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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美 사령관 하지와 맞서다!

[해방일기] 1946년 11월 9일

1946년 11월 9일

11월 7일에 군정청 공보부에서 진짜로 특별한 '특별 발표'가 있었다. 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와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사이에 오간 편지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양 측의 입장이 접근되어 미소공위 재개가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담은 발표였다. <자유신문> 11월 8일자는 이 발표를 보도하면서 이런 기사를 앞에 붙였다.

"미-소 간 타협, '공위' 속개의 서한 교환"

금년 3월 20일에 열렸다가 46일 만인 동 5월 6일에 무기 휴회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서울 회담은 이내 재개될 가망이 보이지 않아 막부 3상 회담 결정에 의한 임시 조선 정부 수립도 그 시기가 막연하게 되어 있는 이때 작7일 미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중단된 이 공동위원회를 재개하도록 소 측 수석 치스챠코프 중장에게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었다고 다음과 같은 특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공위 무기 휴회의 원인이 공위가 초청할 정당 단체의 자격 문제에 있어서 소 측은 '신탁'을 반대하는 정당 단체는 이를 상대로 할 수 없다는 것에 반해서 미 측에서는 '의사 자유 발표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에서 결렬이 생겼었는데 그간 소 측에서 하지 중장에게 온 서한에 의하면 "조선인으로서 공동위원회에 의견을 제출할 의사 자유 발표권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보아 미소 양측 간에는 공위 재개의 타협점을 발견한 듯하며 더욱이 이러한 서한에 소 측 위원이 공위로 돌아오고자 한다는 것으로 보아 속개는 사실화될 것이 틀림없으며 이것이 속개되어 임시 조선 정부가 수립되고 그 다음에 신탁 여하를 논의하는 순서가 될 것임에 이번 하지 중장의 성명은 혼란암흑의 조선 정계에 한 낭보로 들려지고 있다.

더욱이 신탁 문제에 대한 동 중장의 견해는 과반 하지 중장이 본사장 신익희 씨와 회담할 때의 요지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다시 한 번 새로워지는 감이 있다.

공보부 발표에 따르면 하지가 8월 12일에 치스챠코프에게 편지를 보내고 10월 26일에 답장을 받았으며, 11월 1일에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초청장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경위의 해명보다도 사람들에게 공위 속개의 희망을 키워준 것은 하지가 무조건 반탁을 비판하는 뜻이 이 발표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의 이런 발언이 인용되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신탁의 구체적 조건을 알겠느냐? 누구라면 그것을 알겠느냐? 공동위원이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한 후에 4국에 추천할 안이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하는 조선인으로 어떻게 단순히 신탁이라는 문자만 가지고 정치적으로 흥분이 될 수 있는가? 신탁의 의미를 확정하기 전에 조선 임시 정부가 먼저 선다. 그리고 공동위원과 이 조선 임시 정부와 민주주의적 사회 단체가 충분히 토의하고 계획하고 숙고하여야 된다. 이 안을 4개 연합국이 찬동을 하도록 되었다. 그렇게 연합국과 조선 사람들이 합쳐서 고안한 후에 신탁안을 조선인이 공포(恐怖)할 필요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이 시점에서 하지는 진심으로 미소공위의 재개를 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소공위 운영은 뭐라 해도 주둔군 사령관의 책임이었다. 지난 3월부터 5월까지의 회담에서는 미국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이북에는 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토지 개혁 등 개혁 조치를 착착 취하고 있었는데 이남에는 겨우 민주 의원을 만들어 놓았지만 정치적 권위와 역할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반탁 세력을 협의 대상에 넣느냐 하는 문제에서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일시적 결렬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소공위의 무기 휴회 직후 하지가 좌우 합작을 지원하며 입법 의원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정치적 기반의 열세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입법 의원이 구성되는 이제 해가 가기 전에 미소공위 재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치스챠코프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밝히면서 반탁 문제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강하게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반탁 세력 중에서는 3상 회의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까지 노골적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3상 회의를 부정하면 그에 근거를 둔 미소공위도 부정하는 것이다. 발단은 10월 하순 영국 외상 어니스트 베빈의 의회 발언 한 대목이 전해진 데 있었다.

[런던 24일발 공립] 베빈 영국외상은 하원에서 영국의 외교 문제 중 특히 조선·일본·호주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평양 전쟁 중 호주는 일본에 침략당할 위험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따라서 호주가 금후의 일본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태평양 방면의 평화 수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영토 가운데에서 千島列島를 포함하는 일련의 열도를 소련에 양도할 건과 조선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이 공동 점령할 것 등에 관한 소련과의 양해는 얄타 회의에서 결정을 본 것이다. 먼저번의 모스크바 회의에서는 4대국에 의한 조선 신탁 통치 기관의 설치를 결정한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현재까지에 있어서 이의 진척이 뜻과 같지 않은 모양이며 조선의 정세는 구라파의 일부에서 보이는 그 정세와 매우 흡사하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26일자)

노동당 중진 베빈은 전시 연립 내각에서 노동상을 맡고 있다가 1945년 7월 애틀리 내각이 들어설 때 외상을 맡았다. 노동당원 중에도 투박한 이미지로 외교 같은 세련된 분야에 어울리지 않는다 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실제 대외 정책에서는 노동당답지 않게 우편향을 보여서 "이든 장관이 살이 찐 것 같아"(앤서니 이든은 보수당 소속의 전임 외상) 하는 농담도 돌았다고 한다.

이 발언이 전해진 바로 이튿날 한국민주당은 아래와 같은 결의문을 미-영-중-소 4국 외상에게 타전했다고 한다.

"38선의 경계를 설정하는 원인이 된 얄타 협정과 한국에 대하여 신탁 통치를 규정한 막부 결정 조항은 포츠담 선언으로 재확인된 카이로 선언에 위반되는 것이니 마땅히 파기되어야 할 것이다. 한민족은 이 두 조항의 수락을 항상 거절하여 왔고 본당은 이제 정식으로 귀국 정부가 이 두 조항을 공연히 파기하는 동시에 한국의 완전한 자주 통일 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즉시 취하기를 요망한다. 동시에 귀국 정부가 솔선하여 한국과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재개하여 극동 평화수립에 공여하기를 요망한다." (<조선일보> 1946년 11월 2일자)

이승만도 28일 담화를 발표했다.

"대내 대외에 우리의 가장 어렵던 문제가 지금은 순조로이 해결될 시기가 왔나니 소위 신탁 통치라는 모욕되던 장애물도 우리만 잘하면 삭제될 기회가 목전에 당도하였다. 아놀드 소장이 화부(華府)에서 며칠 전 선언하기를 한국 문제를 미·소 양국의 사령장관들로는 해결될 수 없나니 양국 정부에서 직접 토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나니 우리의 대외 대세가 이만치 변경된 것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에 위반되는 얄타 밀약과 3상 결의를 취소하라고 우리는 영·미 양국 정부를 향하여 다시 청구하는 중이다.

우리는 자초(自初)로 신탁 통치를 절대 반대하여 왔고 그동안 세계 공론이 따라 변하여 우리를 찬동하는 친우들이 많이 생기는 중이니 우리 전 민족이 이를 주장하고 요구하면 이 큰 지장을 배제할 전도가 열릴 줄 믿는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29일자)

민주 의원에서는 10월 29일 회의를 열어 결의문을 개회 중인 유엔총회에 보내기로 했다.

"연합국의 일원 조선을 독립시키라"

31일 민주의원에서는 주미 동원(同院) 대표 임병직 씨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타전하여 미 국무성과 UN에 제출하도록 지시하였다 한다.

"조선은 연합국 중 어느 나라와도 원수국이 아니다. 조선이 연합국의 원수인 일본과 싸워왔으므로 연합국의 일원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연합국의 원수 일본보다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조선에 대한 불공평이요 미국과 연합국이 2차나 전쟁한 목적 즉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본의에 어그러진다.

일본은 허락하여 자기 정부가 있으나 조선은 아직 자신의 정부가 없다. (…)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독립 정부를 속히 수립하도록 할 것이며 이리하여 인민의 평화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재조선 미 군정장관은 조선인이 자치 능력이 있다고 재삼 성명하였다. 우리가 재차 요구하는 것은 기왕의 정책을 고치기 위하여 얄타 비밀 협정과 막부 3상 결정의 신탁 통치 조항이 카이로 선언에 위반되니 이것을 삭제하여 독립 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의 일원이 되게 하기 바란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1일자)

<동아일보>는 11월 6일자에 "UN과 조선 문제"란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의 요망"이 이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1)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확보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을 즉시 실행시킬 것.
(2) 미소 임시 정부 군대 전부가 조선으로부터 철퇴할 것.
(3) 조선의 임시 정부 조직을 국제연합에서 즉시 후원해 줄 것.

(1)에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을 내세우며 얄타 회담과 모스크바 3상 회의를 배제한 점, (3)에서 유엔의 즉시 개입을 주장한 점이 두드러진다. 미국이 유엔 총회에 압도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미소공위 아닌 유엔을 통한 정부 수립의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측근 임병직과 임영신이 국무성과 유엔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군정청 공보부는 포츠담 회담의 조선 분할 밀약설을 부인하는 미 국무성의 주장을 11월 2일 발표했다.

워싱턴 14일발 UP통신은 포츠담 회담 시에 조선 분할에 관한 비밀 협정이 있었다는 미국 대중국정책협회의 주장을 전하여 주목을 야기하였거니와 군정청공보부에서 2일에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그 진상에 관하여 조선 국내 모 단체로부터 미국 국무장관에게 질문한 바 있었던 바 동 장관은 조선주둔 제24미군사령부 국무성 고문에게 포츠담회담 협정 중 조선에 관한 유일한 규정은 다만 카이로 선언의 조항을 실행할 것이라는 것이 공개되었다고 언명하라고 지시하였다 한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3일자)

하지는 미소공위 운영의 책임을 다하려는 확실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 하지의 큰 도움을 받아온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미소공위에 대해 하지와 맞서는 주장을 하고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이승만과 하지 사이의 대립이 이제부터의 상황 전개에서 큰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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