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위원회가 발표한 7원칙 중 제6조가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절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이었다. 여기서 '대안'이란 말을 주의해야 한다. 입법 기구를 만드는 주체는 군정청이지 합작위원회가 아니므로 '원안'은 군정청에서 만들고 합작위원회는 필요할 경우 그 수정을 권고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합작위원회는 10월 7일에 7원칙과 함께 "입법 기구에 관하여 하지 장군에게 대한 요망" 7개조를 발표했다. 이것도 당시까지 군정청에서 내놓고 있던 입법 기구 관계 논설과 법령을 보완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1) 입법 기구의 일체 결의안은 군정 장관의 동의를 구하여 발표 실시케 할 것.
2) 입법 기구의 권능에 있어 '재가', '비준' 등 용어를 '동의'로 개정할 것.
3) 정원수는 60인을 90인으로 증가하되 45인은 지방에서 민선으로 하고 45인은 본 합작위원에서 추천하여 군정 장관의 동의를 요할 것. (이유 : 현하 우리의 정세는 아직도 국가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국가 독립 운동의 헌신 분투하는 독립 운동자의 다수를 주체로 하는 것이 이 기구의 효능을 강화 유력하게 하기 위함.)
4) 대의원 자격에 좌기 분자는 의원됨을 부득함.
친일파, 민족 반역자, 관리(일제 시대의 도·부 의원 주임관 이상의 관리) 악질 경헌, 악질 정총대 및 악질 모리배.
5) 선거 방법은 동 촌 리의 대표 2인씩을 선거하여 차 대표가 해면(該面) 대표 2인을 선거하고 면 대표는 당해 군 대표 2인을 선거하여 해 인수 비례에 의한 지정수의 대의원을 선거할 것. (선거 방식은 무기명 투표에 의함.)
6) 선거 사무를 집행하는데 협조 연락하기 위하여 각도에 감시원 2인씩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파견할 것.
7) 이 초보의 입법 기구는 최소한 기간 내에 전국을 통하여 총선거식으로 되어진 입법 기구로 대체케 할 것.
하지 사령관에 대한 '요망'을 하지에게만 조용히 보내지 않고 언론에 공표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합작위원회가 미군정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조선인의 요구를 대변하는 주체적 입장임을 밝힌 것이다. 공식적 대표권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런 역할을 가능한 한 추구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요망 사항의 내용을 봐도 조선인의 입장에서 원하는 입법 기구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군정청 사업에 조언해 주는 정도가 아니다. 합작위원회가 입법 기구에 관해 강한 입장을 취한 것은 당시의 '뜨거운 감자'였기 때문이다.
좌우 합작 노력이 그 시점까지 계속되어 온 데는 미군정의 힘이 컸고, 미군정이 좌우 합작으로부터 바란 것이 입법 기구 설치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7원칙이 나온 이튿날 하지의 환영 성명에서도 입법 기구 얘기만 한 것이다. 1년 전 랭던의 '정무위원회' 제안 이래 미군정은 자기네를 지지하면서도 조선인을 대표하는 기구를 만드는 데 부심해 왔다. 그 목적으로 민주의원을 만들었으나 그 한계가 너무 빤한 것을 보고 대표성을 조금이라도 가진 입법 기구를 만들기 위해 좌우 합작을 지원해 온 것이다.
미군정이 원한 입법 기구는 군정청 자문 기구였다. 주권을 갖지 않은 채 주민의 의사를 수렴하는 역할만 맡는 대표 기구는 식민 지배의 효율성을 위해 널리 시행된 제도였다. 조선총독부에도 그런 성격의 중추원이 있었다. 미군정의 입법 기구 추진에 대해 중추원의 부활이라는 의구심이 널리 일어났고, 좌우 합작을 가로막고 싶어 하는 세력은 입법 기구 반대를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합작위원회가 입법 기구 설치에 동의하고 요망 사항 7개조를 붙인 것은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뜻이었다. 7개조의 내용을 하나하나 음미해 본다.
제1조는 군정청이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제2조는 입법 기구가 자문 기관으로서라도 최대한의 독립성을 갖기 바라는 뜻을 보여준다.
제3조에서 합작위원회 추천의 '관선' 의원을 선거로 뽑는 '민선' 의원과 동수로 해 달라는 것은 제대로 된 선거가 이뤄질 수 없는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것이며, 합작위원회가 입법 기구 설치에서 책임만이 아니라 권한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운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대표성을 제한하는 조항이지만, 실제 선거 결과를 보면 실질적 대표성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구성 방법이었다.
제4조의 친일파 배제 원칙이 이 시점에서 현실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갓 해방된 나라의 선거에서 친일파 배제는 너무나 당연한 원칙이므로 출마하고 당선되는 일이 실제 벌어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서울의 입법 의원 당선자 세 명이 모두 한국민주당 후보였고, 그중 둘이(김성수와 장덕수)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인물이었다. 김성수는 그래도 그 위치에 비해 친일 행적이 덜한 편이었지만, 장덕수는 거의 친일 행위만을 통해 입지를 세운 사람이었으므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군정은 합작위원회의 요망 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 제4조에 농간이 끼어든 사실에서 당시 친일파의 기세를 알아볼 수 있다. "주임관(奏任官) 이상의 관리"가 "국장급 이상의 관리"로 둔갑한 것이다. 주임관이라면 대략 지금의 사무관급이었다. 한편, 국장급은 칙임관(勅任官)으로서 식민지 시대를 통해 역임해본 조선인이 몇 안 된다. 이 둔갑에 항의가 쏟아지자 "통역의 실수"라고 얼버무렸으니, 당시 '통역 정치'의 속성을 보여준 일이다.
제5조의 선거 방법에서 최대 4단계의 간접 선거를 내놓은 데서 제대로 된 선거가 이뤄질 수 없던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상황에서 선거인 명부 제대로 작성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제6조에서 선거 관리 위원을 합작위원회에서 내보내 일탈 현상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한 도에 두 명씩 내보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공정 선거를 위한 협조를 현지 경찰에게 기대할 수 있었을까? 미군정은 선거 흉내라도 내게 하려고 안달을 하고 있었는데, 합작위원들도 참 난감했을 것이다. 제3조의 관선 의원 제안이 부득이했던 사정이다.
제7조에서는 '총선거'식의 입법 기구에 대한 장래 희망을 표시했다. 직접 선거, 비밀 선거 등 원칙이 지켜지는 선거를 '총선거'라고 표현한 것 같다. 지금 만들어지는 입법 기구의 한계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미군정은 합작위원회의 7원칙 발표를 계기로 입법 기구 설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소요 사태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데도 선거를 강행한다. 7원칙의 다른 조항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7원칙 중에는 제5조의 정치범 석방 노력과 제7조의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의 자유 보장 등 선거 분위기 개선을 위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도외시하고 선거를 강행한 것은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합작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좌익에서는 원래부터 입법 기구 설치에 반대하는 기류가 강했는데, 합작 회담에 앞장서 온 여운형마저 졸속한 선거 강행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좌우 합작과 좌익 합당의 두 과제 사이에 끼어 있던 여운형의 입장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운형은 9월 하순 평양에 가서 이북 요인들과 만나고 돌아왔는데, 두 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 그들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양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북조선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인민당수 여운형은 4일 오전 11시 반 북조선 사정에 대하여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이 일문일답이 있었다.
(문) 북조선을 시찰한 감상은?
(답) 토지 개혁과 아울러 남조선과 같이 풍년으로 생활은 안정되었다. 물가는 쌀 한 말에 240~50원 정도로 생활의 여유는 없지만 비교적 안정되어 세민 측도 최소한도의 생활은 보장되고 있으나 상가의 물품 진열은 남조선보다 적다.
(문) 합당 후의 인상?
(답) 우리 생각에는 공산당이 간판만 떼고 그 전과 같은 시책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태도가 퍽 완화되어 합당 결성은 매우 양호하고 위원장 김두봉은 대단한 숭배를 받고 있다. 김두봉은 대학 건설에 분망하고 있으며 남조선에서 간 100여 명의 교수를 합쳐 약 150명의 교수가 있다.
(문) 남조선에서 가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자기들의 지식과 기술 부족으로 과거 1년간의 자기들의 실패를 자각하여 무엇이든 기술이라면 대환영을 하고 있어 최승희도 무용을 준비 중이고 대체로 보아 건설 일로에 매진하고 있다.
(문) 소군과의 관계는?
(답) 내용적으로 어떤지는 모르나 김두봉의 말에 의하면 소군은 전연 행정에 관계치 않는다 하며 가족을 가진 병사만 도시에 있고 기타 산에서 천막을 치고 있고 내가 4월에 갔을 때보다 소군의 수는 적어졌다.
(문) 이강국이가 평양에 갔다는데?
(답) 나도 평양에서 만났다.
(문) 좌우 합작은 어떻게 진전되는가?
(답) 합작이라고 한다고 반동과의 합작이 아니요 우익이 싫건 좌익이 싫든 간에 할 수 없이 합작하여 연립 내각이 되고 독립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합당 후의 명칭은 북조선과 같은 노동당이란 명칭보다 노동인민당이라 함이 노동 대중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더 적합할 것이다.
(문) 좌우 합작에 대하여 북조선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좌우 합작은 최초 공동위원회 속개를 목적한 것이므로 이에는 반대가 없을 것이고 다만 입법 기관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었다. 남북 통일은 언제든지 공동위원회가 열려야 될 것이니 만일 소련이 속개시킬 수가 없다거나 소군보고 철퇴하라고 말하라고 평양에서 선언하고 왔으며 나도 얼마동안 보다가 속개 아니되면 미소 양군 다 물러가라고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10월 5일자)
7원칙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이 대담이 있었던 10월 4일의 일이었다. 여운형은 좌우 합작의 성공을 원했는데 이남 좌익의 박헌영 일파는 이에 완고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 반대가 이념보다 정략에 입각한 것이라고 여운형은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3자 위치에 있던 이북 지도자들의 양해를 얻으러 평양에 간 것으로 이해된다.
대담 끝의 말처럼 이북 지도자들은 좌우 합작 자체는 찬성하면서 입법 기구 설치에만 반대하고 있었는데, 입법 기구에 엄격한 조건을 붙이면서라도 동의해 주고 합작을 성사시키겠다는 자신의 방침에 양해를 얻었기에 10월 4일의 합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10월 7~8일 여운형 '납치' 사건을 보자. 7일 새벽에 여운형은 누군가의 부름에 응해 집을 나섰다가 그날 밤 자신의 안전을 가족에게 알리는 쪽지를 하나 보냈고, 8일 밤에 돌아왔다. 그 이튿날 여운형은 담화를 통해 "모처에서 담론 중 현기증으로 졸도"한 것일 뿐이라고 발표했다. 그를 붙잡고 있던 쪽에서는 납치를 목적한 것이지만 그 자신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자진해서 납치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담화에서 여운형은 좌우 합작이 "당확대위원회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이제부터는 개인 문제가 아니요 인민당의 노선으로 삼고 적극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7원칙 발표 전인 6일에 확대위원회를 연 데는 좌익 합작의 공식적 성격을 확인하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법 기구 선거의 졸속한 추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10월 16일 백남운(신민당), 강진(공산당)과의 사회노동당 발족 선언 때였다. 좌우 합작의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는 입법 기구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좌익 3당의 무조건 합당파는 박헌영의 지침에 따라 9월 4일 합당 결정서를 채택하고 남조선노동당 설립을 선언했다. 이에 반대하는 여운형 중심의 인민당, 백남운 중심의 신민당, 그리고 공산당 대회파가 수습책을 모색한 끝에 사회노동당으로의 합당을 결정한 것이다. 10월 15일 결정되어 이튿날 발표된 "3당 합동에 대한 결정서"에는 "좌우 합작에 대하여", "입법 기관에 대하여", "남조선 비상사태에 대하여" 등 현안에 대한 입장이 붙어 나왔다. 입법 기관에 대한 입장은 이런 내용이었다.
현재 조선 민족의 당면한 최대 요구는 미소공위가 속개되어 민주주의 임시 통일 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데 있다. 금반 발포된 입법 기관 법령은 위에 말한 우리의 민족적 요청을 거세한 것이며 인민의 의사와 인민적 기초 위에 서지 못한 일종 군정 자문 기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법 기관 설치보다는 다음의 기초적인 인민의 권리가 확립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1) 검거 투옥된 모든 민주주의 애국 운동자와 인민을 즉시 석방할 것.
2) 경찰 사법 행정 기구 내에서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및 일절 반동 분자를 숙청할 것.
3) 언론 집회 결사 출판 파업 시위 신앙의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4) 군정 자문 기관인 민주의원을 즉시 해산할 것.
5) 일절 테러 행동을 금지하고 테러 단체를 해산할 것.
6) 지방자치체로 광범한 인민 조직의 활동을 보장할 것. (<조선일보> 1946년 10월 17일자)
사회노동당에 합류하는 사람들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도, 사회노동당에 대한 이북 지도자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도 여운형은 입법 기구 선거의 졸속한 추진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7원칙 발표를 기다린 것처럼 입법 기구 설치를 밀어붙이는 미군정과 우익의 기세 앞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세였다. 그 무렵 박헌영은 평양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지나간 일 하나를 덧붙인다. 공산당 대회파는 9월 28일로 당 대회를 예정하고 있었고, 박헌영 일파가 그 대회 소집을 어렵게 하기 위해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총파업을 앞당긴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 대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그런데 이 대회가 경찰 아닌 하지 사령부의 임검으로 중단된 사실이 눈에 띈다. 박헌영이 나중에 미국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하게 되는데, 간첩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정청과 사이에 상당한 비밀 거래가 있었을 법한 일들이 더러 있고, 이 일도 그중 하나다.
"박헌영파 불신임을 결의-조선공산당의 재건 대회에서"
합당 문제를 계기로 조공 내의 종파성을 분쇄하고 명실이 상부한 애국적인 조선공산당을 건설하려고 당 대표자 대회를 준비 중이던 반간파 즉 당대회 소집파의 활동은 드디어 결실하여 거 9월 28일 오전 11시부터 시내 혜화정 모처에서 38 이남 각지에서 참집한 대의원 250여 명 참석 하에 당대회준비위원장 윤일 씨 사회로 극비밀리에 대회는 개막되었다.
이 날은 먼저 박헌영 일파로만 조직된 현 중앙위원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만장일치로 이를 의결하였고 신 중앙위원 27명의 선정은 김철수 씨 외 4명의 전형위원에게 일임하고 지방 정세 보고를 하던 중 돌연 G-2의 임검으로 말미암아 윤일 씨 외 수 명이 피검되어서 오후 5시경 부득이 유회되었다.
제2일은 30일 오후 8시부터 시내 가회동 모처에서 피검되었던 윤일 씨 외 수 명의 동지를 맞이하여 신선된 중앙위원 등 100여 명 참석 하에 윤일 씨 사회로 속회하고 중앙집행부의 부서책임자와 합당준비위원 9명을 결정하였는데 책임비서 선정은 전기 전형위원에게 일임하고 동 10시경 폐회하였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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