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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잔인하고도 사랑스런 삶의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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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잔인하고도 사랑스런 삶의 축도!

[親Book] 서효인의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나는 거실에 앉아 있다. 대추나무와 목련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나무들이 있는 마당을 향한 창문 아래에는 리모컨이 딸린 21인치의 대형 TV가 있다. TV에서는 야구 경기가 한창이다. 그걸 보는 것은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구부정하고 넓은, 그 등판을. 어느 평범한 토요일이고, 여과 없이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러니까 이건 무척이나 멀고 먼, 그래서 빛나는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오랜 기억의 풍경이다. 돌아보기 위해서는 눈을 가늘게 떠야만 하는.

TV 안에서는 공놀이가 한창이다. 색색의 운동복을 맞춰 입은 어른들이 작은 공을 치고 또 받으며 야구장을 누빈다. 나는 하품을 한다. 시시하고, 또 지루하다. 평소라면 친구들과 기찻길 옆의 개천에서 올챙이를 잡거나 노랗고 탐스러운 호박꽃을 조심스레 벌리며 풍뎅이를 찾을 시간.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아버지의 등판을, TV를, 쏟아지는 햇살을, 그 밖의 놀랍고 또 시시한 것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나는 작고 유연한 몸을 쉴 새 없이 꼬아대면서도 자리를 뜰 생각은 하지 않고, TV 속 작은 어른들이 펼치는 게임에 푹 빠진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하지 않는 한. 가족과 있을 때면 말은 더욱 줄었다.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일까. 캐스터와 해설자, 관중과 선수 들이 만들어내는 그 모든 소리들이 거실을 채우지 않았을 리 없건만, 음소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듯, 내 기억 속의 그 시간들은 순전한 침묵으로만 남았다. 어느새 깜박 잠이 든 내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다시금 눈을 떠 마주한 것 또한 까맣게 잠든 TV와 아버지의 빈자리, 그리고 여전한 침묵이었다. 침묵은 커다랗고, 또 막막했다.

아마도 나는 아버지의 세계가, 내가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가 궁금했던 것이리라. 하루 세 번 내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던, 마감을 앞둔 월말이면 편집부에서 걸려오는 독촉 전화를 엄마와 내게 미루고, 술 취한 새벽이면 할부로 장만한 전축의 볼륨을 최대로 높인 채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레코드판을 틀던 그 남자의 세계가. 손을 뻗으면 늘 그 자리에 있던 엄마의 젖가슴과 달리, 우리의 가계에서 언제나 몇 걸음쯤 물러서 있던 그는 내게 이국의 문자처럼, 아무리 보아도 그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야구와 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상적인 첫 만남은 아니다. 함께 캐치볼을 한 것도, 목말을 타고 야구장에 간 것도 아니지만, 아무려나, 아버지를 통해 나는 야구라는 게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집을 떠난 아버지가 나 아닌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로도 나는 야구와의 관계를 끊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야구는 아버지가 내게 남긴 일종의 유산이라고. 과연 그것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나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에서 펼쳐지는 어른들의 드라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작업실로 쓰이던 작은 방에 들어가 훔쳐보던 만화책과 추리 소설과 36개월 할부로 구입한 백과사전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물론 내가 이해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결국 사랑하게 된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야구란 내게 사라진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린 무의식이 필사적으로 찾아낸 대용품에 불과한 것일까? 글쎄, 나는 어설픈 심리학엔 관심이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야구와 나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언젠가 U2가 노래했듯이) 그런 해묵은 감정들을 끄집어내기에 오늘 밤은 너무 늦었다. 나는 단지 한 권의 책에 대해, 또 가능하다면 야구라는 게임에 대해 몇 마디쯤 늘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서효인 지음, 다산책방 펴냄). ⓒ다산책방

서효인의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다산책방 펴냄)는 그런 책이다. 일단 야구에 대한 책이라고 해야겠지만, 동시에 그 밖의 다른 많은 것에 대한 책이고, 그렇기에 읽는 이의 기억을 사정없이 흔드는 책이다. 폴 오스터가 말했듯 돈이 언제나 돈 이상의 것이라면, 야구 또한 언제나 야구 이상의 것. 그런 이유로 야구라는 게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때론 야구 이외의 것들을, 어쩌면 세상 전부를 끌어안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정확하게 이해한다. 그리하여 TV 속의 야구에 열광하며 굳이 돌아보지 않았던 어떤 기억을, 장면을, 나 자신의 야구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새삼 감각하게 되는 것 또한 야구라는 게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세상은 수많은 형태의 야구로 가득 차 있고, 그 모든 야구의 총합이 바로 세상이라고. 다섯 살 꼬마의 야구가 있고, 초등학교 6학년의 야구가 있으며, 취업 준비생의 야구와 연인들의 야구, 백수의 야구와 중년 가장의 야구와 또 시인의 야구가 있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굳이 의식하지 않은 채 날마다 벌이고 있는 그 모든 야구를 시인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사랑하는 게임이다. 그러니 그것으로 좋다는 생각이다.

물론 사랑이 전부는 아니다. 사랑으로만 이겨나갈 수는 없는 것. 그게 세상이고, 또 야구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가 종종 우리를 아프게 하듯, 야구 또한 우리를 아프게 한다. 세상에 태어나 한 일 중에 가장 용감한 일이 무엇이냐는 아들의 질문에 "오늘 아침에 일어난 거"라고 답하던 어느 소설의 아버지처럼, 당신에게도 쓴 침을 삼키며 "오늘도 그 팀의 야구를 본 거"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있다.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내 경우, 그것은 지난 시즌 전체였다. 하지만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저자가 말하듯 "야구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 주제에, 날마다 쉬지도 않고 해대는 잔인한 게임"(142쪽)이라는 것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실은 그러하니까.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너무 돌아온 느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소중한 것들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다만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기다리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 나는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당신이 야구란 게임을 숭배하는 야구 근본주의자라면 레너드 코페트의 경전 <야구란 무엇인가>(이종남 옮김, 황금가지 펴냄)를 읽어라. 메이저리그로 대표되는 야구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조지 벡시의 <야구의 역사>(노지양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를, 그 게임의 현재를 알고 싶다면 (이미 조금 뒤처지긴 했지만)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김찬별·노은아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을 읽으면 된다.

복잡한 고민 없이 감동적인 드라마에 빠지고 싶다면 마이클 새라의 (아쉽게도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다)나 버나드 맬러머드의 <내추럴>(김미정 옮김, 사람과책 펴냄)이 있다. 혹은 문학은 인생이고 인생은 곧 야구라는, '문학=인생=야구'의 등식을 믿는 당신이라면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박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야말로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물론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 펴냄)도 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의 야구를, 그것에 대한 사랑과 분노를, 그 사랑과 분노가 변화시킨 당신의 삶을, 그리하여 당신이 오늘도 플레이하고 있는 그 야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이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대단한 성찰을 전해주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저자가 야구를 생각하는 방식을, 기억하는 방식을, 준비하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몰래 이미 잊었다고 생각한, 잊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버렸던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꽤, 신기한 경험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뒷모습과 그가 몰두하고 있었던 그의 야구를 생각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다지 내키지도 않는다. 마치 커다란 그물에 딸려오는 온갖 잡동사니처럼, 아버지의 야구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기억의 가지를, 혹은 가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궁금하긴 하다. 올 시즌 프로 야구의 우승을 차지한 것은 바로 그의 팀이고, 그가 그 경기를 보았는지, 보았다면 어떤 기분이었는지, 숨이 터지도록 기뻤는지 차라리 눈물겨웠는지,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랑과 분노, 후회와 절망, 기쁨과 체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과 살짝 흘러 입술 끝에 머물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웃음을, 우리는 간단하게 줄여 '야구'라고 부른다. 끝내, 부르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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