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석제가 썼다'는 면에서 더욱 빨리 책의 본문으로 진입하고 싶게 만든다. 이건 단지 성석제 개인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소설가는, 나아가 문필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더욱 나아가 성공한 문인들은 대부분 한량이다. 꼭 성석제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든 한량들이 얼마나 먹을 것에 대한 교양이 풍부한지를 나는 주위의 '성공한 문인인 한량'들을 그리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어도 알고 있다.
때로 '성공한 문인'들이 '음식 에세이'라는 장르 아닌 장르의 책을 낼 때는 '그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집필을 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을 판매하는 경우일 수 있다. 취재를 위한 기행, 연구를 위한 유학, 또 베스트셀러를 팔고 인세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행할 수 있는 호화로운 여행들. 그런 문인들의 여가에 필수적인 부분은 바로 식도락이다. 여기 아니면 어디서도 먹을 수 없는 음식들, 혹은 여기 왔다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들.
성석제의 <칼과 황홀>(문학동네 펴냄)에도 그런 '성공한 문인들의 여유로운 여가'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다른 '음식 에세이'들이 지니지 못하는 날카로운 지점이 있다. 아예 제목에 '칼'이 들어가듯이.
성석제는 자신의 고향에 새로 만들어진 박물관을 방문해 '석단각천인상'을 구경한다. 그리고 그 감상을 다음과 같이 펼친다.
처음 돌에 천인상을 새겨넣은 사람이 느꼈을 감동이 (…)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내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이 맛에 힘들고 가난해도 예술을 했겠군.'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의 정신적 자양은 자신의 손에 의해 탄생한 예술 작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 <칼과 황홀>(성석제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그래서 그것은 재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가 자신의 소설과 시에 인용하기도 했다는 '약초를 먹고 자란 소(牛) 이야기'나 '바다에 말뚝을 박아 잡는 죽방렴 멸치' 등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결국 그 작가가 그 생각을 어떤 이유에서 하게 되었는가를 고민하듯 펼쳐져 있다.
나아가 그것은 재료를 '조리'하는 방법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진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육식을 거부하던 자신에게 동물성 지방을 보충시키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요리를 했는가, 독일 유학 중 마셨던 수많은 술과 그 안주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가게 됐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은 '창작의 과정'에 대한 소고와도 같은 느낌이다.
성석제가 가장 놀라운 문장력과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순간은 전기체의 글을 쓸 때다. <조동관 약전>(강 펴냄)이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비 펴냄)에서 골계와 비장을 동시에 점묘법처럼 흩뿌리던 그 문장들에 대해서 중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석제는 자신의 여행기, 유년기와 가족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학창 시절의 스승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주위 인물들과 자신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음식 이야기와 엮어낸다.
사실 한국 문화권 속에서 우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음식을 '함께' 혹은 '나누어' 먹게 되어 있다. 어떤 요리를 어떻게 먹었고 맛이 어땠는가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먹었느냐' 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 유의 흔하고 빤하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이야기로부터, 자신이 유일하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인물에 대한 존경, 어린 시절 친구나 동료 등의 과거의 인물에 대한 회상, 또는 자신이 불친절하게 대했던 인물들에 대한 사과에 이르기까지 성석제의 '사람에 대한 애정'을 또한 맛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지니는 두 번째의 매력이다.
첫 번째 매력을 이야기하지 않았군. 그것은 바로 언제나 성석제의 글은 '웃긴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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