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나는 두 가지 책 중 한 가지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TV 토론도 지켜보지 않았다. 사실 나는 공자가 죽든 살든 이 나라가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이나 공자가 살아야 한다고 믿는 진영은 지향점은 다르지만, 공자의 죽음이나 삶이 우리나라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들 책이나 논쟁은 공자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일까라는 의문을 던져주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공자가 정말로 그렇게 의미 있는 존재일까? 동양 철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내가 그런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도 분명하게 말하기가 어렵게 생각된다. 이들 책과 논쟁은 또 <논어>라는 책과 공자라는 인물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논어>, 나아가 고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철학의 영역에서도 무척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전에 이병창은 <스파르타쿠스 전쟁>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관련 기사 : "덫에 갇힌 슬픈 짐승" 스파르타쿠스의 진실)
하나는 현재의 시점, 일반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시점, 그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병창은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역사 속에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찾으려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고, 역사를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한다고 설명하였다.
고전에 대한 해석도 이 틀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특정의 관점이나 미리 정해 놓은 틀에서 역사나 고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선비들은 사서나 오경 등 유교 경전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날마다 읊조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려고 했는데, 이때 그들은 성리학자들, 특히 주희의 시선을 통해서 그 책들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과거 시험에서도 주희의 관점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올바른 답안이 될 수 없었으며, 같은 유교 경전이라도 양명학자 등 다른 견해를 가진 주석서는 금서로 낙인 찍혔고 이단으로 못 박았다.
특정의 관점은 현대의 관점이나 과거의 관점과는 달리 고전이나 역사적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하여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단 사회적으로 공인된(?) 특정의 관점은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고 권력이기도 하며 진리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고전에 대한 특정의 관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지배 권력과의 유착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되는 고전은 경전이 되고, 그 고전의 저자나 고전속의 주인공은 성인이 된다.
그것은 주로 권력자에 의해 미화되거나 권력의 비호를 받는다. 권력자는 특정의 관점을 통해 고전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고, 그 추종자들은 권력의 시녀가 되어 권력에 아부하면서 그에 기생한다. 특정의 관점이란 바로 이처럼 고전 및 그와 관련된 인물을 우상화하고 성인화하여 그것을 현실적 권력의 도구로 삼기 위한 현실적 목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자를 성인으로 떠받들고 <논어>를 경전으로 신성시하는 것은 겉으로는 공자나 <논어>에 대한 최고의 예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와는 반대로 권력과 그에 아부하는 자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공자의 진정한 모습이나 <논어>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외면당하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공자의 이름으로 역사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공자는 성인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교과서에서는 세계 4대 성인이니 5대 성인이니 하면서 그 속에 공자를 끼워 넣었다. 공자는 성인일까? 공자가 왜 성인일까?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은 <논어>를 처음 통독한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성서>도 읽어보았고 불경도 읽어보았다. 그런데 <논어>는 <성서>나 불경과는 전해오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뭔가 성스러운 그런 느낌이 없었고, 그 속에 그려진 공자 역시 인자한 어른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논어>를 읽고서는 너무 흥분하여 손과 발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움직여 춤을 추게 된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논어> 반 권만 가지고서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자랑했다. 나는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과장을 하거나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고, 앞서의 그들은 그런 믿음을 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논어>의 해석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논어, 세 번 찢다>(글항아리 펴냄)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논어 읽기 : 길 잃은 개(我讀論語 : 喪家狗)>이다. 앞의 책은 이미 우리말로 번역·출판되었고, 뒤의 책은 현재 출판을 위한 마지막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번역을 내가 맡았다.
이 두 책은 북경 대학 교수 리링(李零)이라는 한 사람이 쓴 것이고, 또 그것들은 표리 관계 혹은 보완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서의 출판은 <나의 논어 읽기 : 길 잃은 개>가 먼저 나왔고 앞의 책이 나중에 나왔다. 앞의 책의 원래 제목은 <去聖乃得眞孔子 : 論語縱橫讀>이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성인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려야 참된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종횡으로 <논어> 읽기"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번역본의 제목은 조금 과격한 느낌이 들지만 '인물', '사상', '성인이라는 이미지' 등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제목을 정한 것 같다. 어쨌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뒤의 책은 <논어> 자체에 대한 주석과 설명이고, 앞의 것은 공자와 그의 제자 및 그가 만났거나 평가한 인물, 사건과 사상에 대한 분석과 <논어> 등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즉, 앞의 <나의 논어 읽기 : 길 잃은 개>는 논어에 대한 주석서이고 <논어, 세 번 찢다>는 앞의 <논어> 주석에 적용된 원칙이라든가 그 속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논어, 세 번 찢다>(리링 지음, 황종원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
여기서 그는 공자가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성인이 되었는지의 과정을 역사적 자료와 추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공자에 대한 성인화 작업은 공자가 살아있을 때 시도되었지만, 공자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공자의 죽음과 더불어 공자의 제자 자공을 필두로 공자에 대한 성인화 작업은 본격화되었다.
그 뒤로도 맹자와 순자 등이 꾸준히 공자의 성인화 작업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가 밖에서 공자는 여전히 그저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즉, 전국 시대와 진대(秦代)에 이르기까지 공자는 비록 명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많은 학자들과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한대 이후로 왕조를 거듭할수록 공자는 점점 더 성인이 되어갔고, 역대의 제왕들은 공자를 권력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공자의 성인화 작업에 기꺼이 앞장섰다. 공자는 자신이 죽은 뒤에 그처럼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성인화는 공자가 원하던 것도 아니었고 공자 자신에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이 책들의 저자 리링은 철학자가 아니라 중문학자로서 고고학, 고문자학, 고문헌학 등의 분야에서 특히 뛰어난 내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배경은 이념을 먼저 설정해놓고 그에 꿰어 맞추기 식으로 <논어>라는 고전을 해석해오던 관행에서 벗어나는 데 큰 무기로 작용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고증학적 방법에 의해 공자와 동시대인의 눈으로 공자를 보려고 했고, 그러한 그의 작업에 출토 문헌과 그에 대한 연구 성과가 큰 디딤돌 역할을 해주었다.
리링은 공자의 중요한 공적의 하나로 고전 문화의 전수를 꼽는다. 그에 따르면 공자는 고전 문화의 전수자로서 공자가 전수한 육경은 문학·사학·철학으로서 모두 인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공자는 철저하게 인문학자였으며, 인문학의 중요한 특징은 '쓸모없음'에 있다는 것이 리링의 주장이다(인문학에 대한 리링의 이러한 주장은 평소의 나의 소신과 일치한다).
말하자면 종교적 대상으로 공자의 인문학을 이용한다거나, 정치권력이나 인민을 도덕적으로 훈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것을 이용한다거나, 혹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경영이나 처세의 방법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인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따라서 그는 "역사적 문헌을 역사적 문헌으로 읽지 않고 인문학을 인문학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주제에서 크게 벗어난다. 그것은 공자나 <논어>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리링의 이 두 책이 발표되고 나서 중국 학계와 인터넷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리링의 이 책들은 공교롭게도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공자 부흥 운동을 벌이고 공자를 정권 유지 및 홍보의 수단으로 삼고, 공자를 중국 문화의 아이콘으로 내세워 세계 곳곳에 이른바 공자학원을 설립하고 있던 때 나온 것이라서 그 논쟁은 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공자의 진면목은 전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 인류의 성인이라는 반열에 오른 공자라는 아이콘을 통해 중국 문화의 우월성을 만방에 알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세계의 문화적 맹주가 되고자 하는 전략에 방해가 될 뿐이다. 개혁 개방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에 힘입어 자신감을 회복한 중국인들에게 군사 및 경제와 함께 문화적 측면에서 대국으로서의 체통을 세워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인으로서의 공자라는 믿음은 떨쳐버리기 어려운 유혹일 것이다.
리링 교수의 이 두 책은 공자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성인의 말씀이나 경전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백가서의 하나로서의 <논어>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하는 매우 본질적인 문제에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오늘날 다시 공자를 전면에 내세워 권력의 앞잡이로 만들고 나아가 문화적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띠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공자나 <논어>를 정권이나 기타 다른 어떤 것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지와 양심의 표현이고, 지성인으로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는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포장되고 윤색된, 실제의 공자와는 거리가 먼 엉뚱한 허상일 가능성이 더 크다. 공자가 죽어야 한다느니, 혹은 살아야 한다느니 하고 논쟁하는 사람들이 가리키는 공자는 바로 그런 허상으로서의 공자였고, 그들은 결국 엉뚱한 허상을 가져다 놓고 둘러 앉아 논쟁을 벌였던 것이 아닐까? 이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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