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23일에 있었던 일로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는 김구 등 임시정부 제1진이 귀국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당시 최대 신문이던 <매일신보>가 미군정에게 정간당했다가 두 주일 만에 <서울신문>으로 새 출발을 한 것이다. 이 곡절을 겪고도 <서울신문>은 중도적 논조를 잘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귀국 1주년을 맞은 김구가 <서울신문> 출범 1주년을 축하한 글에서 모처럼 격한 어조로 마음속을 털어놓았다. 긴 글인데, 눈에 띄는 대목을 뽑아놓는다.
"오늘 11월 23일은 내가 귀국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나의 연령이 고희를 넘어 비록 신경이 지둔하고 혈기가 쇠약하였다 할지라도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느끼는 바가 없으랴.
(…) 나의 심서(心緖)를 언제든지 □란케 할 뿐 아니라 서늘하게 하며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제 시대만 못하다는 소리다. 내가 입국한 지 수삭이 되지 못하여 이 소리를 듣기 시작하였는데 근일에는 경향 간에서 점점 이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38 이북에도 이 소리는 있는 것 같다.
(…) 친일분자로 지목을 받는 자 중에서 일찍이 왜적 이상으로 왜국을 위하여 충견 노릇을 한 무리는 감히 대두도 하지 못하며 혹 그 정상이 비교적 경한 무리로도 자숙하는 부분도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하여 글 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호하는 무리를 대할 때에는 구역이 나지 아니 할 수 없다. (…) 통화는 팽창하여서 물가는 점점 고등하므로 민생은 도탄에 있건만 돈은 점점 말라서 극소수의 모리배와 부호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중산 계급 소시민층까지 적빈한 무산층으로 몰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모리배들은 이 위험한 상태를 도외시하고 절대다수의 동포를 기만하며 우롱 하면서 그들의 주머니를 짜내고 있다. 내가 여기 지적하는 모리배는 동포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사 자리만을 위하여 분주하는 정객들도 포함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예는 매거하기 미달하거니와 그 원인을 생각하면 일본 제국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끼쳐준 심리상 독소 그대로 잔재한 까닭이다. 여하간 이러한 독소가 잔재하고 있는 한 모든 정형은 일제 시대와 같든지 도리어 그만도 못할 것이다.
(…) <서울신문>이 탄생한 지는 불과 1년이지만 그동안에 여론 지도와 민지(民智) 계발에 위대한 업적을 내어 실로 우리 독립 운동에 공헌이 다대하였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어니와 앞으로는 심리 건설을 위하여 특별한 노력이 있기를 간망한다. 그리하여 하루라도 신속히 일제 시대만 못하다는 소리를 근절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 독립을 촉성하자." (<서울신문> 1946년 11월 26일자)
"황국의 성전을 위하여 글 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호하는 무리"에 구역이 난다고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서울에서 입법 의원에 출마한 장덕수와 그 배경인 한국민주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장덕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1년 후(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그 배후로 김구가 의심받은 이유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1946년 9월 8일자 일기에서 장덕수에 관해 쓴 것을 돌아보니 나도 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다. 이 작업에서 개인적 감정을 억제하려 애쓰지만, 억제하기 힘든 사람이 몇 있고 장덕수가 그중 하나다. <친일 인명 사전>이 나와 있으니 일제 말기 그의 활동을 누구나 쉽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런 행적을 "강압에 못 이겨 부득이하게" 한 일이라며 입법 의원에 출마한 것은 파렴치의 극치다. 마치 "친일파? 멋대로 떠들어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마" 작심하고 출마한 것 같다.
한민당은 출범 때 "임정 봉대(奉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임정 귀환 한 달 후 반탁 운동을 터뜨릴 때도 임정을 깍듯이 받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소공위 협의 상대 신청을 놓고 실리주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1946년 3~4월 우익 정당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길이 다름을 분명히 했다. 한민당의 통합 거부의 주역이 장덕수로 알려졌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 대편 2>(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65~67쪽)
김구는 모리배의 창궐과 민생고를 한탄하면서 그 원인을 "일본 제국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끼쳐준 심리상 독소"에서 찾았다. 현실 문제의 원인을 정신 측면에서 찾는 데는 요점을 놓칠 위험이 늘 있는 것이지만 이 시점에서는 매우 적절한 지적 같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도 어려운 상황으로 보였을 텐데, 지금 돌아보면 내우와 외환이 모두 만만찮은 상황이었다. 일본 세력이 물러나고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는데, 두 세력 사이의 관계가 급속히 불편해지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판에 38선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단결이 필요했고 단결을 위해서는 해방의 기쁨을 발판으로 민족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명백한 친일파가 아직도 큰소리치며 행세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지난 연말 신탁 통치 문제가 터졌을 때 김구가 '국자(國字)'를 내놓은 것은 상황을 너무 쉽게 봤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친일파들까지도 고개 숙이는 것을 보며 임정의 권위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합쳐진 민의 앞에 미군정도 소련군도 물러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1946년 한 해 동안 김구는 말도 행동도 줄이고 지냈다.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소극적 태도를 지키는 동안 반탁 운동을 위해 만든 국민총동원위원회도 독촉국민회로 흡수되고,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을 통합한 한독당도 활발하지 못했다. 국민당과 함께 한독당에 들어간 안재홍은 1946년 한독당의 상황을 김구가 죽은 후 이렇게 회고했다.
한독당은 현재 부통령(이시영)과 기타 중경 임정계 요인 대부가 그 간부진에 나열되어 있던 터이고, 스스로 일선에 나서시는 백범의 거대한 영향력과, 조소앙 씨와 나와 외타 소장중견 동지 제씨와가 함께 진두에 나서면, 국내 투쟁 수십 년에 민중의 또 민족의 호흡에도 통하고 민중의 일상생활상의 염원의 어떠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잘 파악하고 있노라고 나는 자임하는 터이므로, 일대 활약이 가능하리라고 믿었었는데, 합당 1주년이 가까운 동안 당의 발전은 자연 생장적으로만 되었었고 계획적 부면은 그토록 활발치도 못하였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백범 정치투쟁사" 439쪽)
한독당이 활발치 못한 중요한 이유 하나가 좌우 합작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 있었던 것 같다. 합작 당사자들은 미소공위 재개 촉구를 합작의 제1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김구를 포함한 임정 요인들 중에는 3상 회담과 미소공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그래서 안재홍 등의 합작위 참여는 용인하지만 거당적 지지는 하지 않는 애매한 태도였다.
그러다가 11월 18일에 좌우 합작을 강력히 지지하는 담화를 김구가 발표했다. 김규식, 여운형 두 당사자에 대한 경의와 신뢰까지 표명했다. 민중 소요에서 한민당-이승만계의 입법의원 장악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에 자극받아 중도파의 입장을 뒷받침해 줄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조금 길지만 좌우 합작에 대한 김구의 태도는 당시의 중요한 변수로서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은 주제이므로 담화 전문을 옮겨놓는다.
"나는 좌우 합작이라는 것을 전 민족적 통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통일이 없이 더 좋은 독립 촉성의 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더라도 성공할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우리의 해방자들이 얄타에서 과오를 범한 탓으로 해방되었다는 우리나라가 두 쪽이 났는데 거기다가 우리 자체가 통일이 되지 못하면 그 전도는 생각만 하여도 두려울 만큼 위험한 것이다.
북쪽에서 어떠하든 남쪽에서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외치는 것은 이 위험의 도래를 더욱 촉진시키는 것이다. 북쪽의 동포도 남쪽의 동포와 하루바삐 통일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도 우리의 통일이 없이는 38도선의 철폐도 조국의 독립도 다 어려울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우 합작이 속히 진전 못 된다고 조급히 굴 것이 아니다. 급한 것을 참지 못해서 좌우 합작 운동을 파괴한다면 그 결과는 본의 아닌 과오가 나타날 뿐이다. "小不忍이면 難大謀[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라는 것을 우리의 경구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규식 박사가 영도하는 좌우 합작은 민주주의 결의에 의하여 진행하고 있는 것이며 이승만 박사와 나도 지지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김 박사를 가리켜 좌파니 또는 신탁 통치 찬성자니 하여 중상하는 자도 없지 아니한 듯하다. 또 들으면 금번 기개지방의 소요 사건 발생의 책임을 좌우합작위원회에 전가하려는 비언(蜚言)을 주출(做出)하는 일도 있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좌우를 물론하고 모두 통일을 파괴하려는 무리들의 험악한 모략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불 놓은 자가 불이야 하는 셈이다.
나는 작일에 김규식 박사를 병원으로 심방하였는데 그 초수한 얼굴을 대할 때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는 무엇을 위하여 이와 같이 생명을 단촉하고 있나'하고 자연히 미안한 생각이 떠돌았다. 그의 쇠약한 몸에서는 양심만이 뛰고 있고 그의 병상머리에는 성경 한 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누구든지 이 광경을 보는 자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운형 씨에 대하여서 나도 불만한 바가 없지 않았으며 또 근일 항간에서도 다소 비난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금차 좌우 합작에 있어서의 그의 몇 가지 용단을 알고 도리어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하여간 김 여 양씨에 대하여 기대가 큰 만큼 우리는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로 하여금 유종의 미가 있게 하기에 노력할 것뿐이다. 그러나 미리 조급증을 내서 그들로 하여금 낙심을 시킨다는 것은 신경과민일 것이니 경계하여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끝에 부대로 세상에 정중히 한 가지를 성명할 바는 근일 모 신문에서 나를 해사의 고문이라고 선전하는 것 같으나 나는 자초로 어느 신문과도 관계를 가진 일이 없으며 더구나 고문이라는 것은 나의 주지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9일자)
끝에 모 신문의 고문 운운 한 것은 확인하지 못했으나 <자유신문>으로 짐작한다. 10월 하순에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신익희는 총동원위원회가 독촉국민회로 합류하는 과정에서 김구를 등지고 이승만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유림이 신익희에게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 치는 장면을 지난 8월 4일자 일기에 소개했는데,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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