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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하루키'와 '바나나'만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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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하루키'와 '바나나'만 있다고?

[김용언의 '잠 도둑']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1951년생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작가를 꿈꾸었던 소년이 요코하마 국립대학에 입학한 해는 1969년이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수업을 정상적으로 들은 적은 거의 없었다. 급진파 학생 운동에 전념했던 그는 급기야 '흉기 준비 집회 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도쿄 구치소에서 반년 정도 수감되었을 때 그는 일종의 실어증에 걸렸다. 자전적인 소설 <존 레논 대 화성인>(김옥희 옮김, 북스토리 펴냄)에서 밝히다시피 "도쿄 구치소의 직경 15미터의 반원을 12등분한 15도의 부채꼴 모양의 감방 안에서, 매일같이 오자미를 쇠창살에 던져 상상 속의 페넌트 레이스를 펼치며 즐겁게 놀"았다고 능청은 떨지만, "노트 사용이 허용된 자는 그 노트를 그림이나 만화, 혹은 시나 낙서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는" 환경 속에서 그는 점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다.

매주 면회 오거나 편지를 보내는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산처럼 많았지만 거기서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만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말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막상 말을 하거나 쓰려고 하면 마치 강제된 것 같은 기분"(<사요나라, 갱들이여>에 실린 가토 노리히로의 해설 중)에 사로잡혔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출소 후 10년 동안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동차 공장, 철공소, 화학 공장, 토건 회사 등을 전전하며 육체노동자로 살았다. 그리고 1979년 드디어 '실어증 환자의 재활 운동'을 재개했다. 그는 하루 종일 "나는 이 컵이 좋아" "응" "정말, 멋진 컵이야" "그래" "너무 좋아, 이 컵." 이런 문장을 되풀이 썼다. 그리고 1980년, "내가 서른이구나"를 실감하고는 그 다음날 원고지를 사와 무작정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작품이 <존 레논 대 화성인>의 원안인 <멋진 일본의 전쟁>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데뷔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무엇을 써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것이어야 했다. 가능한 한 우스꽝스러운 것이어야 했다. 최악의 것, 경멸받을 만한 것, 엉터리 같은 것이어야 했다. (…) 그로테스크하고 난센스하고 유치해야 했다. 품위 있는 문학자들 모두로부터 조롱을 받을 만한 작품이어야 했다. 쓰고 싶은 것은 달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 작품은 가장 나 자신을 닮았다. 그런데도 이 작품 이후 이후로, 나는 다시는 이런 작품을 못 쓰고 있다."

▲ <사요나라, 갱들이여>(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이상준 옮김, 향연 펴냄). ⓒ향연

<멋진 일본의 전쟁>은 군조신인문학상 최종심에서 탈락했고, 그 직후 완성한 "<멋진 일본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 부드럽고 단순하며 시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사요나라, 갱들이여>로 문단에 데뷔했다. 작가 자신이 조금 불만스러운 듯이 설명한 '공식적인' 데뷔작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한국에 2002년 처음 소개되었고, 얼마 전 새로운 표지 장정과 번역을 마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2002년 샀던 구 버전이다.

옛날엔 부모가 붙여준 이름으로 평생 살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짓는다.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은 관청 뒤 샛강에 버려졌고, 장난꾸러기들은 강가에서 떼 지어 흘러가는 수많은 이름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오줌을 내갈긴다. 오래된 이름들은 "천하에 빌어먹을 불효자식들!"이라고 허우적거리는 저주를 퍼부으며 사라져갔다.

새로운 이름은, 물론 기분에 따라 때에 따라 바꿀 수 있다. 우리 시대의 구애법이라면 "제 이름을 지어주세요"라고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몇 번의 이름을 바꾸는 동안, 우리는 점점 신중하게 되어간다." 주인공 '나'는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쓰레기 소각장에서 흠뻑 젖은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나'는 소녀에게 '나카지마 미유키 송 북', 줄여서 SB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소녀는 '나'에게 '사요나라, 갱들이여'이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나'는 SB와, SB가 데려온 고양이 헨리 4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나'는 예전에 '초록색 새끼손가락'이라고도 불렸던 딸 '캘러웨이'를 너무너무 사랑했지만, "우리가 죽는 날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 날짜를 엽서로 통보하는" 관청으로부터 딸의 죽음을 선고받았다. '나'는 자동차 공장과 철공소에서도 잠깐 일했지만, 주로 시를 썼다.

지금은 '시의 학교'에서 시를 가르친다. 어떻게 시를 써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이들이 교실로 찾아와 '나'와 상담한다. 끝내 전국에 유명세를 떨치던 네 명의 갱이 내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행동을 끝마친 밤에 책상을 마주하고 있으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불안을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금씩 이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불안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이룩한 것과, 우리가 이마주 속에서 키우고 있는 것이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불안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도망치고 싶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라고 소리치는 우리의 마음을 향해, 불안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기관총을 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갱이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표현을 따르자면,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결단코 '문체의 사유를 신성시하는 19세기 시민 소설'이 아니다.

"왜 2000년 이상이나 19세기가 계속되고 있는지, 그리고 왜 20세기나 21세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 이것은 우주의 커다란 수수께끼다."(<존 레논 대 화성인>)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매우 심각한 이야기, 혁명에 사로잡혔던 전공투 세대와 아사마 산장의 비극으로 끝나버린 짧은 격동기, 작가 자신의 청년기와 일본의 1970년대를 무기력증과 실어증에 빠뜨렸던 어떤 한 시절을 그린다.

하지만 그 내용을 담아내는 틀은, '그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부터 싱어송 라이터 나카지마 미유키까지,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부터 애니메이션 <요술천사 꽃분이>까지, 만화가 하기오 모토부터 작가 토마스 만까지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머릿속은 정신없이 재편된다. "백지, 백지, 백지, 백지, 백지"라는 공백으로부터 몹시 힘들게 빠져나온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망령이 아니라 현재에 따라잡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문장은 더 이상 호응을 중요시하지 않고, 사유는 인과 관계를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쓴 내용에 대해 깜짝 놀란 듯 "리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취향이 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정중한 자기주장이 태연하게 평행을 이루고, 불필요한 사족과 난센스가 무질서의 패턴을 이뤄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가까스로 튀어나온 듯한 생뚱맞은 단어들이 더욱더 귀중하다는 듯 문장 사이에 아무렇게나 끼워 넣으며, 그는 <사요나라, 갱들이여>를 써내려간다. 더 이상 갱이 아닌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시인이 아닌 '그 무엇보다도 나이스한, 나이스한, 나이스한' 갱으로 살기 위하여.

결과는? 무척이나 난삽하고 (포스트모던하다는 문장만큼은 결코 쓰고 싶지 않다) 방향 없이 갈지자를 그리고, 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하고 리얼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더없이 슬프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튀어나온다. 19세기의 단정하고 심각한 사유 체계로부터 힘껏 도망쳐, 20세기 후반이라는 현재를 향해 질주하는 그런 작품, '후일담 소설'이라기엔 전혀 청승맞지도 않고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는다(나무랄 데 없는 미덕이다).

영원한 부활을 꿈꾸지만 그대로 썩어버린다 한들 크게 개의치 않으며,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려는 열의에 집중하며, 스스로의 삶조차 연재 만화를 읽는 기분으로 응시하며 그렇게 써내려간 글이다. 일본 현대 소설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만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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