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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퇴고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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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퇴고의 괴로움

[프레시안 books] <김탁환의 원고지>

<김탁환의 원고지>(황소자리 펴냄)를 샀다. 책을 산 지 하루가 지나서야 책을 펼쳐볼 수 있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첫 장을 넘기면서 내 예감이 틀리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었다. 그런데 <김탁환의 원고지>는 나의 이런 소망을 여지없이 배반하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퇴고를 시작하면 내 능력 이상의 것을 꿈꾸게 된다. (2000년 10월 3일)

이 책이 소설가의 창작 일기이니만큼 퇴고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올 줄은 알았다. 하지만 첫 문장 첫 단어부터 '퇴고'를 만나지는 말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어차피 이 책을 읽는 내내 퇴고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을 터인데 뭐 좀 더 나중에 천천히 만나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퇴고를 두려워하는 내 개인적인 마음도 그런 기대를 더욱 부추겼다.

2000년 10월 3일 이후로도 퇴고에 대한 이야기는 강물처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압록강' 3권까지 1차 퇴고를 마쳤다. (2000년 10월 16일)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퇴고 작업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2000년 10월 20일)


물론 그동안 1권부터 4권까지 퇴고를 하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40일이라는 간극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2000년 10월 마지막 날)

1권과 2권의 퇴고를 마쳤다. (2000년 11월 9일)

▲ <김탁환의 원고지>(김탁환 지음, 황소자리 펴냄). ⓒ황소자리

내친김에 이 책에 퇴고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보려다가 여기서 그만두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단어라는 것이 이미 판명이 났는데 더 이상의 숫자놀음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문득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은하수 담배에 별이 몇 개나 그려져 있는지 세어보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 겹쳐서 떠올라서 빙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숫자에 집착하는 습성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괜히 혼자 민망해 하면서.

나는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기회에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늘 자신을 글쓰기에 대해서는 아마추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글을 쓴 다음 퇴고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곤 한다. '퇴고'는 내겐 아킬레스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선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파지>라는 제목의 습작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퇴고'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던 순진한 모범생 문학 소년이었다. 며칠 만에 (내 딴에는) 나름 괜찮은 단편 소설 초고를 뚝딱 써내곤 했었는데, 늘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걸 붙잡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다가 지쳐서 좌절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퇴고를 하면 할수록 작품은 더 미궁에 빠졌고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파지가 늘어갈수록 자괴감만 커져갔다.

그러다가 궁리해냈던 소설이 <파지>였다. 원고지에 글을 쓰다가 망쳐서 구겨 던져버리면 그게 파지가 되는 것인데, 그 파지들을 모아서 소설을 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생각이 내내 변하는 것인데 그걸 정직하고 적나라하게 반영해 주는 것이 파지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그런 파지들만 모아서 잘 엮어놓더라도 그 자체로서 다양한 의식의 흐름을 반영하는 멋진 소설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덤으로 '파지'가 그 소설의 핵심적인 요소인 만큼 글을 다듬고 고쳐야하는 퇴고 작업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논리를 만들어서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초고를 쓰면서 구겨버렸던 숱한 원고지들과 퇴고를 하면서 버려졌던 파지들을 주워 모았다. 소설 내용의 전개를 위해서 일부러 파지를 만들어서 넣기도 했다. 그렇게 (내 생각에는) 퇴고가 필요 없어진 소설이 완성되었다. <파지>라는 제목으로 서로 다른 몇 편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파지> 연작을 계기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퇴고의 부담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여전히 퇴고를 회피하는 아마추어글쓰기를 하게 만든 족쇄이기도 하다.

퇴고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글은 늘 마감에 임박해서야 쓴다. 틀린 글씨가 있는지 한번 읽어보는 것으로 퇴고 아닌 퇴고를 마치고 글쓰기를 종결한다. 물론 소심한 성격이라 글을 쓰기 전에 미리부터 충분한 시간을 갖고 머릿속에서 별의 별 궁리를 다한다. 짧든 길든 글 한편이 온전히 머릿속에 정리될 때까지 마음속으로 글을 쓴다. 그런 후 마감이 임박해서 마음속의 글을 그냥 그대로 옮겨서 써내려간다. 이때는 글을 타이핑하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김탁환의 원고지>를 펼치면서 내가 독자로서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은밀한 내면세계를 관음 하듯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처절한 고백을 듣고 같이 울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처음부터 '퇴고'에 대한 그의 프로페셔널한 이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나는 김탁환의 퇴고 이야기를 훔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글에 대한 작가의 숱한 이야기가 녹아 있을 <김탁환의 원고지>에서 나는 '퇴고' 한글자만 겨우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퇴근길, 나는 15분쯤 걷는다. (2003년 3월 28일)

급기야는 '퇴근길'이 '퇴고길'로 보였다. 중증이다.

그가 고백하는 그에게 있어서의 퇴고는 이렇다. 먼저 짊어지고 가야할 원죄일 것이고 외면할 수 없는 자식새끼들일 것이다.

내 앞에 원고가 있고 나는 이것을 더 훌륭한 작품으로 고쳐야 한다. (2003년 4월 14일)

마지막, 마지막, 항상 마지막을 되뇌지만, 퇴고에 마지막이란 게 있을까? 항상 마지막을 가장한 중간 어디에서 그만 시선을 돌릴 뿐이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자식새끼처럼 이 원고를 품에 안고 있을까?
날아가라. 내 원망 닿지 않는 곳까지. (2003년 7월 7일)


그 것은 또한 늘 지뢰 해체 같은 목숨을 건 사투이기도 하고 복수의 칼을 갈게 만드는 고통이기도 했다.

퇴고한 양을 대충 보니 600매 정도다. 그럼 3분의 1 정도를 했네. 아직 3분의 2가 남았다. 이 소설은 퇴고하며 날 울게 만든 최초의 작품이다. 다 큰 놈이 눈물은(<공동경비구역>에서 신하균이 지뢰 밟은 이병헌에게 한 말인데). 나도 지뢰 밟은 기분이 든다. 내가 묻은 지뢴데……. 도움을 청할 곳도 없다.
오늘 밤에도 지뢰나 해체해야겠다. (2003년 4월 12일)


퇴고는 꼭 이렇게 몸은 아프고 기운은 빠지고, 소설만 살찌는 시간인 것 같다. 작가의 불행이 작품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작품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없을까. (2003년 4월 23일)

그래서 김탁환을 더 자극하는 것이 또 퇴고라고 그 자신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까 승부는 퇴고를 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2010년 6월 29일)

퇴고를 마쳤을 때의 김탁환의 기분은 짐작컨대 '어쩌면 결국 사랑니를 뽑고 며칠 고생을 했다'(2000년 11월 30일)거나 '사랑니를 뽑다'(2009년 11월 9일)같은 상황에서 느꼈을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퇴고를 마치다.
허전함… 그리고 편안함. (2010년 10월 8일)


김탁환은 이 책에서 자신을 이렇게 규정지어 부르고 있다.

나는 소설가다. (2004년 6월 29일)

나는 없다. 있는 건 이야기뿐. (2003년 9월 18일)


나는 비극 작가다, 아무리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그 속에는 생의 슬픔이 묻어 있다고 믿는. (2005년 1월 5일)

하지만 나는 그의 바람대로 '김탁환은 소설가다. 김탁환은 이야기다. 김탁환은 비극 작가다.'라고 부르는 대신 책에서 내가 만난 '김탁환은 퇴고다'라고 큰 소리로 선언하고 싶다.

겉으로는 한없이 온화해 보이는 김탁환의 무섭고 집요하고 혹독한 퇴고 본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발자크의 작업 방식을 살핀 후 초고를 쓴 기간만큼 퇴고하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1년을 썼으면 1년을 고치는 방식. (2002년 8월 27일)

그러다가 아마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책 대신 교정 부호가 가득 찬 교정쇄 제본을 벗들에게 선물하는 작가는 발자크뿐이리라. (2002년 8월 27일)

나는 <김탁환의 원고지>를 수요일에 샀고 목요일에 읽었고 '프레시안 books' 발행일인 금요일에 이 글을 썼다. 여전히 퇴고를 회피했고 오타만 겨우 확인하고 글을 보냈다. 갈 길이 멀고 부끄럽고 그가 마냥 부럽다. 이 책은 그동안 '퇴고'를 애써 외면하고 회피해오던 나를 '퇴고의 법정'에 발가벗겨서 세워놓은 불편하고 무서운 집행관이기도 했다. 무섭고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퇴고' 한 글자라도 붙들고 이 책을 정독할 수 있어서 기뻤다. 등대 같은 그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번 동지 모임에서 그를 만난다면 그가 다른 사람의 글 쓰는 손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듯이 나도 무수한 '퇴고'를 수행한 그의 '손'을 먼저 보고 싶다. 하지만 부끄러운 글을 쓰는 내 손은 아직은 감춰두고 싶다. 기꺼이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 때까지.

이 책도 지독한 퇴고를 거쳤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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