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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자 김규식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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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자 김규식의 등장

[해방일기] 1946년 11월 7일

1946년 11월 7일

수도경찰청은 11월 6일에 두 개의 조치를 내놓았다.

수도경찰청에서는 경찰관의 강기 일신과 직권 남용을 적발하고자 6일부터 수도청 내에 불심 검문 제도를 창설하였다. 즉, 이것은 10반으로 편성되어 경찰서 내에서나 서외에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경찰관 전부에 대하여 검문을 하는 것으로서 성적이 나쁜 경찰관은 소속 서장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되는데 당국의 이번 조치의 효과 여하가 주목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7일자)

합법적 단체 조직임을 기화로 하여 경찰을 돕는다는 미명 하에 시내 일부 모모 청년 단체원들은 상점 혹은 음식점 등에서 부당한 금품을 강요하는 한편 심지어 거리에서 검문·취체·폭행을 하는 일이 있어 비난이 자자하다. 이에 수도경찰청에서는 모 단체 간부 사택을 수색하는 한편 사설 단체의 지나친 행동에 대하여서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경찰 행세를 하는 경우에는 철저히 숙청하도록 하여 다음과 같은 공시를 6일 발표하였다.

一. 단체나 개인으로 금전을 강요하거나 공갈적으로 면회를 강청하는 자는 즉시 소관 경찰서에 구두로나 서면으로 보고할 사.
一. 경관의 신분으로 사설 단체 인원을 대동하고 체포나 혹은 검문에 종사한 자는 보고할 사. (<동아일보> 1946년 11월 7일자)

또 서울역과 서울운수경찰이 5일부터 합동으로 서울역 정화 운동에 나선 것을 보도한 10월 6일자 <서울신문> 기사도 있는데, 그중 이런 대목이 있다.

서울역의 불결함은 수도 현관으로서 시민의 수치임에 역 당사자와 운수 경찰에서는 청소에 노력 중인데 그 중요한 원인은 야간 통행 금지로 금지 시간에 하차하는 여객이 전부 역 대합실에서 자게 되는 때문임에 서울역장은 6일 수도 경찰청장에게 이들 여객을 통행 금지시간이라도 각기 숙사로 돌아갈 수 있게 하여 수도 현관의 청결화 운동에 협력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조치가 있기 전에는 열차 연착으로 통금 시간에 도착한 승객들이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장택상의 수도경찰청이 모처럼 개혁에 나선 것 같다. 11월 10일부터는 '경찰 친절 주간'을 시행했다고 한다. 웬 일일까.

"고운 말씨에 미소 띄운 봉사-친절을 수업(修業)하는 일선 경관"

"경민의 융화는 친절로"라는 구호 아래 10일부터 시작된 경찰 친절 주간은 120만 수도 서울 시민들의 시각을 집중시켜 그의 성과는 매우 주목되고 있다. 제2일인 11일 거리에서 경찰관들의 태도를 엿보기로 하자.

뚝뚝하고 곱지 못한 말씨는 고분고분하고 친절한 말씨로 바뀐 것만은 사실이다. 왼팔에 붙인 "봉사와 친절" 완장은 보는 시민에게 명랑한 감을 주고 있다.

시내 각서 현관은 물론 청 내 곳곳에는 표어가 붙어 있고 수부에서 접대하는 순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교환된다. 이것이 우리 경찰의 참된 표정이라 하겠다. 경관이 친절하면 민중도 친절하자. 이것이 경민 일체의 민주경찰 육성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12일자)

조미공동위원회(조미공위) 때문임에 틀림없다.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가 소요 사태 조사를 위해 하지 사령관에게 요청해 만든 것이 조미공위였다. 합작위 측은 소요 사태의 원인으로 (1) 경찰 문제, (2) 군정청 내의 친일파 문제, (3) 통역관 문제, (4) 관리의 부패 문제, 그리고 (5) 선동자 문제의 다섯 가지 문제에 치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심각한 원인인 경찰 문제를 제일 앞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11월 1일에는 군정청 공보부를 통해 이런 발표가 나왔다.

"친일자가 중요 지위에-한미공동위원회서 지적코 숙청 요망"

10월 29일 한미 공동 회담은 경찰 인사 행정에 대한 불만을 지적하여 토론이 있었다. 이 회담은 이 문제가 긴급하고 중대한 만큼 이 문제에 관한 일반적 정세를 자유롭고 공평하게 토의하였다. 결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하여 장시간의 토론이 있을 것이다.

이 조사의 목적은 전혀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여 제의를 작성함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작성하는 제의가 모든 관계자에게 공평하게 처리하려면 본 회담에 제출하는 자료는 반드시 사실이 되어야 하겠고 동시에 편벽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계속적으로 토의 중이며 앞으로도 이에 대한 성명이 있을 것이다.

10월 30일 회담에서는 친일파와 일본인과의 협력자들이 중요한 지위를 점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토론이 있었다. 모든 조선 내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요소를 없이 하는 것은 벌써 모스크바 결정에도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미국 최고당국에서도 성명하였던 것이다.

(…) 40여 년간 노예적 입장에 속박되었던 국가에 일제 잔재의 일부분이 계속하여 존재되는 것은 면치 못할 사실이다. 조선 민중은 정당하고 공평한 구별을 하여 조선인 중에도 부득이 일인과 협력한 사람들 중에 관용을 받을 만한 사람들과 또는 보다 적극적으로 협조한 사람, 즉 용서를 받지 못할 사람들을 구별하여야 한다.

(…) 이 문제에 대하여 조선 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제반 다른 문제와 같이 이 회담은 민중의 여론을 탐지하려는 목적으로만이 아니라 관계당국에서 이 문제의 해결이 있도록 진언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11월 2일자)

조병옥과 장택상의 경찰 측은 위 5개 문제 중 끝의 선동자 문제를 절대시해 왔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만 없으면 치안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처럼 주장해 왔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그 주장을 승인해 온 것은 그 말을 곧이들을 만큼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은 아놀드는 얼마 전 조선을 떠났다) 좌익을 탄압하고 싶은 자기네 뜻에 맞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0월 2일 이후의 사태는 그렇게 얼렁뚱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미공위의 미군정 측도 합작위 측 주장에 따라 경찰 문제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미국인 경무부장 매그린 대령이 먼저 조사에 응했다. (원래 군정청 고위직에는 미군 장교들이 임명되었다가 후에 조선인이 임명되어 한 직책을 조선인과 미국인이 함께 맡고 있던 것을 이 무렵 미국인들을 '고문'으로 빼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무렵 기사 중 매그린을 '경무부장'으로 표시한 것도 있고 '경무부 고문'으로 표시한 것도 있다.) 매그린은 경찰의 당시 문제에 관한 허심탄회한 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1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현직에 있는 일제 관리-입의 개원 앞두고 군정서 조사" 기사를 봐도 미군정은 조미공위에서 제출된 합작 위원들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꽤 기울이고 있었다.

입법 의원의 개원을 앞두고 군정청 각 부처에서는 의원들의 질문 답변 재료와 아울러 금후 행정의 기본 재료가 될 각종 자료의 조사에 분망 중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제 시대의 악질적 관리와 공직자들이 그대로 군정의 중요한 자리에 나와 일하는 것에 대한 조사이다. 문제는 현재 좌우합작위원회에서도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거니와 이번 특히 군정청 자체가 조사하는 의의야 말로 매우 큰 것이다. 우선 조사의 대상은 4급 이상(즉 각 서장 국장급 이상)으로 있는 230명의 이력을 조사하고 앞으로 그 범위를 확대 조사하는 한편 기왕의 고관과 도-부회 의원 등 공직자 명부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들을 전부 관직에서 즉시 파면시키지는 않더라도 이 조사의 결과는 군정의 금후 인사 행정에 어느 정도 반영될 것으로 보이고 있다.

조미공위에 출석한 합작위원들은 주로 우익 측 대표들이었지만(김규식, 원세훈, 안재홍, 김붕준, 최동오), 일제 시대 경찰과 관리들의 부활을 용납할 수 없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경찰 혁파 요구는 중도파가 설 땅을 가질 필요조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운형은 조미공위에 출석하지 않으면서도 (이임수를 대리로 출석시키기도 했다) 조미공위 발표에 자기 이름이 오르는 것을 용인했다. 10월 6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문답이 오갔다.

(문) 좌우합작위원회와 조선공동위원회 등에 귀하의 명의로 수차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귀하의 본의는 여하?
(답)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 대표로는 나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성명 발표에 우측 수석대표 김 박사와 나의 공동 명의로 발표되는 것이다. 조선공동위원회는 군정 당국과 좌우합작위원회와의 협의체로서 구성된 만큼 합작위원회를 대표하여 나의 명의가 나온다고 본다.

(문) 입법 기관 법령 실시와 의원 선거에 대한 소감 여하?
(답) 입법 기관에 대해서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원조를 요청하여 왔다. 좌우 합작은 막부 3상 결정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는 미소공위를 속개시켜 외부적으로 우리의 과도 정부 수립을 촉진시키고 내부적으로 남북의 통일을 기하는 정치협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좌우 합작과 입법 기관은 전연 별개의 것이다. 입법 기관 설치의 실행 조건으로서 정치범의 석방, 현 경찰 행정 기구의 전면적 개혁, 친일파의 숙청 등을 좌우합작위원회에서 군정 당국에 제시한 바 있었고 또한 동의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 조건이 관철되어야만 군정 당국의 요청에 응할 수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비민주적인 지방대의원 선거에 대하여 일부분 개선 등으로 도저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만큼 전적으로 반대하는 바이다.

(문) 좌우 합작과 귀하의 견해 여하?
(답) 좌우합작위원회는 성립되었으나 좌우 합작은 미완성이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 대표 5인은 역시 종전과 같고 출석치 못한 좌측 대표 4인의 명의는 합작위원회에 보류되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좌우 합작의 선결 조건은 정치범의 석방, 경찰 행정 기구의 전면적 개혁, 친일파의 숙청인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11월 7일자


좌우 합작과 입법 의원이 "전혀 별개의 것"임을 강조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입법 의원 추진은 미군정의 일이므로 정치범 석방 등 몇 가지 기본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합작위가 협조할 수 있지만, 조건이 전혀 충족되지 않은 채 시행된 잘못된 선거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7원칙은 좌우 합작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며, 좌우 합작의 진행을 위해서도 같은 기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인 11월 7일에는 김규식의 기자 회견에서 이런 문답이 오갔다.

(문) 조선 사람이 막부 3상 결정을 무시하고 국제적으로 호소하여 조선 독립이 가능한가?
(답) 여기 대하여서는 우리의 합작 7원칙 제1항에 나의 견해가 이미 표명되었으므로 더 말할 것 없고 또 일부에서 이것을 무시하거나 지지하거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7원칙 제1항을 무시하고 나가는 데 대하여서는 본 합위로서는 책임을 지지 못할 것이다.

(문) 입법 의원 피선자 중에 친일파가 다수 되었다고 지적되었는데 그 증거와 친일파의 한계 여하?
(답) 각 소속 구역 감시원 보고에 의하여 지적된 것이며 친일파에 대한 견해도 역시 본 합위에서 입법 기구에 관한 하지 중장에게 제언한 7항 수정안과 118호 법령 7항에 규정된 것을 우선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문) 좌우합작의 적극 추진에 대한 박사의 견해 여하?
(답) 국내외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오직 좌우 합작으로 민족 통일을 하는 것 이외에 우리 국가의 재건이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것이며 양심적인 지도자의 열의와 전 민중의 자발적 자각으로 합작을 적극 추진코자 한다.

(문) 한미공동위원회 회담의 진전 상황과 성과는 어느 정도로 되었는가?
(답) 한미공동회담에서 공보부를 통하여 제1회 제2회 발표한 것 중에 대개가 발표되었으며 그 성과에 대해서는 남조선 소요 사건의 근본 대책을 구명하여 건의할 것이요 그 실시에 있어서는 미군정의 성의 있는 태도에 비추어 매우 크리라고 본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8일자)

마지막 답변에 보이는 것처럼 김규식은 조미공위 활동의 효과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효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과의 절충을 통해 조선인의 의지를 점진적으로 관철시키겠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이었다. 입법 의원이 맡을 역할도 그런 절충적인 것으로 구상하고, 조미공위는 그 역할의 선례가 될 것이었다. 그의 현실주의적 자세는 11월 4일 입법 의원 선거의 하자를 지적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났다. 선거 전부를 무효로 할지 부분적으로 무효로 할지를 하지의 선택에 맡긴 것이다.

"입법 의원 민선은 비공정-합위 김 주석 하 중장에게 재선 요망"

합작위원회 주석 김규식 박사는 하지 중장에게 입법 의원 민선 대의원 가운데 조선 민족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친일파가 개재해 있다는 것과 또한 선거에 있어서 공정을 결한 편파적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선거 감시원의 보고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동시에 이것의 전면적 선거나 혹은 부분적인 재선을 요망한다는 장문의 서한을 제출하였다고 하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대의원 가운데 모(某)는 오랜 전쟁 기간을 통하여 미영 격멸 징병과 징용, 학병 등을 조선인에게 선전 강요함으로써 일제의 주권 XX에 적극 노력하였고, (…) 그리고 시내 명륜동의 일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 책임자가 동민의 인장을 모아 가지고 임의 날인코 동 대표자를 선출한 것 같은 것은 공정한 선거가 아니다.

한편, 지방은 전체를 통하여 애국 혁명 지사가 선거에서 빠지고 있는 동시에 좌익 진영에 대한 탄압 때문에 좌익 전체가 여기에서 배제되었다. (…) 이러한 견지에서 민선 의원 45인의 전면적 재선거나 만일 이것이 곤란한 경우에는 지방적으로 부분적이나마 재선이 있기를 요망한다. (<자유신문> 1046년 11월 6일자)

하지는 11월 12일 답장에서 부분적 재선거의 뜻을 밝혔고(<조선일보> 1946년 11월 15일자) 그 뜻에 따라 서울과 강원도에서 재선거가 시행되었다. 당시 선거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지 못했는데, 우연히 눈에 띈 짤막한 기사 하나에 일반적 양상이 비쳐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7할이 기권-전남 대의원선거"

[광주 31일 발 합동] 입법 의원 선거 전남 당선자는 다음과 같으며 투표 성적은 약 3할인데 그중에도 무효가 약 1할이라 한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2일자)

이 선거가 만족스럽다고 여긴 자들도 있었다. 물론 한국민주당이다. 한민당 선전부의 11월 1일 담화는 이런 내용이었다.

금차 거행된 입법 의원 의원 선거는 아직 전체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민의를 반영했다 할 수 있다. 민의를 대표하고 국정을 담당할 만한 인재를 선출하는 것이 사명이라면 조선 민족은 확실히 금반 선거에 있어서 그 자치능력을 확인하였다. 이 공정히 행해진 선거에 대하여 자파 세력이 진출치 못하여 타파 인물을 운운하는 것은 민의를 무시한 파시즘이요 독재주의다. (<자유신문> 1946년 11월 2일자)

재미있는 논평을 쏟아내는 세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가 보다. 11월 7일 김규식의 기자 회견을 반박하는 장문의 성명을 한민당에서 8일 발표했는데 <동아일보>에 9일, 10일, 13일 3회에 걸쳐 게재되었다. 그중에도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민선의 결과를 파기하고 외국인의 독재를 초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거의 결과 유능한 애국자가 못 나왔다 한다. 유능한 애국자는 누가 판단하는가? 피선된 자가 극도로 편향적이라 한다. 다수당의 승리는 언제든지 편향적이 아닌가? 친일파라고 지목되는 자가 다수 있다 한다. 반영시키지 못한 반민주적 선거라 한다. 그러나 민중 투표에 의한 선거 이외에 민의반영의 충분한 길이 무엇인가? 도대체 민중을 무시하고 독선을 자부하는 모순에서 나오는 발언인가 한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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