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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국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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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국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동아시아를 묻다·8] 다케우치 요시미를 다시 읽다

지난 두 번의 글을 읽고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를 다시 읽었습니다. 덕분에 소중한 독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근대란 무엇인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등을 읽으며 전율했던 기억이 지금껏 생생하네요. 제가 동아시아를 궁리하게 된 회심의 언저리에도 다케우치와의 조우는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의 남다른 매력은 살아 움직이는 역사의 변화에 직면하여 현실에 투철하게 개입하고자 하는 실존적 행위로부터 연유합니다. 그래서 그의 어투와 문장은 기계적인 객관성과 중립성을 초월한 어떤 '결단'과 '결기'의 아우라로 강렬하지요. 오판과 오류를 무릅쓰고서라도 현실에 육박해 들어가고자 하는 특유의 태도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헌데 이참에 다시 검토하다 보니 예전에는 주목하지 못했던 몇몇 지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예전의 압도적 몰입과는 달리 일정한 거리 확보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이는 아마도 '2011년'이라는 시점과, '캘리포니아'라는 장소가 부여하는 상황성에서 비롯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번 대화는 캘리포니아에서 다케우치 요시미를 다시 읽는 소회로 꾸려볼까 합니다.

번역의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윤여일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의 출판을 축하하는 뜻도 겸하면서 말이죠.

다케우치 요시미의 매혹

▲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년). ⓒ프레시안
먼저 그의 독특한 태도가 극명하게 표출되었던 대동아 전쟁에서 출발합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했습니다. 미국과의 전면전이 개시된 것이죠. 그 긴박한 사태에 직면하여 그는 '대동아 전쟁과 우리들의 결의'(1942)라는 비장한 글을 발표합니다.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변했다"는 첫 문장부터 32세, 청년 다케우치의 결기가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대동아 전쟁의 이념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것이지요.

헌데 한결 문제적인 지점은 그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도, 대동아 전쟁에 투신했던 젊은 날의 선택을 끝끝내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당시의 선택으로 되돌아가 전후 일본을 비판하는 사상적 자원을 발굴하고자 했었지요. 흡사 극우파의 화신으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한 대목입니다. 숱한 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고수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던가, 재차 탐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애당초 일본 해군은 '태평양 전쟁'을 요청했다고 하죠. 허나 대본영 회의에서 그 요구는 기각되고 맙니다. 태평양 전쟁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 불과한 탓입니다.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숭고한 이념이 망실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대동아 전쟁'의 성격은 복합적입니다. 제국주의적인 전쟁이자, 제국주의 간의 전쟁이고, 나아가 제국주의 너머를 내다보는 최후의 전쟁이라는 역사철학적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허황한 기만책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럼에도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이념에 자신을 걸었습니다. 지배자들의 선동에 넘어가서도, 그 자신의 지성이 미숙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대동아 전쟁을 통하여 그가 기탁했던 미래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짐작컨대 중국 침략을 거두고, 타이완과 조선, 만주도 해방시켜 마침내 제국 일본이 해체되기에 이르는 어떤 파국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미국과 대결함으로써 아시아를 방기했던 제국 일본이 철저하게 붕괴되는 것. 그 폐허에서 일본과 아시아의 재생을 소망하는 것.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의 파산까지 밀고 가는 이 사상적 기투는, 그리하여 그 아슬아슬함만큼이나 매혹과 마력으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당시의 역사적 숙명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지요.

다케우치의 도박은 끝내 실패했습니다. 제국 일본의 파산이 아시아로의 귀환을 산출하지도 못했습니다. 미국의 점령지가 되었고, 미일 안보 조약의 우산 아래서 '종속 국가(client state)'의 굴욕을 떠안게 됩니다. 그 굴욕을 굴욕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전후 일본'에 그의 절망은 한층 깊어졌고요. 아니 국공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진 동아시아 30년의 열전과 격절된 채 일본은 '전후 민주주의'의 번영을 구가하기에 이르죠. 그는 이 역주행을 목도하며 거듭거듭 위태로운 대동아 전쟁의 기억을 환기시켰던 것입니다.

실제로 1945년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는 그의 태도를 섣불리 단죄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일장기는 끌어내려졌지만, 그것을 대신한 것은 기왕의 식민 제국, 즉 유럽의 열강과 새로운 제국으로 부상했던 미국과 소련이었던 탓입니다. 가령 한반도에 미소의 지원을 등에 업은 두 개의 분단국가가 등장한 것은 1948년입니다. 중국 또한 1949년이 되어서야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고,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것은 1947년이었습니다. 게다가 2000만 명의 대규모 인구 이동을 수반한 파키스탄과의 분리 독립이었죠.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가 물러난 것은 1949년입니다.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철수도 1954년의 일이고요. 나아가 미국과의 전면전 끝에 통일이 완수된 것은 1975년입니다.

말레이시아도 1963년이 되어서야 독립하고, 그로부터 싱가포르가 분리 독립한 것은 1965년입니다. 실론이 스리랑카로 국명을 개명한 것은 1972년이고, '버마'가 미얀마로 개칭한 것은 1989년이죠. 모두 영국 제국주의 청산 작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여기에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과 1999년 포르투갈의 마카오 반환까지 곁들이면, 20세기의 마지막 해가 되어서야 유럽의 아시아 침략사가 일단락을 맺은 셈입니다. 다케우치가 복기하고자 했던 대동아 전쟁의 '이념'은 반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던 것이지요.

일본의 패전과 아시아의 독립 사이에 노정되는 이 시간적 지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돌아보면 그 간극은 1941년 8월 14일로부터 연유합니다. 이 날 루즈벨트와 처칠은 '대서양 헌장'을 발표합니다. 미영 양국이 나치 독일과 맞서기 위해 공동 선언을 했던 것이죠. 그 중 특히 3장이 주목을 요합니다.

3장은 "모든 국민이 정치 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주권 및 자치가 강탈된 곳에는 그 권리를 반환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문제 삼을 대목이 없어 뵈기도 합니다. 하지만 1941년의 시점에서는 결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었던 탓입니다.

가령 처칠은 인도의 주권이 영국에 있음을 고집했습니다. 혹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인도를 침략하면 주권의 손상을 입는 것도 영국이라는 것이지요. 즉, 대서양 헌장 3장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승인하는 조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장 혁명으로 독립을 모색했던 인도 국민군 또한 영국의 '주권'에 대한 침해자였던 것이고요.

'대동아 전쟁'은 이 '대서양 헌장'의 기만성을 간파하고 그 허점을 파고들어 자신의 정당성을 구했던 셈입니다. 유럽의 파시즘과는 대결하되, 비서구에서의 제국주의는 지속하는 논리였으니까요. 그리하여 선포된 것이 1943년의 '대동아 공동 선언'입니다. 영미의 질곡에서 대동아를 해방하고 낡은 세계 질서를 타파하여 아시아의 부흥을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다케우치는 여기에서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혹은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래 줄곧 '탈아'로 달려온 일본이 마침내 회심하여 아시아의 일원으로 되돌아가는 비상구가 열린 것이니까요. 나아가 일본의 근대, 그리고 그 일본이 모방했던 서구의 근대를 초극할 수 있는 돌파구를 예감한 것이겠죠. 혹은 그렇게 믿고자 결단했던 것입니다.

이 독특한 태도의 기저에는 근대에 대한 독자적 인식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루쉰의 사상에서 추출하여 마오쩌둥의 혁명에 투사했던 '저항의 근대'가 바로 그것이지요. 다케우치 사상의 정수와 임계도 이 '저항'이라는 개념에 있을 법합니다. 그는 중국의 근대는 서구 및 서구 추수의 일본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제3의 근대라고도 할 법한 고유함을 가진다는 것이지요.

전향형과 회심형, 우등생형과 열등생형, 외발형과 내발형 등 그 분류법은 다기하지만, 저항을 통하여 근저에서부터 변혁을 성취해가는 자각적인 근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소련의 권위에 굴종하는 일본 공산당 역시 그 노예적 근성에서는 자유롭지 않다고 여길 만큼 그의 비판은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맞은 편, 루쉰과 마오쩌둥의 중국에서 구현되는 자각적인 주체 형성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신중국의 행보는 대동아를 계승한 듯도 보입니다. 미국과 충돌하고 소련과 분쟁하면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제3세계 해방의 전위로 자임했으니까요. 미-소가 주도하는 구세계를 갱신한다는 사명감은 마오쩌둥의 영구 혁명을 촉발하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그 정점이 문화 대혁명이었고, 문화 대혁명은 대동아 전쟁에 버금가는 재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파국의 끝에서 미국과의 극적인 재회를 통해 탈혁명의 궤도를 질주하는 점도 전후 일본의 행보와 겹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노년의 다케우치가 문혁과 그 이후의 사태에 침묵을 고수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저항의 근대는 중국에서조차도 방기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생을 마감(1977년)합니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던 해(1910년) 태어나 중국의 개혁 개방 직전에 눈을 감았으니, 그의 삶은 '단기 20세기'와 오롯하게 겹치는 셈입니다.

그의 사후, 세계는 극적으로 변모합니다.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 체제 편입을 공식화한 이후, 그 변화의 폭과 깊이는 진주만 공습보다 한결 도드라져 보입니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라거나, 친디아(Chindia)의 시대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리는 정도가 된 것이지요. 아시아가 저항을 마감한 그 자리에서 아시아가 주도하는 새 역사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혹 그의 근대 인식에 결정적 착오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다케우치 요시미 이후

돌아보면 그의 근대론은 20세기적 발상입니다. 그의 인식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는 20세기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갔다는 방증이기도 한 탓입니다. 어떠한 인물도 그 역사적 구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니 그 숙명을 깊이 껴안고 가는 사상이야말로 진정 값어치를 지닙니다.

기실 다케우치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리영희, 타이완의 천잉쩐(陳映眞) 등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이들은 공히 루쉰과 마오쩌둥, 즉 중국의 근대에서 대안을 찾고자 했던 바 있습니다. 이 공통성이야말로 20세기의 한 단면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케우치의 근대 인식에서 가장 문제적인 지점은 유럽의 근대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는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하기에 그만큼 아시아의 저항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구도인 것이지요. 실제로 '저항의 근대'나 '회심의 근대'라는 사상은 역사적 실제라기보다는 직관 내지 신념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나름의 역사상을 제시하기는 했습니다. 근대 중국의 결정적 시기로 5·4 운동을 거론한 것이지요. 이는 아편 전쟁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았던 당시의 마르크스주의자와 척을 지는 지점입니다. 그는 경제사적 근대가 아니라 중국이 근대를 포섭한 시기, 즉 근대가 중국에서 자각적으로 의식된 시기를 중시했던 것입니다.

중국에 근대를 강제한 것은 유럽이지만, 그 강제를 되받아치는 것으로 중국은 근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또한 충격-반응 이론의 사상적 업그레이드에 불과합니다. 수동적 반응이 아닌 자각적 반응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서구 근대가 중국의 변화를 촉발하는 기폭제였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도 비슷한 한계를 가집니다. 그가 말한 서구의 우수한 문화란 대저 자유와 평등, 민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 또한 실제로는 계급과 성별의 편차를 안고 있었죠. 나아가 서양의 시민 사회 내부의 특권으로만 그쳤습니다. 비서구에서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으니까요.

그 일그러진 원리를 동양의 대서양 투쟁을 통하여 동양에서도 실현하고, 그 문화적 되감기를 통하여 서양 자신을 이쪽으로부터 변혁해 간다는 것이 바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내부, 즉 아시아의 내부에는 독자적인 무엇이 실체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체 형성의 계기로서만 아시아를 사고했던 것이지요.

아시아의 역사적 실체에 주목하지 않은 탓에 대안적 가치 또한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서양의 원리를 아시아가 감싸 안아서 보편화하는 부정의 변증법 안에 머물고 있던 것입니다. 허나 다시금 강조컨대 이것은 그의 한계라기보다는 20세기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동과 서가 반전하는 21세기를 목도하며 근대사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안목을 획득하기란 난망했던 것이지요.

2011년. 다케우치를 다시 읽노라면, 그 사상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동양의 근대가 서양에 대한 패배로부터 비롯한다는 전제부터가 기각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서양의 근대는 자기인식으로 출현하지만, 동양의 근대는 저항을 통해서만, 특히나 서양에 패배했음을 망각하지 않는 이중의 저항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발상 또한 흔쾌히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유럽의 지방화, 근대의 상대화가 역력해진 것이지요. 1990년대 이래 지구적 수준에서의 교류와 소통을 매개로 다시 쓰여 지고 있는 세계사의 성과가 적잖이 축적되어 있는 탓입니다. 과연 '과거'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 새로운 과거상으로부터 우리는 근대 이해의 새로운 단서도 포착하게 되었고요.

공교롭게도 그 세계사 다시 쓰기의 주역들이 캘리포니아에 포진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의 로이 빈 웡, 캘리포니아 대학 어바인 캠퍼스의 케네스 포머란츠와 왕펑 등이 대표 격이죠. 경제사에 기반을 두고 유럽 중심적 역사 해석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동아시아와 중국을 마주세운 일군의 지식인들입니다. 얼핏 중국사 연구자가 많은 듯싶지만, 면면을 자세히 뜯어보면 학문적 차원에서의 'AALA 연대' 면모도 없지 않습니다. 미국 역사학계의 비주류였던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연구자들이 협동하여 세계사를 다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상에 의거하건데 유럽의 근대에 대한 반응의 차이로 중국과 일본의 근대를 유형화하는 방식은 재론의 여지가 큽니다. 그러한 사유의 틀에서 비서구가 가능한 것은 기껏해야 '창조적 수용'에 불과한 것이지요. 다케우치가 부여잡은 '저항' 또한 창조적 수용의 일환일 것입니다. 허나 근대의 유형화를 통한 '복수의 근대성(Multiple Modernities)' 논의는 국가와 문화의 수만큼 근대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봉착하고 맙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라는 지구적 수준의 단일한 근대성이 엄연한 현실로부터 유리되고 마는 것이지요.

캘리포니아학파의 성취가 만만치 않은 것은 그 근대성의 기원 또한 유럽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간 그토록 강조되었던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은 실로 부차적인 것이지요. 부각되는 것은 16세기 이래로 형성되었던 전 지구적 차원의 은 경제 네트워크입니다. 아메리카에서 채굴된 은이 유럽의 가격 혁명을 일으키고 중국의 재정을 은 본위로 재편합니다. 그리하여 유럽과 중국을 잇던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교역이 촉진됩니다. 동아시아-남아시아-아라비아-유럽-아메리카를 잇는 광범위한 교류망이 이미 작동하고 있던 것이지요.

유럽의 부상은 그 교역 망을 폭력적으로 전유하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정치적 문화적 지배를 수반하지 않았던 기존의 교류 망을 해체하여 제국에 수직적으로 종속되는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케우치가 말하는 근대는 근대사의 두 번째 국면에만 해당될 뿐입니다. 애당초 근대의 여명은 다양한 대륙과 문명권이 함께 어울려 형성해간 인류의 집합적 산물이었던 까닭입니다.

유럽의 과도한 특권화가 야기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다케우치의 역사상 안에서는 동아시아 상호 간의 영향이 전혀 드러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근대에 차이는 있으되, 그 차이란 유럽의 근대에 대한 상이한 반응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탓이죠. 허나 메이지 유신에는 이미 아편 전쟁의 충격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메이지 유신의 성취는 신해 혁명을 자극하기도 했지요.

3·1 운동은 5·4 운동에, 5·4와 3·1은 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심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즉 일본과 중국의 근대에는 상호 간의 영향은 물론이요 조선과 타이완, 류큐를 망라한 지역적 연쇄의 흔적이 뚜렷한 것입니다. 때로는 지역적 차원의 상호 학습으로, 때로는 적대와 대결의 형태로 서로가 서로의 근대 형성을 추동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서구를 모방하느냐 저항하느냐는 도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지역적 수준에서의 중층적 맥락이 겹겹이 포개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항의 중국'이라는 이념형이 강조되면서 그 저항의 물결 속에도 여전했던 중화주의의 지구력을 간취하지 못한 점 역시 결정적 약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일본의 아시아주의 못지않게 중국판 아시아주의라 할 수 있는 국제 통일 전선과 비동맹 운동, 제3세계론 또한 주변의 시각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지요.

중국이라는 난제

의미심장한 것은 캘리포니아 학파가 재구축하고 있는 역사상에, 왕후이를 필두로 한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들도 적극 호응하고 있는 모양새에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학파들의 논거를 재차 중국으로 품어 와서 '중화 좌파(Sino-Centric Left)'라고 함직한 사유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왕년의 서구 좌파 지식인들도 속속 합류하고 있음에 우리의 곤혹스러움은 한층 더해집니다. 한때 마오쩌둥 노선을 옹호했던 마크 셸던은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에서 대안적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영국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잡지의 편집장 출신인 마틴 자크도 이에 동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종속 이론의 주창자 가운데 하나인 지오반니 아리기는 중국 모델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사회 구성체를 발견했다고도 합니다.

자본주의와 국가 간 체제의 근대적 유산과 동아시아의 역사적 유산이 결합한 새로운 문명이 중국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중국의 신좌파와 서구의 일부 좌파들은 냉전으로 무너진 사회주의를 대신하여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으로 중국과 동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 이해와 대안 찾기라는 신조류 속에서 우리는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중국을 대면해야 함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대성마저 상대화하며 부상하고 있는 저 거대한 이웃을 비판적 사유의 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요. 2050년의 세계를 상상해 볼 때, 21세기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리영희가, 천잉쩐이 살았던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신세기'이자 '신세계'가 될 것입니다.

저 오래된 대국이야말로 역설적으로 21세기의 '신대륙'이라고나 할까요. 그리하여 중국은 동아시아를 묻는 우리들의 대화가 거듭하여 토론하고 감당해야 할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올해는 신해 혁명 100주년이기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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