다 지적하고 의심 또는 원망(怨望)한다. 나는 이를 변명할 도리가 없어 책임을 지고 물러가기로 한 것이다.
미국의 친우 중에는 나의 태도를 소비적이라 하여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나 무능한 나로서는 이 이상 더 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이것은 내가 혁명 전선에서 이탈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서는 것이요 나의 여생을 민주 진영의 한 병졸로서 건국사업에 바칠 것을 맹서한다. 근자 나의 명의로 회담·성명·담화 등이 발표되는데 그 태반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금후는 내가 직접 혹은 친필로 발표하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겠다."
("자료 대한민국사"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6년 12월 5일자"로 표시되어 있는데, "근현대신문자료"에서 <동아일보> 기사를 확인하니 절반 정도 축약된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북로당 지도부가 여운형을 버린 이유를 나는 지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북로당이 추구한 통일 전선 전략에도 박헌영보다 여운형의 노선이 더 잘 어울렸고, 미군정의 좌익 탄압 정책에도 적응력이 나았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나오는 서용규(가명)의 증언을 보더라도 여운형이 이북 요인들의 더 많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여운형이 북로당의 지지를 바랄 만한 상황이었다.
확실한 답을 바로 얻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상황 진행을 살펴보며 계속 유념할 문제로 접어둔다.
여운형이 위 글을 발표한 사흘 후 백남운도 정계 은퇴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성명서에서도 박헌영 노선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김두봉과의 친분 때문에 1년 가까이 정치계에 나와 활동했던 이 학자는 왜 북로당이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다.
"내가 금년 2월초에 독립동맹에 가담한 것은 민주 독립과 구체적인 진리의 실현에 대한 열정에서 나왔던 것이다. 지금 회고하건대 자기 역량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 운명적이었다. 더우기 민주 역량의 강화를 위한 주관적 의도와는 반대의 결과로 된 것도 있었다.
특히 남로·사로 양당의 통일 합동을 주장하여 왔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양당의 분립 관계가 오래 지속되어 갈수록 반동 진영에게 어부의 리를 줄 뿐 아니라 결국은 동지 상잔의 비극을 초래할 위험성도 있지 않을까.
해방 정치의 동지를 이용의 기변주의(機變主義)로써 훼예(毁譽)하는 것은 민주 도덕의 모독인 것이며 독선적인 파벌주의로써 인민을 유도한다면 내란의 씨를 뿌리는 장본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내부적 사정과 여하한 이유를 막론하고라도 통일 합당을 실현해야 할 것이며 해방 노선의 실천을 위하여는 총력 투쟁이라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 분업의 기능도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입법의원 설치와 그것을 위한 소위 좌우 합작과는 절대 반대이므로 전연 하등의 맥락이 없었다. 또한 내가 원래 포회하고 있는 인민본위의 해방관은 금후로도 생애를 일관할 것이다. 그러나 목하의 실제문제로서 그 통일 합당을 실현시키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자인할 뿐 아니라 덕력의 부족을 자괴하는 동시에 지병인 빈혈증의 빈발로 말미암아 실천 활동이 곤란한 바 있으므로 자에 정당관계를 떠나 인민의 벗으로서 서재의 본업을 다시 계속하려 한다." (<서울신문> 1946년 12월 8일자)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