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일은요. 갑자기 생각나서요? 오늘은 무슨 일 하셨어요?"
"밭에서 배추하고, 마늘하고, 쑥갓하고 돌봤어야. 인자 그것들이 솔찬히 자랐어."
"춥지는 않아요? 무리하지 마시고, 몸 챙기시며 일 하세요."
"응, 그래. 고맙다."
<강씨공씨네 꿈>(돌아온산 펴냄)을 읽다 수화기를 두 번 들었다. 아버님의 선명한 영상이 책의 본문과 겹쳐져 견딜 수 없었다. 한 번은 '통일벼' 이야기를 서술한 제1장을 읽으면서였고, 두 번째는 '공 씨 아버지와 강 씨 큰형님의 삶'을 이야기하는 제4장을 읽으면서였다.
나의 아버님과 공 씨(공선옥 작가) 아버님, 강 씨(강기갑 의원) 형님의 연배는 대략 10여 년의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농촌에서 근대화를 견뎌낸 세 사람의 신산한 여정은 놀랍도록 흡사했다. 유·소년기에 한국 전쟁을 겪고, 도시로 향하는 이농의 유혹에 몸부림치다, 새마을 운동의 풍랑 속에서 농촌을 일궜다. 그리고 농촌이 황폐화되어 가는 현실을 목도했다. 개인의 고통이 시대의 공통 감각 속에서 조그만 파문을 일으키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했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 농촌 현실은 아버님의 서걱거리는 몸 자체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정치인을 내세운 책이 그렇듯이 이 책도 애초에 강기갑 의원을 삶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공중 부양' '강달프' '한복을 입는 국회의원' 등은 긍정·부정이 겹쳐지며 만들어진 그의 별명들이다. 그는 농고를 나온 농투성이였고, 한 때는 가르멜 수도원의 수사였으며, 전국 농민회 부의장을 지냈다가, 지금은 민주노동당 제18대 현역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맞상대인 공선옥은 광주 민중 항쟁을 다룬 중편 <씨앗불>로 등단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이다. 이 두 사람은 정치/문학, 영남/호남, 남성/여성, 공공/일상이라는 측면에서 대립적이다. 하지만, 공선옥은 강기갑을 '아재'라고 부르고, 강기갑은 공선옥을 '공 작가'로 호명하며 우호적이고 친근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둘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게 되는 순간, 문학 언어와 정치의 언어는 '강기갑의 삶 조명'이라는 애초의 의도를 훌쩍 뛰어넘고 만다. 이 책은 한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농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탐색한다. 이를 통해, <강씨공씨네 꿈>은 '현대사의 여러 장면들을 농민적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텍스트'로 거듭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공 : 세상 모든 아버지가 다 쇳덩어리 같아요. 우리 아버지도 그랬어요.
강 : 아무리 눈이 오고 비가 와도 일하러 나가십니다. 소를 마이 키웠으니까. 근데 자식들은 피곤하다면서 그냥 누워 있잖아요. 그래도 "야야, 와 이리 누워 있노. 일하러 가자" 이 소리 한 번 안 하셨어요. 당신이 가서 다 하셨지요. 당신이 할 수 없는 것만 남겨놓으셨지요. 자식들한테 뭐라 하는 게 없어요. 할아버지 대를 이어받으셔서.
공 : 말 없는 할아버지. 화도 안 내고.
강 : 제일 기억에 남는 게 개간해놓은 1000평, 700평 되는 논에 매년 나락을 심은 거예요. 거기서 내가 젖소를 키울 때 정부가 외국 수입소를 도입했어요.
공 : 홀스타인.
강 : 홀스타인. 전경환이 비육소도 수입을 했는데, 살로레라고 호주산인가 누런 소 있어요. 그 소를 들여와서 큰 사고를 쳤죠.
공 : 병든 소! 우리 집 그거 해서 망했잖아요. (164∼165쪽)
▲ <강씨공씨네 꿈>(강기갑·공선옥 지음, 돌아온산 펴냄). ⓒ돌아온산 |
이 사건은 1982년에 발생한 '비육우 파동'을 말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권력에 기대 '비육우'를 들여와 농가에 보급했다. 정치권력이 주도하는 일이라 농촌에는 비육우 사육 열풍이 불었고, 농협에서 융자를 받는 농가가 늘어났다. 그런데, 외국 수입소다 보니 사료 값이 비쌌을 뿐만 아니라, 점차 소 값까지 폭락하기 시작했다.
농협 융자금은 고스란히 농가 부채가 되었고, 농촌은 황폐해져 갔다. 쇳덩어리 같았던 아버지들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농촌은 빚더미에 나앉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농촌을 떠난 사람의 수도 만만치 않다. 이 어려운 상황을 경상남도 사천의 강기갑과 전라남도 곡성의 공선옥이 함께 겪은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씨공씨네 꿈>은 일종의 구술사이고, 한국 농촌 현실에 대한 민속지학(ethnography)적 재구성이다. 국회의원 강기갑은 자신의 신산한 삶에 '변화를 향한 인간 의지'를 실었고, 소설가 공선옥은 말에 정감을 불어넣었다. 거기에 작가 서해성이 양념처럼 말을 보태면서 이 책은 활력 넘치는 이야기의 향연장으로 거듭났다.
2011년 3월 2일에 시작한 대화는 8월 2일까지 이어졌다. 그 대화가 총 32개의 마디로 펼쳐졌으며, 내용도 소박하고 구수하다. 제1장은 옷, 제2장은 밥. 제3장은 집, 제4장은 삶, 제5장은 사람, 이런 식이다. 일상생활의 소중한 영역들을 거침없는 대화로 풀어나가니 읽기도 편하다. 마치 사랑방에서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자는 듯 마는 듯 졸며 엿듣는 듯한 풍요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1970년대 이후의 우리 농촌의 풍속, 애환, 놀이 문화 등을 재현하고 있어 실감이 넘쳐난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형'이다. 그렇기에 '전망'을 향해 있다기보다는,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주로 말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 농약에 의존하는 '화학 농법'이 농촌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초국적 기업이 토종 종자까지 관리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한국의 생명 주권이 얼마만큼 위태롭게 되었는가에 대해 조목조목 따진다. 연원을 밝힘으로써 현실을 명료화하는 것, 이것이 우리 농촌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나의 아버님은 두 번째 통화에서 김장철이 다가오는데 배추가 잘 여물고 있다고 했다. 곡식과 채소가 자라는 것을 보면 시간을 잊는다고도 했다. 세상의 농부들은 시간의 순환을 이겨낸 순례자들이다. 옛말에 '손인이기(損人利己)면 종시자해(終是自害)'라고 했다. 강기갑 의원이 인용한 어구이기도 하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해하는 것이 된다."
한미 FTA로 인해 우리 농민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으며, 농업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 식탁을 위협하는 비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땅에 기꺼이 섞었던 농민들이 위태롭다. 한미 FTA로 인해 우리의 건강하고 윤리적인 삶은 '자해(自害)' 당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비극의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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